119호 향기통신 세상에 애통하지 않은 죽음은 없다
“엄마, 박완서 선생님 돌아가셨대.”
아들 아이 말에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봤다.
향년 80세. 지난해 담낭암 수술을 받고 자택에서 따님의 간병을 받다가 영면하셨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달님은 알지요’ 심사를 해주신 인연이 있다.
그 당시 선생님을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그럴 것 없다하셔서 꽃바구니로 인사를 대신 했었다.
그 후로 간혹 심사하는 자리에서 인사를 드렸다. 품이 넓으실 터이니 기억 못하실 터였다.
함께 심사를 하셨던 권정생 ,이오덕 선생님도 타계하셨다.
권정생 선생님 장례 때는 어머니 만류에도 무릎쓰고 장지에 갔다가 친정아버님 임종을 못 보았다.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으셨던 어른들이 한 분 두 분 이 세상을 떠나셨다.
든든한 울타리를 잃은 것 같아 허전하다.
세상에 나고 죽는 것이 이치더라도 어떤 죽음인들 애통하지 않을까.........
이 나이되니까 육친을 보내는 애절과 존경하던 스승과 선배를 애도 할 일을 겪었다.
더욱이 동갑내기 남편을 먼저 보낸 뒤로는 덤으로 산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도 닥칠 일이니 담담히 받아들자 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소중했고 이 순간을 열심히 살려고 애셨다.
그리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2006년 가을 어머니 위자료소송 재판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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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대기실 앞에서 아버지의 첩이 어머니 측 증인에게 폭언을 퍼붓고 있었다.
그 여자 얼굴을 대하는 순간 가슴이 뛰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40년간 우리 어머니 피눈물 흘리게 한 그 여자가,
아버지를 응급실에 버리고 간 여자가 적반하장 큰소리쳤다.
나는 가슴이 터지려는 걸 주먹을 쥐고 참아냈고 증언대에 앉아서
그 여자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조목조목 증언했다.
변호사 사무실에 들려 귀가하는 길에 갑자기 위경련이 일어났다.
속을 끓인 탓에 급체를 한 것이다.
눈물이 쏙 빠지게 아픈 것을 이를 물고 참고 한의원으로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다 그만 한의원 앞 골목에서 나오던 트럭과 부딪쳤다.
한 발만 앞섰더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트럭에서 내린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놀라서 소처럼 순한 눈만 껌벅거리는데 죄송하다 하고 병원으로 뛰었다.
침을 맞고 겨우 진정이 되어 침대에 누웠는데 내가 황천객이 되었으면 어쩔 뻔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느닷없이 갑작스레 죽으면 안 되는 거였다.
제일 먼저 불쌍한 우리 어머니가 걸리고
중풍으로 누워계신 아버지가 걸리고
우리 아들 장가 못 보낸 것도 걸리고
조카에게 엄마 노릇 못해주는 것도 걸리고.
딸에게 친정 어미 노릇 못해주는 것도 걸리고
담배 못 끊은 남편이 병들면 꼼짝없이 딸애가 고생할 것이 걸리고
이래저래 걸리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함부로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깨워서 일어났더니 흰죽을 끓여 오셨다.
쟁반에 소화제까지 담아 오셨다.
다리 아픈 어머니가 쟁반을 들고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와 내 방으로 오신 것이다.
나는 아직 죽으면 안 되는 거였다.
건강하게 살아서 우리 엄마 꽃방석에 앉혀 드릴 의무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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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나는 오래 살려고 노력한다.
어머니께 자식 앞세우는 고통을 드려서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아직 여한이 남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