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회 우리 시 우리 노래
아침에 나물 무치면서 엄니 더러 마늘 깐 거 달라고했더니 내가 언제 마늘 깠냐고 하셨다.
추석 이후로 깜박깜박하는 횟수가 늘었다.
운동 다녀와서 당장 엄니 모시고 보건소로 갔다.
보건소 1층에 정신건강 증진 센터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검사 끝내고 정밀검사 예약날짜를 잡았을 때였다.
큰댁 시누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 7시까지 세종문화회관으로 올 수 있겠어? 아름엄마 시낭송 좋아하잖아."
약속시간에 맞추려고 엄니 모시고 부랴사랴 택시를 탔다.
기사 아저씨 말이.
"우리 아버지는 늙으면 절대로 안되는 분이었어요.
젊어서 펄펄 날아다니던 분이 늙고 추레해진 걸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난다니까요."
그 심정 이해하고 말고다.
엄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갔다.
큰시누님은 엄니보다 한살 연상이신데 아직도 사업체를 운영하시는 현역이시다.
같은 년배인데도 사고방식이며 생활패턴이 극과 극이다.
내가 결혼 전 후지필름 무역부에서 니트 디자이너로 일할 때 ,
소공동 프라쟈호텔 뒷길 뉴서울 사진관앞으로 지나다녔다.
사진관 진열장에 유명인사와 톱스타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건 꽃꽂이였다.
오며가며 어떤 소재들을 어떤 방식으로 꽂았는지 눈여겨 보았었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큰 시누님의 꽃꽂이 작품을 보면서 공부한 셈이다.
꽂꽃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 당시 꽂꽃이는 있는 집 여자들의 취미생활이었기에 언감생심이었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나서 사진관 시누님이 우리나라 1세대 플로리스트 임화공, 고화수씨와 함께 꽃꽃이회를 이끌어 오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누님은 고희때까지도 대학 총동문회장 등 여러 직함을 달고 활동을 해오셨다.
<문학의 집 >이사장으로 계시는 김후란 선생님께 인사 소개를 시켜주셨다.
김후란 선생님은 일흔 아홉 이시고 우리 형님은 여든 둘의 노익장이시다.
2013년 신작 가곡 음악회 <우리 시 우리 노래>가 시작 되었다.
여든 여섯의 김남조 시인은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올라 <우리의 독도 아픈 사랑이여>를 낭송 하셨고 메조 소프라노 이아경 교수가 노래로 불렀다.
여고시절 숙명여대에서 열린 문학의 밤에 갔다가 옥색 한복을 입고 시낭송을 하시던 선생님 모습에 반했었는데 ....
세월 앞에선 그 미모도 스러지고 마는구나.
유안진 시인의 <꽃으로 다시 살아>/소프라노 박미자 교수.
이근배 시인의 <백두산아 한라산아>/테너 이영화 음악 감독
김남조,신경림,유안진,문덕수,이근배,정현종,오세영,홍윤숙,김종깅,박희진, 김후란
열 한분의 예술원 회원들의 시에 곡을 붙여 발표를 하는 자리였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은 모두 칠 팔십대 원로셨다.
얼굴이 알려진 분들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오신 걸 보니 숙연해졌다.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맞다.
몸은 노쇠해서 거동이 불편하더라도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마음은 정정하신데
우리 엄니는 하루 하루 날짜만 죽이고 계시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밤거리를 내다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성격이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