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다반사

483회 성북동 투어

멀리 가는 향기 2013. 11. 24. 06:21

 배유안 작가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올라 온다기에  성북동 골목길을 걷기로  했다.

로직아이  박우현 교수도 배유안과 구면이라 동행을 했다.

 

조지훈 시인이 1920-68년까지 사셨던 집터                                                           조지훈 생가는 영양 주실마을 종택.(2012년)

이곳도 고증을 거쳐 복원 해야될 성북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선잠단터

길쌈은 조선시대 국정의 중요한 과제였기에 궁중에도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누에신에게 제를 지내는 친잠례가 거행되었다.

농업을 주관하는 선농단과 잠업을 주관하는 선잠단에서는 국가 주도로 제사가 거행되었다.

 

 

 

 성곽길을 따라 올라온 하늘아래 첫 동네 북정마을

 

 

 

 

 

북정마을 겔러리 앞길로 내려오면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 시화가 걸려있는 공터를 만난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산비탈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면

 

 

만해 한용운이  1933년에 집을 짓고 1946년에 돌아가시기까지 말년을 보낸 심우장이 있다.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어 동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집

 

 

 

 

 

 

 

절구공이가 닳어 없어지도록 갈고 가죽끈이 끊어지도록 책을 읽으라는 '아제절위' 친필 서각과 시 '오도송'

 

 

태화관에서 3,1운동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이 담긴 액자가 부엌에 딸린 도장방에 세워져있다.

 

근대문화 유산을  돌아 볼 때마다 시대적 고증을 받지 않고 개보수한 건축물과 인테리어가 안타깝고 못마땅하다

 

마루장에 칠해 놓은 에나멜 니스는 확 벗겨내고 싶다.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  왼쪽문은 작업실 통로 오른쪽문은 살립집 대문

 

- 미술교과서에 소개된 <지원의 얼굴>

 

 

20110년 12월 덕수궁에서 권진규전을 관람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날  네셔널 트러스트 시민 유산 3호로 등재된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개방한다는 소식에  달려간 것이다.

 

'권진규'전을 공동기획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의  부관장은 권선생을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했다.

 "권진규는 단순한 형체에 인간 내면의 깊이와 넓이를 함축시킨 작가이다.

그런 점에서 피카소나 모딜리아니, 마리니 처럼 공통의 목적을 추구하면서 그 해답을 자기 작품에 담아낸,

피카소와 필적할 만한 세계적 작가라고 생각한다"

 

여동생이 네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한 아틀리에는 1년여 보수끝에 공개 되었다.

 

 

 

작업실 입구의 1평자리 침실

 

                                                                                                                이층 전시대로 오르는 층계밑 작업 공간

일본에서  돌아 온 그는 동선동 산비탈에 손수 집을 짓고 작업에 매진했다.

명동화랑 개관1주년 기념 초대전으로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지만 미술계 반응은 싸늘했다.

 행세하는 미술동네의 주류는 권진규의 건칠과 테라코타 따위를 업수이 여겼다. 

 실의와 비탄에 빠진 권진규는 곧장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철제 다락을 붙들어 맨 양 쪽 쇠사슬이 섬뜩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자살을 했다.

 

'인생은 空(공),,破滅(그는 52살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파멸)입니다. 오후 6시 거사'

권진규(1922-1973)선생이  남긴 유서다.

 

 

1973년  5월 4일 아침 고대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자신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본 후, 그날 오후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다.

< 가사를 입은 자소상 > (1969-70년)은 그가 작고하기 3-4년 전에 제작한 것으로,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생을 끝내기 전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 자소상 > 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것이다

 

 

 

구립미술관 옆에 있는 수연산방은 이태준의 고택이다.

 

 

소설가 이태준은 이 집에서 1933-43년까지 기거 하며 집필을 했다.

이 집에서 구인회를 결성하고  모임을 갖던  이 집의 택호를 '수연산방'이라 지었다

 

요절한 아버지 때문에  목숨 수를 따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그의 아버지의 유품인 벼루에서 따왔다는 벼루 '연 을 따서 택호를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지용과 쌍벽을 이루던 그의 문장 론이 담깅 <문장강화>

 

 운좋게 저 누마루가 비어있어 차지 하고 앉았다.

 

복분자 인절미, 호박범벅 대추차를 시켜 놓고  주인공이 어른이라고 동화가 아닌가? 

사실동화, 현실동화 생활동화 무슨무슨 동화라고 굳이 구별할 필요가 있는가 ?  등등 이바구를 하다보니 술 없이도 밤이 깊었다.

 

한용운의 심우장과 이태준은 동시대의 작가이고 집도 지척이었다.

그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글로 풀어내기도 하고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회한의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박우현 원장의 말랑말랑한 철학을 읽었다.

 

남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불행하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칭찬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고

칭찬을 많이 듣는 아이들이 행복한 아이다.

칭찬을 많이 하는 집안은  언제나 행복하다 .행복의 시작은 칭찬이다 .

아멘. 밑줄 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