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호 부암동을 노닐다
어린이날, 부산의 배유안이 올라왔다.
지난번 성북동길에 이어 오늘은 부암동 길을 알려줄 생각이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자하문 터널에서 내렸다.
길 건너 서울미술관 입장료를 내고 전시를 본다음 3층으로 올라가면 <석파정>으로 나갈 수 있다.
달항아리를 닮은 이주영 선생.
호리병 속의 지니 ,배유안
이중섭의 그림도 만나고
나혜석의 그림을 만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외치던 신여성
우리 아버지의 유교적 교육에 길들여졌던 나는 삼십 초반에 불꽃의 여자 나혜석' 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미술학교를 졸업후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유럽 여행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원래는 김흥근의 소유였던 것을 고종 즉위 후 대원군이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소유 건물이다. 정자의 앞산이 모두 바위라 대원군이 ‘석파정(石坡亭)’이라 이름지었으며 삼계동 정자라 하기도 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
저 소나무의 아름다움은 뒷배경이 된 삼각산과 견줄만 하다.
젊은 애들은 너럭바위에 엎드려 시체놀이도 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시늉도 하고 재미나게 논다.
이 집의 원 주인이던 김홍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중국풍으로 지은 정자.
미술관 옥상에 잔디를 깔아 야외 전시장을 만들었다.
부암 동사무소 골목길을 조금 올라가면 현진건 집터가 있다.
현진건 선생은< 貧妻>, <운수 좋은 날> 로 필명을 날렸다.
그가 1935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일할 때,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룩하자 그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일장기 말소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1년간 투옥됐고 신문사를 강제로 그만둬야 했다. 시국 사건에 연루된 '해직 기자'가 된 것이다. '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선생은 이 집으로 이사 와서 소설 집필에 전념했는데 호구지책으로 양계장을 했다고 한다.
이 집은 <무영탑> 등 그의 후기 작품의 산실이 되었다. 훌쩍(<무영탑>은 임실에 살던 초등2학년 때 읽을 거리가 없어 아버지의 한국문학전집으로 읽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랑에 아홉살짜리가 거리며 읽었는데....)
정치적 울분과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장결핵을 앓다가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마흔넷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반면, 현진건 선생 집터에서 산쪽으로조금만 올라가면 종로구가 구 예산을 들여 문화재로 지정하고 대대적으로 보수한 집이 있다. 일제 시대에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논란이 있는 반계 운웅렬의 옛집이다.
두 사람은 암울한 시대를 지척에서 살았지만 그들이 살던 집의 운명까지 명암이 달랐다.
씁쓸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현진건 집터 담장 너머로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의 별장이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박팽년 등과 노닐었던 도원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그리게 한 작품이 <몽유도원도>이다.
대군이 이곳에 당도하여 여기가 꿈 속에서 본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라 하고 정자를 세워 심신을 단련하였다고 한다. 이 집 마당의 암반에 무계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무계정사롤 부른다.
젓가락 박물관 인줄 알고 들어간 <저 >가게.
능금마을 길로 올라가다 라 카페 겔러러리에 들러 박노해 사진전 <꽃피는 걸음>을 보았다.
민주투사로 옥고를 겪은 그가 에티오피아 오지로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엄선해서 전시 중이다.
에티오피아의 아침은 집집마다 향기 그윽한 분나 세레모니'커피 의례로 시작 된단다.
첫 번째 잔은 우애의 잔.
두 번째 잔은 평화의 잔.
세 번째 잔은 축복의 잔.
세 잔의 분나를 마시고 해 뜨는 대지로 나가, 새로운 희망을 씨 뿌리는 에티오피아 사람들..............
백사실 가는 길에 잠시 다리쉼.
내가 좋아하는 말, 고진감래.
중심서원은 이제 남의 손에 넘어가 카페가 되었다.
주택이라는 잡지 표지에 실리고 건축학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독특한 구조의 이 집도 주인을 잃으니 쇠락해간다.
이 집의 주인이 오상출판사를 할 때 신문 독자투고란에 실린 내 글을 보고 원고청탁을 했었다.
그 인연으로 그는 내게 글쓰기를 권했고 (그가 잡지사 시절 새벗문학상을 초안했다)
내가 계몽문학상을 타자 대단한 상을 받았다며 축하했었다.
능금마을을 지나 백사실 계곡을 따라가다 만난 도룡농 알.
<백석동천>
흰돌이 많아 신선들이 살던 곳으로 불릴만큼 경관이 수려한 부암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별서(별장)가 많다.
<별서터 연못> 1970년대 남동생이 홍대 다닐 때 스케치하러 갔을 때는 담장도 쪽문도 있었단다.
1830년에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누구의 별서였는지 추측이 어렵다가 ,
조선 말기 박규수의 <환재집>의 시에 백석정이란 구절과.
추사 김정희의 <완당문집>에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는 대목으로 추사의 별장임을 알게 되었다고.
193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2면 왼쪽 상단에 실린 백석동천 정자의 모습. 동아일보DB
종루구청은 사진의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란다.
다섯시간여 바람부는 봄 숲에서 자알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