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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김향이의 블로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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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반사

193호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멀리 가는 향기 2011. 9. 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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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좀 괜찮으신지요? 하영이랑 저랑 걱정하고있어요.
나이가 있으신지라 예전만큼 마음놓고 있지는 못하겠네요..
가족들 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저없는동안.

 

군대있을때도 마음이 아팠던게 휴가나갈때면 흰머리도 많아지시고

세월이라는 짐이 너무무거워 허리도 굽어지시는거같고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수없어 주름살이 깊게 패이는것이 안타깝더라구요


호주에서 돌아갔을때도 분명 할머니는 더 약해져 계실거고

아버지도 배는더 나오지만 얼굴은 더 야위어 지셨을테고..

고모는 뭐 걱정안해요 120세 무병장수 하실분이라
흰머리나 더 늘지않았으면 좋겠네요
......................................

저희가 바쁘게 살다보니까 멋지게 저희를 담은 사진 한 장 제대로된게 없네요
이사가고 여유가 생기면 풍경을 함께 담은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고 약속할게요.

다들 많이 보고싶네요. 하영이도 같은마음 이구요. 이사하면 또 메일 할게요
추석 잘 보내세요!!!              

......................................2011.9.8 .륭 올림

 

 

나는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날마다 울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이 생각납니다. 저도 '귀도'처럼 잘 할 자신 있습니다. 제 선택이었으니 후회 따윈 하지 않습니다. 하고싶은 말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글 대신 제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사랑합니다!"

"점심부터 밥을 세 숟가락으로 줄였습니다. 밥이 모자라 훈련병들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 세 숟가락도 초를 세어 다 못 먹고 나왔습니다. 하하. 이런 게 군대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더러워서라도 오기로 이길 것입니다. 옆에선 식사 당번들이 밥을 남기지 않으려고 억지로 꾸역꾸역 먹고 있습니다."

 

"5주차는 극기주라 밥과 잠이 제한되는데 그 때 먹으려고 교회에서 받아온 쵸코파이 2개를 숨겨두었습니다."
"아름아, 극기주 때 쵸코렛 먹고 싶다. 껌도 좋고, 다 부스러져서 위장해도 좋으니 머리 좀 써 봐. 배고파서 눈깔 뒤집힌다."

 

딸아이와 나는 초콜릿을 보내기 위해 궁리를 했다.

마이신 캡슐에 초콜릿을 가늘게 썰어 집어넣고 당의정처럼 생긴 초콜릿들을 약국에 가지고 가서,

'중이염 약 열흘 분'으로 둔갑시켜 보냈다.

우리는 약 봉투가 무사히 전달되어 아들아이의 귀한 양식이 되기를 고대했다.

 

"훈련소에서 한번, 여기 와서 한번, 고막이 찡하는 느낌을 받아 의무실에 갔는데

대충 보고 이상 없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보내주신 약이나 먹자하고 보니까

약이 좀 특이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수수께끼가 이것입니까?

더욱 웃긴 것은 훈련소 교관이 중이염 환자가 있다고 이틀치를 가져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할수록 웃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위장이 너무나 감쪽같아서 교관은 물론 아들아이까지 중이염 약으로 알고

 한 달이 지나서야 먹게 된 것이다.


아들아이와 나는 지금 연애편지를 주고받느라 그 어느 때보다 평화적(?)이다.

나는 아들아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신문 기사를 오려 보내주고 아들아이는 열심히 스크랩을 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책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저는 지금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당장 읽고 싶은 책들도 많고

왜 그 때 공부를 소홀히 했을까 정말 후회가 됩니다.

'훈련소 때 생각만 가지면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 맞는 말입니다.

보내주시는 영화기사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읽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초라하다는 생각보다 현실을 잊고 행복한 상상에 빠져듭니다.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서 신문을 오리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건강하세요."

 

아들아이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눈물의 씨앗이고 그리움의 불꽃이 된다.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돌 감아쥐어야만 잠이 들던 꼬맹이가 대한민국 군인이 되다니!

나는 '해병대 엄마'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



 

아름마,

엄마는 살아가는 일이 고단하고 힘이 들 때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마지막 영화 '희생'을 떠올리곤 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암과의 투쟁 속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으나 애석하게도 개봉을 앞두고 운명을 달리 했다.
칸 영화 사상 4개 부문에 동시 수상이란 이변을 낳은 작품 '희생'은

집요할 만치 참담한 절망 속에서 희망과 믿음을 그려내고 있다.

엄마는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끝 장면의 영상을 그림처럼 가슴에 걸어놓고 산다.


작가 알렉산더는 자신의 생일 아침에 어린 아들 고센과 함께 죽은 나무를 심는다.

끝없이 너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배경으로 죽은 나무를 심은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아, 네 온 마음을 담는다면 죽은 나무도 꽃을 피울 것이다.

" 하고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주어 꽃을 피웠다는 어느 고승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 아들이 올려다보는 시선을 따라 화면 가득 마른 나뭇가지들이 보이고,

 섬세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죽은 나무에서 꽃이 만발한 기적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고 나면 '나의 아들 앤드류샤를 위해,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듭니다'라는

자막이 뭉클하게 가슴에 남는다.

엄마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담긴 포스터를 벽에 붙여놓고 무시로 바라보곤 했었다.

 

 흰 구름이 흐르는 푸른 하늘과 은빛 물비늘이 뛰노는 바닷가에 앙상히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

나무 아래 풀섶에 누워 하염없이 나무를 올려다보는 소년, 그리고 양동이 하나.

이 장면을 떠올리자면 '삶이란 알 수 없는 기적으로 가득 찬 것!' 이라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말이

떠오르고 가슴이 따뜻해져 온단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듯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기울인 다면 못 이룰 것이 무에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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