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터널 위 행촌동 언덕에서 90여년간 영욕의 세월을 보낸 서양식 주택 딜쿠샤
대한매일신보 사옥이다, 선교사의 집이다, 흉가다 추측만 난무하던 미스테리 하우스 딜큐샤는
2006년 이 집을 지은 테일러 부부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베일이 벗겨졌다.
딜쿠샤의 첫 주인, 알버트 테일러
알버트 테일러는 광산개발자인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뿌리를 내렸다.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외신기자 UPI통신사 특파원)로도 활동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목격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취재해서 서방에 알렸다.
자신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난 날, 갓 태어난 아기와 아내를 만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했다가 아들의 요람 밑에서 한국의 독립선언문을 발견한다.
그 날이 바로 1919년 2월 28일.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하루 전이다.
알버트는 누군가 몰래 숨겨놓은 독립선언문를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서방세계에 알렸다.
또한 수원 제암리 사건을 비롯해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숱한 만행을 서방 언론에 알렸다.
그는 서울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인왕산 성곽을 걷다가 커다란 은행나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권율장군이 심은 은행나무다.
그후 아내의 요청에 따라서 그곳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그것이 인왕산 자락의 첫 번째 집. 은행나무 마을 행촌동 1번지의 딜쿠샤다.
정초석에 새겨진 딜쿠샤란 이름은 배우 출신의 부인 메리가
어려서 인도 북부 곰티간 주변의 '딜쿠샤 궁전'을 보고 행복한 마음, 희망의 궁전을 꿈꾸며
'DILKUSHA 1923'을 그들의 집에 새겼다고 한다.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는 화가이며 작가였는데 <호박목걸이 이야기>라는 저서를 남겼다.
딜쿠샤가 지어진 1923년 당시 인왕산 일대는 인가는 없고 나무들과 덤불숲만이 무성했다.
인왕산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1923년 당시의 딜쿠샤와 크고 작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딜쿠샤
90여년 이 동안 서울의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
알버트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사업가들과 모임을 가지고 정세를 논의했다.
알버트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갇혔고 그의 아내도 딜쿠샤에서 연금 되었다.
수감생활 끝에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으로부터 강제추방 당했다.
추방당한 이후 미국에서 살게 된 알버트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늘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다.
독립이후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었고 심장마비로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아내 메리에게 한국에 그의 유골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는 알버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을 양화진에 묻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색 벽돌로 된 건물인 딜쿠샤는 근대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딜쿠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브루스 테일러
브루스 테일러가 90세 기념 자서전'은행나무 옆 딜쿠샤'를 펴내고 2006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그의 가족 이야기와 가족이 살던 집 '딜쿠샤 궁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가 소년 시절, 영국과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을 때도 어머니 메리 테일러는 딜쿠샤가 그의 집이라며
늘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941년 부모님이 한국에서 추방당한 후 브루스도 딜쿠샤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재 미국 멘도시노에 살고 있으며 브루스 테일러는 아버지가 찍은 옛 서울 사진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다
그는 <은행나무 옆 딜쿠샤>라는 책 속에서 딜쿠샤에서의 어린 시절과 일제시대의 한국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테일러 가족이 추방된 후, 딜쿠샤는 해방과 6.25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피란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이 집이 전쟁에도 파괴되지 않고 남은 것은 기적이다.
딜쿠샤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주민은 40년 넘게 딜쿠샤에 살고 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전에 살던 세대로부터 거주권을 구입해 20년, 30년씩 이곳에서 살아왔다. 오래된 주민 몇몇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출가시킨 후에 조용한 노년생활을 보내고 있다
현재 이 집은 국유로 한국자산관리공단의 소유로 되어 있다고 한다.
언제부터 무단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이 집을 차지하며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몇 대를 거치며, 등기와는 관계없이 서로 거주권을 서로 사고팔며 살고 있다.
현재는 15세대가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쪽방촌이 되었다.
최근에 이들에게 서울시는 벌금을 부과하고 집을 비울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들이 떠나면 문화재로 지정될 것이라고 한다.
‘
60년대 이후 딜쿠샤 주변으로 건물들이 들어서고 지금의 빌라촌이 되기까지 행촌동의 역사를 딜큐샤는 조용이 지켜 보았다.
2018년 11월 마지막 세입자가 떠나고 복원 공사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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