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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반사

661호 아버지 기일

멀리 가는 향기 2015. 5. 24. 11:24

아버지 기일이었다.

어머니는 기운이 없다면서도 음식 장만을 거드셨다.

"잡채는 안하냐?"

제사상 차리는데 웬 잡채 타령인가 싶어 "누가 먹는다고?"

"애들 오는데 잡채는 해야지."

"애들이 누가 와요. 연락도 안 했는데."

밤 늦게 제사 모시고 다음날 출근 하려면 고생할 게 뻔해서 식구끼리 지내곤 했다.

"추석인데 애들이 와?"

"아이고, 서방님 제사 날도 모르고  추석이라면 어쩌. 까딱하면 딸한데 엄-마 하겠네."

어머니가 뒤로 넘어질 듯 웃으셨다.
"제사 떡 사러갔다가 떡이 다 팔렸대서  추석이라 일찍 떨어졌구나."하고 왔다".

 늬 아부지 탕국 좋아한다 하셔 놓고 시장에서 사온 건 무 1개 호박 2개 부추 1단 이었다.

뭐든 물으면 '몰라.'로 일관하신지가 꽤 됐다.

젊어서 그만치 고생하셨으니 제발 덕분으로  늙그막에 편안한 여생 보냈으면 좋으련만 ......

 

                                 -2003년 삼성문학상시상식  신라호텔 연회장

 

 

 

우리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양반이라는 소리를 들으셨다.

시앗을 얻어 어머니 가슴에 피멍 들게 한 거 빼고는  남 못할 일  안하고 셨다.

어려서부터 생김새도  체질도 아버지 닮았다는 자주 소리를 들었는데

아버지 빼닮아 착하다는 말이 욕처럼 듣기 싫었다.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서고,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고, 맺고 끊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어버지가 못마땅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첫 정이라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헝겊 인형에 만년필로 이목구비를 그려주시던 아버지  젊은시절 모습은 지금도 선연하다.

아버지가  서울로 직장을 옮긴 뒤로  한 달에 한 번  임실에 내려 오셨는데 

 내 선물은 물론이고 친구들 것도 챙겨 주시곤 해서 나는 공주님 대접을 받았다.

 열 살 에 서울로 이사왔을 때 아버지가 촌티를 벗긴다고 동아 백화점(신세계)에서 옷을 사입히고

 무용교습소와 아틀리에에 보내 어려서 부터 소질을 키워주려 애쓰셨다. 

 점심시간 짬을 내어 학교에 찾아오셔서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는지도 살펴 보셨다.

소공동에 있던 중앙도서관에 데리고 다니며 책을 읽히신 일은

훗날 내가 작가로 살아갈 수있는 바탕이 되었으니 아버지 은공이 아닐 수 없다.

 

두 집 살림을 하던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날은 어머니와 싸움이 났다. 

사춘기라 한창 예민한  남동생이 듣다 못해 아버지께 대들었다.

  "아버지가 살인죄를 졌더라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하셨는데

나는 나대로 서러워서 아버지 허리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었다.

 

아버지가 백자 호리병이라면  어머니는 뚝배기셨다.

기자촌 멋쟁이로 불리던  아버지의 다정다감한 기질을 이해 못해 준 어머니와

생활력 강하고 검소한 어머니를 격이 떨어진다고 곁을 주지 않은 아버지도 딱했다.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해서 나는 수녀가 될 생각도 했었다.

 

 

승환이 낳고 까무러쳤을 때 아버지가 내 팔다리를 주무르며 우셨다 했다.

어린 것 둘 키우랴 시할머니 병수발 하랴 시어머니 시동생 까지 일곱 식구 살림에

가시같이 마른 딸이 안쓰러워 보약을  창문으로 건네주고 휭하니 가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몸이 약한데 살림이 고되다고 늘 걱정을 하셨다.

그 무렵 다섯살 승환이가 "엄마 우리 식구만 살면 안돼?" 하고 물었다.

"우리 식구 누구?"

"엄마 아빠 나 애기 이렇게"  고사리 손가락 넷을 접어 보였다.

어린것이 엄마 손길을  빼앗겨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다.

 

 

 

남편이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일이 있었다.

 분을 삭이지 못한 나는 자정 가까운 시간에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나 이 사람하고 안 살고 싶어요."

남편들으라고  한 말인데 뒤늦게 아버지한테 큰 불효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은 셈이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 때는 내 맘 다친 거만 생각하고 아버지가 잠을 설치며 걱정하실지 생각못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어머니가 달려오셨다.

아버지가 써주신 봉함 편지를 전달하며 어머니가 무슨 일이있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뒤로 나는 부부싸움을 할 일이 있어도 혼자 삭였다.

친정 부모님이나 시어머니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고 아이들 모르게 했다.

 

아버지는 삼국지를 줄줄 외우다시피 하셨다.

아버지 서류함에는 상국지 필사본이 많았다.

명절날 조카들이 세배를 오면 삼국지에 나온 인물을 예로 들어 덕담을 해주곤 하셨다.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수술을 하고 입원 중이실때 말씀을 못하셨다.

아버지와 의사소통이 안되니  공책을 마련하고 손에 볼펜을 쥐어 드렸다.

 

 

"입원 일수가 얼마나 되느냐?"

아름이가 미국에서 나온 다는 말을 듣고  

"그 먼데서 뭐하러 자주 들락거리느냐 고생스럽게 올 거 없다고 해라"

 

 

병석에 누운 아버지가 카세트 태잎을 따라 부르던 노래들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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