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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반사

673호 장수마을

멀리 가는 향기 2015. 7. 5. 12:38

지하철 동대문역 5번 출구에서 03번 마을 버스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낙산공원이다.

 

헤화문 방면 북정마을 방향                                                        이화마을 방향

 

                                                              삼선동 장수마을 방향

낙상공원 성곽에서 바라본 동대문  ddp가 보인다.

 이화마을 가는 길의 정자

마로니에 공원이있는 동숭동 방향  

 
서울 성곽아래  이화,북정, 장수  세 마을은  196-70년대 주거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시절 서민들의 주거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성곽 아래 동네에서 영화 촬영을 많이 했는데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유년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성북구 삼선동 장수마을.

남동생과 장수마을 골목길을 돌아다닌 코스를 붉은 색으로 표시 했다.

 

지난 4월 서울시가 장수마을을 역사, 문화 특화마을 시범 대상으로 선정했다.

주민들의 필요와 계획에 따라 마을이 새롭게 단장될 것이다.


 

2009년부터 '장수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거 재생을 목표로 사회, 경제적인 재생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마을 만들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외국여행을할 때 부러운 것이 그 나라 주거 문화를 알 수있는 옛집들이 고스란히 보존 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코티지 하우스나  도심의 로우하우스에 살려면 3년마다 보수를 하고 시당국에 보고를 해야한다.

영국인들의 옛 것을 허물지 않고 잘 보존하는 전통은  엘리자베스 1세 셈페르 에어뎀(항상 같다)는 통치 슬로건에서 비롯 된 것 같다.


장수마을에는 현재 166가구에 220여 세대가 살고 있다.

 자가 비율보다 세입자들이 많다. 또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50%가 넘는다.

 대부분 주민들이 30, 40년 이상 장수마을에서 살아왔다.

 이웃과  피붙이보다 더 가까이 지냈기에 장수마을 주민들의 이웃 사랑은 남다르다고 한다.

 


장수마을은 재개발예정지로 분류됐지만 서울성곽과 삼군부 총무당이 있고

 북동향의 급경사 구릉지라는 여건 때문에 재개발 제약 요인이 많았다.

건설사는 문화재를 보존하고 고도제한을 감수하면서 개발을 추진할 이유가 없었다.

 

할머니들 웃음소리에 끌려 사랑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할머니들이 심심풀이로 만든 악세사리들.

할머니들께 찬물도 얻어 마시고 다리쉼도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한신대 벽화 봉사단이 그린 벽화를 지나서

토지도 64%가 국공유지다. 대부분 집들이 무허가 주택이고,

국공유지에 사는 사람들은 재개발로 보상을 받기는커녕 토지사용료인 변상금을 내야 한다.

 

마을 박물관은 닫혀있었다.

 

골목길에 화분들이 즐비했는데 고추, 가지들이 실하게 열렸다.

 

마당이 없는 옹색한 집.

대문 앞에 화분을 늘어 놓아  집으로 들고나는 동안 눈요기도 하고 고단한 마음도 달래고.

꽃들이 안구정화를 해주고  피로제가 되어준다.

 

이 집을 보자 마자 탄성이!

그야말로 지붕 낮은집인데 햇볕도 들지 못하는 마당에 회분이 즐비하고

지붕은 화분이 점령해 버렸다. 화분 무게로 지붕이 무너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기도.

 

아주머니가 호스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물을 주고 있었는데

꽃 주인은 아저씨라 했다. 30년 공들여 키운  자식인 셈이다.

백합이 어찌나 실하게 잘 자랐는지. 꽃들에게 쏟는 정성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흙만 보이면 꽃과 채소를 심었다.

골목 안쪽에 커다란 뽀족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틈새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무슨 거름을 주었기에 좁은 땅과 화분에서 열매를 맺는지 그제 놀라울 뿐.

 

 

 

대부분 고향을 등지고 돈벌이를 찾아 상경한 사람들이다.

고향의 산천초목이 그리운 마음을 이렇게 풀어 내었다.

 

 

 

성곽에서 내려다 본 성북구

삼군부 총무당. 옛 포도청 건물은 보수하다 중단한 것 같다. 

땅이 아래로 푹 꺼진  분지 형태인데다 음지여서 기운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다시 성곽길로 올라가 창신동- 숭인동 방면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100m 표고차 돌산 밑 마을창신·숭인동에는 채석장이 세 군데 있다.

창신·숭인동은 돌산으로 인해 동네 안에서 높이 차이가 100m 가까이 난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옛 채석장) 위 축대를 쌓고 지어진 건물을 보면 아슬아슬하다. 

 

 

 

 

일제시대 때 낙산의 질 좋은 화강석을 떼어다가 수많은 건물을 지었다.

경성부가 채석장을 직접 운영하며 당시 경성역(서울역), 한국은행 본점, 조선총독부, 경성부청(서울시청) 등을 지었다.

채석한 돌은 전차로 광화문까지 운반했다. 채석장은 해방 후에도 운영되다 1960년대 후반 폐쇄됐다.

사람들이 채석장 인근에 토막집을 짓고 사는 통에 돌산 밑 동네라 불리기도 했다.

 

 

 

 

 

 

 작은 조각 공원에는 지방 도시간 거리가 표시된 표지석이 있었다.

타향살이 설움을 달래며 떠나온 고향의 거리를 가늠해 보는 마음은 또 얼마나 서글플까

현수막을 재생하는 작업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리넨으로 만든 천가방을 35000원에 구입. 남동생 노트북 가방으로 낙찰.

 

 

뉴타운 해제 이후 창신·숭인동의 화두는 재생이다.

지금껏 허물고  새로 짓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고치고 살리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창신·숭인동에서는 현재 마을 만들기가 한창이고, 봉제 산업을 재조명하는 움직임도 분주하단다.  

 창신·숭인동은 일과 삶이  얽혀 있는 동네다.

창신·숭인동에는 2000개의 봉제 공장이 있다. 이 중 절반가량이 창신2동에 몰려 있다.

  50년대 광장시장이 의류시장으로 부상하면서 이 일대에 봉제 공장이 밀집되기 시작했다.

 봉제업은  60~70년대 우리 경제의 근간이었다.

의류 부자재를 실어오고 완성품을 실어내는 오토바이소리가 골목을  울린다.

오토바이 소리가 뜸하면 주민들이 시름을 잠긴다고

오토바이 소리가 쉴새없이 들려야 호황을 누리고 구겨진 삶이 다림질하듯 펴지는 동네.

당시 시골에서 올라와 미싱사로 일하면 공무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다가구주택 지하부터 옥탑방에 꽃다운 봉순이 언니들이 모여 천을 재단하고 박고 다림질해 돈을 모았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온라인 마켓의 부상으로 국내 봉제업이 다소 시들해졌다.

 외부 사람들은 창신·숭인동을 재개발해야 할 낡은 동네로만 인식하기 시작했다.

 

 

 

 창신동에는 박수근과 백남준의 생가터가 있다.  다리가 아파서  두 예술가의 자취는 다음에 찾아 보기로 하고 ....................

어느 집 대문에 핀 능소화 구경을 하다

빼꼼히 내다보던  광주댁 안주인과  이야기도 나누고

구멍가게 바깥에 내놓은  음료수 냉장고에  걸어 놓은 패트병 화분이 마음을 짠하게 한다.

꽃 몇 포기로 고단한 마음을 달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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