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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짇고리

911회 블루머

멀리 가는 향기 2018. 9. 23. 08:39

 

 

학교 육성회장 직함을 가진  지인으로 부터

증학생이 여 선생님들 스커트 속을 촬영해서  sns에 올렸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바깥 일을 하는 지라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속치마들을 죄다 블루머로 만들었다.

 

속바지  '블루머'가  여권신장의 의미를 가졌다는 걸  그림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여성의 성적 아름다움을 빌미로 의상으로 억압했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의복해방운동은  여성을 의복으로 억압해 사회진출을 막았던 시대에 여성의 인간화를 위해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남성처럼' 입으려면 허가가 필요하다는 법이 2013년까지 존재했다

 

   

 

쇼팽의 연인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

작가활동을 하고 여자 출입금지였던 공공기관에 드나들기 위해 남장을 했다..

프랑스 혁명(1789~1794)당시 신여성들이 바지 입을 권리를 주장했는데

혁명이 끝난 후 여성 바지 착용 금지법이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아멜리아 블루머(1818~1894)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하고 최초로 여성을 위한 언론을 소유했던 여성운동가.

 

드레스를 여성억압의 수단이라 여겼던 아멜리아 블루머는 드레스 길이를 줄이고 바지를 입었다.

최초의 여성바지를 블루머라고 했는데 일부 신여성에게만 호응이 있었을 뿐  노골적인 야유와 지탄을 받았다.

 

 

 

 

 

 

 

 

 

 

 

 

 

 

 

 

 

 

40년 뒤 여성들이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하면서 블루머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

 

 

1903년 일본은 미국의 블루머를  도입해 학생 체육복으로 전파시켰다.

 

 

2차 세계대전(1939~ 1945)

전쟁 중에 조선과 일본의 여성들도 바지를 본격적으로 입게 됐다.

한국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 바지를 입게 됐고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여성들이 몸빼를 일상복으로 착용

 

 

오드리 햅번이 유행시킨 사브리나 팬츠

여성 자전거 보급은 블루머를 빠르게 확산시킴과 동시에 여성해방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남성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긴  남자들이 바지입고 자전거타는 여자들을 윤락녀 취급을 하고 폭행을 했다고

 

 

 

1980년대 '파워 슈트'라는 말이  권익 신장과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파워 슈트는 성공한 여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여성 인권이 사회문제로 급부상할 때마다 파워 슈트 가 유행 했다.성범죄·성폭력 공개 운동인 '미투 운동이 확산되자   시상식,패션쇼 무대에 바지 정장이 넘쳐난다고.  '일하는 여성'과 '몸 파는 여성'의 이중성을 갖고 있는 '워킹 걸(working girl)'은  여성의 인권이 핍박 받는 방증인 셈.서양도 이럴 진데 동양은 오죽했을까? 아직도 이슬람권 여성들은 목숨 내놓고 쟁취해야 하는 상황.조선이 내세운 공자맹자의 덕은 의복,  헤어스타일, 몸가짐 , 심지어 겸상을 못하고 부뚜막에서 따로 먹도록 여성을 억압했다.

오죽하면 시집살이 고초를 노래로 풀었을까.

"배꽃 같던 요 내 얼굴 호박꽃이 다 되었네.
삼단 같던 요 내 머리 비사리춤이 다 되었네.
백옥 같던 요 내 손길 오리발이 다 되었네.
열 새 무명 반물 치마 눈물 씻기 다 젖었네.
두 폭 붙이 행주치마 콧물 받기 다 젖었네."

유교는 아내를 내쫓는   "칠거지악을 만들기도 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자식(아들)을 못 낳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

칠거지악을 범한 아내라도 버리지 못하는 삼불거 라는 극히 인간적인 보호 장치가 있기는 있었다.친정으로 돌이갈 데가 없거나, 부모상을 같이 치렀거나, 가난할 때 같이 고생하다가 부를 이뤘을 때.
 “결혼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 평생 남성에게 종속되도록 규정한  삼종지덕은 여자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능력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란다.조선시대에 세뇌당한 유교는 어머니에게서 딸들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안동 대구 태생이 아니어도 우리 어머니의 유교에 순종하고 살았다. 명절이면  친정에 가고싶은  올케들 대신 신정에는 시댁 손님을, 구정에는 친정 손님 대접하며 주방 일 노역을 기꺼이 감당한 것이다.
아직도 어머니는 명절을 손 꼽아 기다리시고  " 추석전 날  아이들 오라해서 송편 만들고 전 부치고 .......:우리 자랄 때처럼 한 방에서 며느리, 조카 며느리, 손주 딸과 주무시겠단다.
이제는 나도 기운이 달려서 제사고 뭐고 몸이 편하고  싶다."그러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어머니를 세상이 달라졌다고  설득해도 마이동풍. 올 해도 어머니 유교와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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