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모여살아서 기자촌으로 불리던 동네가
은평뉴타운으로 수용되면서
추억속으로 사라진다.
그 옛날 군사정권 시절에 서양식으로 지은 단독주택들이
시대가 흐르고 유행이 바뀌면서
영화세트장이 된 동네.
나는 산 비탈 언덕을 오르내리며
사라져가는 기자촌의 집들을 감상한다.
<굳세어라 금순이>를 촬영하던 골목집을 지나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집이 있어 달려갔다.
누가 이렇게 담벼락을 알록달록 꽃단장 시켰을까?
호기심이 발동 하지 않을 수없다.
질박한 오지 항아리에 도깨비 형상을 오려붙이고
프라스틱 다라이에 해바라기 꽃을 피운이 누굴까?
세멘트 담장 모서리에
수양버들 늘어진 연못가를 그리고
야자수 아래 암닭과 병아리가 정겹다.
할아버지 무등 타고 바나나를 손에 쥔 아이
웃음이 해맑다.
이쯤되면 이 집 주인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오가는이 까지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이 누군지
꼭 만나야 한다.
초인종을 누르고 집구경을 하고 싶다했더니
흔쾌히 대문을 열어준다.
꽃길을 지나서...
담벼락을 지나고
현관 앞에서 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집안을 치장한 꽃들은 놀라지 마시라.
페트병이다.
남들이 버린 음료수병과 뚜껑으로 저리 예쁜 꽃을 피웠다.
백여평의 집들이 온통 프라스틱 꽃밭이다.
마당 한쪽으로 달팽이 계단을 내려가면 포도밭이 있는데
거기도 온통 꽃밭이다.
그야말로 비밀의 화원인 셈이다.
그 뿐아니다. 집안 곳곳에 놓인 목조각은
버려진 나무토막이 환골탈퇴한 예술품이다.
아쉽게도 좋은 것들은 이삿짐 상자 속에 들어가 있어서 뵈줄수가 없다 하신다.
우리 마님 건강 하세요....
수영을 열심히 배워 우리 가족을 한강에서 구해 주세요.^^
떼깔나게 먹음직스러운 과일도
버려진 나무토막의 변신
식탁 밑에 써놓은 글귀.
소주 한병에 닭알 다섯개와 당근이면
얼씨구 두둥실 세상살이가 좋다는 할아버지.
우리 동네 정크 아티스트 장봉주 할아버지.(75세)
이북 태생으로 제과제빵 기술로 이름을 날렸던 분
40대에 청력을 잃고 세상 살맛을 잃었던 분.
나는 할아버지가 패트병꽃을 피우는 마음을 알 것 같다.
페트병을 가위로 오리고 페인트를 칠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을 터이다.
청력을 잃은 뒤로 사회 생활이 어려워진 남편을 대신해서
빵집을 하면서 생활 전선에 뛰어든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쁘고 고마웠다고 하신다.
이 집은 가게일로 지친 아내를 위해
할아버지가 30여년간 가꾼 그림같은 집이다.
"버려진 물건을 보면
아, 저걸로 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꿈에도 나무로 깎은 물고기가 펄떡펄떡 뛰논다니까.
조각? 안 배웠어. 그냥 깎는거야. 자꾸 하다보니까 늘어.
다음엔 이렇게 조렇게 만들어야겠다는 욕심도 생기고."
<세상에 이런일이>촬영하느라 이틀동안 고생하셨다는 할아버지.
방송 보고 집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아 한동안 유명세를 타셨단다.
귀 어둔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통역을 하시는 할머니는
오늘도 할아버지가 그린 꽃들을 밟고
예쁜 꽃들과 눈 맞추며 수영장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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