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동화작가 김향이의 블로그 세상

문득 돌아보니 한 순간

동화, 강연

461회 임실- 고창

멀리 가는 향기 2013. 9. 13. 10:01

 

 
안녕하세요. 김향이 작가님! 
작지만 아름다운 학교 아산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 오로라라고 합니다.
아산초등학교는 전교생 17명, 교장 선생님의 포함한 교사 7명 정도의 작은 학교이지만,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힘을 합쳐서 다니고 싶은 학교, 머물고 싶은 학교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동화를 사랑하는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김향이 작가님의 동화 세계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어서 강연 요청을 드립니다. 
작가님께서 바쁘신 줄 잘 알지만 그래도 한번 오셔서 빼어난 고창의 풍광도 구경하시고, 아이들에게 꿈과 사랑을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생략.
장문의 메일을 받고,  어머니 모시고 여행 삼아 고창에 다녀오기로 했다.  남동생을 로드 메니저로 앞 세우고 길을 나섰다.

 

빗속에 출발했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니 잠깐씩이라도 비가 그치는 요행을 바랄 수밖에.

4시 넘어 고향 임실에 도착했는데  비가 그쳤다.

 

            임실향교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동재와 명륜당사이에 둘레 4m, 수고25m,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얼마전 낙뢰에 가지가 부러졌다

                                                                                   이 은행 나무는 경술국치(1910)에 열매를 맺지 않았단다

 

임실향교 (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812 )

임실읍의 중앙, 용요산 동남쪽 기슭인 봉황대와 3·1 동산 사이의 향교 부락에 위치한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임실향교의 원래 자리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종 13년(1413)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지은 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으며,출입구로 홍살문·외삼문·내삼문 등이 있다.

 

                                                                   -외삼문

 

향교는  지방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국의 크고 작은 고을에 설치했던 관학이다.

고려중기에 중국의 향교 제도를 도입하였다.  <태조실록>에  유교이념의 보급을 위해 향교설립을 왕이 직접 명했다고 한다.

조선의 통치 이념이 유교사상이었고  중앙에서 지방 군, 현을 획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청년시절 향교에서 독학을 하셨는데 그때 공부 비법을 일러주시곤 했다.

집에 창호지문 갈아 붙일 때 떼어낸 한지에 중요한 귀절들을 써서 천장과 벽에 줄줄이 붙여두고 잠들기 전에 훑어보며 외우셨단다.

일제 강점기 청년시절 봉황산에서 불침번을 서실 때 기름을 아껴두었다가 향교에서 호롱불을 밝히시곤 하셨다고. 

함께 공부하면서 호형호제하던 분이 변호사가 되고, 자유당 국회의원에 당선 되자 비서가 되어 서울 생활을 시작하셨다. 

 

 

 

 

향교와 담장을 잇댄 곳에 아버지가 어린시절을 보내고 장가들어 우리 남매들을 낳은 집이 있었다.

 

30년 넘게 집배원을 하셨다는 동네 어른이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쌀뱅이를 아시나요>의 모티브가 되었던 뒷집 금순네 행랑채도 허물어지고 없었다.

 

                  해가 바뀔 수록 고향의 모습은 변해가고.  일가붙이 어른들도 찾아 뵐 수 없으니 여행자처럼 스쳐 지날 뿐.

날이 궂어 이도리집과 고모님이 살던 향교 집도 둘러보지 못했다.

 

  임실초등학교 맞은 편, 성가리 부락에 백로 서식지가 있다.

 

구한말, 이 지방의 거부 진재황이 여기에 별장을 짓고 백송 42주와 느티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면서 백로들이 날아들었단다.

지금은 별장은 없어지고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4천수에 달하던 백로가  근래에는 5백여 마리에 이르는 철새의 도래지가 되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등하교 길에 백로를 보면서 서울에 가 계시는 아버지를 그리워 했었다.

어린 눈에도 깔끔한  양복쟁이 신사인  아버지가 백로의 이미지로  떠오른 탓이었으리.

 

 

 

임실 초등학교는 1911년에 개교를 한 큰 학교다.

1962년 국민학교 시절,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왔다.

 

 

 

 

정문을 들어서면 우람한  측백나무들이 빽빽이 그늘을 드리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운동장을 지키고 선 느티나무는 아마도 개교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일학년 교실이 느티나무 근처에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사십 중반의 남자 선생님으로 얼굴이 말상이셨던 걸로 기억된다.

설명 끝에 꼭 "알만혀?"하고 물으셨는데 우리들은 "알보다 커요!"하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무슨 일이었나? 선생님 자전거에 실려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달님은 알지요>에서 송화가 선생님 자전거를 얻어타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선생님한테서는 풀꽃 냄새가 났다. 칡꽃 냄새랑 방아꽃 냄새를 버무려 놓은 것 같은 냄새였다.

송화는 선생님 등에 사알짝 얼굴을 대 보았다.

"아빠 냄새도 이럴까?'

송화의 뺨에 발그래 꽃물이 들었다.

아빠랑 함께 타는 자전거라면 얼마나 신이 날까? 송화는 나즈막이 한숨을 쉬었다.......

 

 

갈담에서 다슬기 수제비를 먹고 고창으로 향했다.

 

구시포 해수는 염도가 높아 부인병은 물론 관절염, 피부염, 습진 등에 약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예로부터 고창 일대에서는 해수찜이 민간요법으로 널리 전해져 왔다는

관광정보를 보고 보행이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서 구시포 해수찜을 선택했다.

해수찜을 하고 해수월드를 나섰을 때 10시가 넘었다. 

군청의 관광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은 내가 잘못이지.....잠잘 곳을 찾아 철 지난 해수욕장을 빙빙 돌다 

상점  2층 민박에 들었는데 잠자리가 허술하고 불편해서 거의 뜬눈으로 ....

 

 아침까지 비가 그치치 않고 , 해수욕객에게 바다를 빼앗겼던 물새들이  바다를 차지했다.

 

선운산 식당가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선운사에 닿았다.

 

 557년 백제 위덕왕 시절  고승 검단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조선 후기의 사료들에는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종 때 크게 중창하여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는데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영산전 명부전·만세루(萬歲樓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산신각·천왕문·대방·요사 등이 있다.

 

경내에 들어서자. 마음이 고요하고 편해졌다.

내려오기 이틀 전에 용문 초등학교 강연끝내고 용문사에 들렀는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구름도 고요하게 머문다는 절 집 이름답다.

 

영산전 외벽의 탱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화려한 오방색을 섞어 쓰지 않고 파스텔톤으로 그린 그림이 편안했다.

비파와 소고 종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절집에서 소재를 찾아 쓴 동화들이 몇 편있다. 지난 달에도 금정사 독성전 꽃살문을 소재로 중편 하나 건졌다.

 

 

 

 

'이 괴로움도 잠깐 머물다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리 '

'돌을 쌓듯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모아 살다 보면 이루어질 것이니.'

 

'

'죄를 지어 마음에 겁을 들이지 마라' 

'순리대로 살아야 편안하다 '                       

 

절집에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은 즐거움이다.

중생들이 산사를 찾는 까닭은  오욕칠정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저마다 소원을 간절하게 빌기 위함이리.

 

 

"보살님은 어디서 오셨소?"

스님이 어머니께 물었다.

"사위가 아니고 아들이었소? 이 바쁜 세상에 아들 딸이 어머니 모시고 여기까지 오다니 보살님은  복이 많소.

저어기 가서 공양이나 자시고 가시오."

 

"선운사 자랑거리는 무엇인가요?"

스님께 여쭈었을 떄

선운사 지장보살 좌상과 도솔암 금동 지장보살좌상이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만세루'가 더 마음에 들었다.

 

 

 

만세루는 스님들이 설법을 공부하던 강당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여행객들이 차를 셀프로 마시며 쉬는 휴식공간이 되었다. 

 

크고 작고 비틀어진 나무 들이 제 생긴데로 쓰였다. 격식에 억메이지 않고 자연스런 파격으로  지어진 집이 마음에 들었다.

기둥의 형태는 크고 작고 비틀어지고  천정의 서까래도 천연스럽게 휜 것이 많다.

심지어 기둥몸까지 이어붙이고 대들보 위쪽 종보는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을 사용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목재가 귀한 조선시대 상황에서 도편수들이 궁리끝에 독특한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마치 자투리 천을 이어 조각보를 깁듯 집을 지은 그 공이 아름다웠다.

 


절집에 쓰인 나무들이 커도 한 몫하고 작아도 한 몫하고 비틀어지고 틀어져도 한 몫 씩 했다.

이 세상 이치도 그러하다.

 

 

                 먼 훗날  어머니 모시고 나들이 다니던 때를 추억하며 가슴 애일테지....

 

아, 좋다.참 좋다.

오락가락 가을비는 우리가 차안에 있을 때만 가려서 내려주시고

 

선운사 꽃무릇을  어머니께 뵈드리려고 나선 길인데 이제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9월 말에는 선운산이 꽃무릇  천지가  될 것이다.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갔더니
동백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 선운사 동구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 사자바위아래 전조암

 선운사에서 십여분 거리에 아산초등학교가 있었다. 

사자 바위를 병풍으로 세우고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담장으로 두른  전교생 17명의  작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도솔암에서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서비스 차량이 오고 기어이 오로라 선생이 마중와서 강연 시간이 십여분 지체 되었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교직원, 학부모  유치원생까지 과학실에 모여앉았다.

 

 

 책을 통해 운명을 개척한 사람들의 일화를 들려주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라고 당부를 했다.

 

아이들이 읽었으면 좋을 성 싶은 책을 가져가서 아이들 수준에 맞춰 선물로 나눠주었다.

 

 

오로라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들이 다음날 독후활동시간을  열성적으로 보냈다는 메일이 왔다.

이것이 먼 곳 까지 초청강연을 다니는 보람이다.

아, 학부모님께 햇깨로 짠 참기름 선물을 받았는데 올 추석 나물무침은 진짜 고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