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자료 수집가 K씨가 조선인형 사진을 보내왔다. 그 사진 속에 평소 내가 수집하고 싶었던 '조바위 쓴 소녀 인형'이 있었다. 그뿐 만 아니다. 그가 국보급이라며 침이 마르게 자랑한 신랑신부 인형은 혼례복을 제대로 갖춰 입힌 예술품이었다.
그가 미국인 골동품상을 조르고 졸라 입수한 신랑신부는 잘 보존이 되어서 옷감이 삭거나 훼손 된 곳이 적다고 했다. 미국인 골동품상이 다른 딜러에게 판매했다는 인형도 사진으로나마 감상할 수있었는데, 조부모를 비롯한 삼대가 모인 대가족 인형이었는데 일본 풍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조선인형이었다.
예로부터 우리는 인형을 주술적 용도나 부장품,액막이로 사용해왔기에 집안에 들이면 안되는 께름칙한 물건이었다.
구한말 개화기에 선교사들과 외교사절단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관광상품용 인형이 만들어졌다. 그 무렵 서양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져간 조선 인형들이 수집가들에 의해 현존하는 것이다.
1930년대이후 외화벌이 관광상품으로 가장 많이 생산한 인형이 신랑신부 인형이었다. 사진으로 본 신랑신부 인형은 여지껏 보아 온 신랑신부와 차원이 달랐다. 당연히 욕심이 났고 다른 수집가에게 넘겨질까봐 안달이 났다.
그가 요구한 금액이 부담스러웠지만 그가 사진으로 보여준 인형을 모두 구입 하기로 하고 흥정을 했다.
그 또한 딜러들에게 판매하는 것 보다 수집가인 내게 넘기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딜러들은 인형을 돈으로 보지만 나는 망가진 인형마저 보수하고 잘 손질해서 문화적 가치로 보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 했다.
2013년 7월 20일, 그가 상자에 담은 인형들을 조심스레 안고 우리 집으로 왔다.
인형을 본 순간 국보급이라던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가 인형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그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시대상을 엿 볼 수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혼례 복식은 물론 미인의 기준까지 알수있는 귀중한 유산이기에 그렇다.
명주, 숙고사, 갑사, 항라 , 자미사, 등 비단과 옥양목 , 한지 등 으로 지은 인형의 옷은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다만 활옷 색동소매 부분의 감색 숙고사가 삭았을 뿐이다.
신랑 신부 인형이1930년대 관광상품으로 양산되기 전, 1900년대초기의 순수한 조선 인형이라고 단언할 수있는 것은.
우선 일본풍의 석고 인형에 한복을 입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목 구비의 표현도 일본인형의 얼굴과 확연히 다르다.
인형의 바디도 몰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나무를 깎아 만들고 얼굴에 진채를 했다는 점이다.
손바느질로 속옷부터 겉옷까지 조선의 복식 일습을 디테일하게 표현한 점도 놀랍다.
나무로 인형의 몸을 만들고
팔 다리는 한지를 감아 풀칠하고 손가락은 두꺼운 종이를 오려 표현하고 한지로 감쌌다.
발은 소창으로 감싸 풀로 붙인 다음 '당혜'를 신겼다.
당혜는 궁중이나 반가의 여인이 신던 신으로 신코와 뒤축에 당초무늬를 그려 넣었다.
얼굴은 진채(단청에 쓰이는 진하고 불투명한 채색)로 눈과 입 연지 곤지를 그렸다.
특히 신부의 넙데데한 얼굴과 외꺼풀의 작은 눈매가 당시 조선 미인형임을 알수있다.
신부가 입고있는 '홍원삼'은 비빈의 대례복이다. 통일신라 문무왕때 당나라의 복식을 받아들여 오랜 세월 변형되어 토착화 된 것이다.
앞자락 보다 뒷자락이 길며 노랑색 남색 두 줄 색동 소매 끝에 흰색 한삼을 달았다. 소매 통이 넓고 둥글다. 원삼을 입은 위에 다홍색의 큰 띠를 띠었다.
조선 후기에 일생의 한 번 뿐인 경사스런 날에 서민들도 아름다운 원삼을 입을 수 있도록 왕실에서 허락 했다.
궁중용과 서민용 원삼은 형태만 동일 했을 뿐 비단의 빛깔이나 치수면에서 엄격한 차이를 두었다. 왕비는 황원삼을 비빈은 홍원삼을 공주나 옹주는 녹원삼을 입었는데 서민용 원삼은 공주의 녹원삼과 모양은 같고 치수를 작게 만들었다.
속치마 고름과 저고리 고름.
옥양목 속바지, 속치마를 입고 그 위에 남색 치마, 붉은 겉치마를 덧입었다.
머리에 '족두리'를 쓰는데 노론은 중앙이 오목하게 들어가고 소론은 봉긋하게 올라왔단다.
인형은 노론 집안의 신부인 셈이다.
족두리는 화관과 마찬가지로 예복을 입을 때 쓰는 관이다. 고려시대 몽골에서 들어온 풍습으로 영 정조 때 가채를 대신하기 위해 보급되었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여섯모의 관은 장식이 없으면 '민족도리' 패물로 장식을 하면 '꾸민족도리'로 불렸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붙여 만든 긴머리를 땋아 뒤통수에다 틀어 올려 '용잠(비녀 )'를 꽂은 낭자머리에 '뒤꽃이'도 했다.
왕비만 할 수있는 용잠을 서민들도 혼례 때는 사용할 수 있었다.
뒤꽃이는 비녀에 더하여 쪽머리에 꽃는 머리 장식으로 보패들을 사용하여 비녀보다 더욱 화려한 머리 장식이다.
비녀는 조선후기 얹은 머리를 금지하고 낭자 머리를 권장하면서 사용하게 되었다.
비녀의 다양한 소재와 모양을 보고 신분을 알 수있었다.
비녀가 낭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머리 부분의 장식을 보고 비녀의 종류가 구별이 되었다.
금,은, 놋, 나무, 진주 ,산호, 옥,죽,각,골등의 재료로 종류가 구분되었고,
머리 형태의 디자인에 따라 용잠, 봉황잠, 오두잠, 원앙잠 등 수많은 형태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존비귀천의 차별이 심해서 금 은 주옥등으로 만든 상류층에서만 사용할 수있었다.
'큰댕기(도투락댕기, 주렴)'를 드리우고 '앞줄 댕기(드림댕기)"를 했다.
앞줄 댕기는 큰비녀 양쪽의 여유분에 감아서 양 어깨 위에 드리우고 진주 산호수 비취 호박등으로 댕기끝을 장식했다.
신부예복의 장식품으로 지환과 이식, 노리개와 낭자 등 신분과 빈부의 격차에 따라 가짓수가 달랐다.
부모로 부터 받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첫 뻔 째 덕목이라 하여 귓불을 뚫어 꿰는 귀고리 대신 이식(귀걸이)을 귀에 걸었다.
신랑 인형은 옥양목 바지저고리 위에 남색 옥사로 지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그 위에 자주색 숙고사 '단령'을 덧 입고 '목화'를 신었다.
머리에 썼을 "사모'(벼슬아치들이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쓰던 모자)는 없고 '탕건' 만 쓰고 있다. '단령'위에 걸쳤을 '품대'(허리띠) 도 없어졌다.
단령은 조선시데 1품-9품관리와 유생들의 관복이었다. 옷깃이 둥근 형태의 외투인데 서역의 호복이 변형되어 당나라 때 조선에 전래되었다. 조선 초기의 단령은 명나라 복식과 달리 옆구리가 두루마기처럼 트여있어 옷고름으로 묶었다.
품대는 관복을 착용할 때 옷을 여미는 허리띠로 착용자의 위계나 신분을 드러내는 복식의 주요 물품 가운데 하나다. 품대 제도는 고려시대 말 1387년 명나라에서 전래되었다.
목화는 겉은 흑단 안은 백색 전으로 만들고 목부분에 자색 견으로 배색을 했다.신코와 신등에선을 둘렀다. 바닥에 나무와 가죽을 대고 둘레를 꿰매는데 바닥에 십자문으로 정교하게 떠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비했다.
'흉배'는 단령의 가슴과 등에 달았던 장식품이다.
1454년 단종 임금 때 부터 계급의 표시로 관복에 달았다. 궁중 수방의 내인들이 수 놓은 흉배를 관리들에게 상으로 하사 하였다.
무관은 쌍호, 단호 문관은 쌍학, 단학 흉배를 품계에 따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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