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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직원들이 오스트리아 전통복장을 하고 서빙을 해주어서 보기 좋았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랩 패밀리 로지'의 운영이 2세대의 막내 요하네스 폰 트랩(69)에서 그의 아들 샘 폰 트랩(36)에게 넘어가는 것을 화제로 가족사를 소개했다. 198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후 가족 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요하네스는 지분 매입과 친척들과의 소송 해결 등을 통해 산장을 이어받아 운영하게 됐다 |
층마다 책을 읽을 수있는 공간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로비 옆 온실 분위기의 휴계공간도 좋았다.
지하 세미나 실에서 폰 트랩 일가 다큐를 보았다.
마리아는 고아가 돼 친척집에 맡겨져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내다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수녀원에 적응 못하자 가정교사가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대령과 결혼한다. .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이들과 결혼한 것이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한 바 있다.
그녀는 카리스마 강하고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저택의 물건을 집어던져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곤 했는데,
전처의 유산이 바닥나 파산에 이른 일가를 경제적으로 일으킨 것도 그녀의 기질 덕분이다.
온순하고 과묵한 남편은 '귀족이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든 모양이지만,
10명의 아이를 키우려면 가족이 공연을 다녀야했다.
미국에서 마리아는 매니저를 고용해 폰 트랩 가족을 인기 합창단으로 만들어내고,
버몬트주에 농장을 마련해 스키 숙박업을 시작했다.
자서전이 히트를 치자 농장을 관광지화 하고 마리아의 진두지휘 아래 가족 단위의 단체생활이 계속되었다.
전용 버스로 움직이는 순회 공연, 모두 거들어야 하는 농장일, 20대 30대가 되도록 그들은 '가족'에서 이탈하지 못했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거나, 결혼을 하겠다면 마리아가 불같이 노했다고 자식들은 인터뷰하고 있다
. "어머니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했죠. 둘째 누이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침대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둘째가 창문으로 탈출해 가족을 떠난 뒤, 이번엔 마리아가 낳은 딸이 한밤중에 집을 나갔다.
갈 곳도 없는 충동적인 가출이었는데, 사흘 뒤 쓰러진 채 들판에서 발견되었다.
딸의 상태가 심각해 어쩔 수 없이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가족 합창단의 와해가 시작되었다.
마리아가 인생을 걸고 폰 트랩 가족을 사랑하며 봉사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결국가족공동체에 집착한 마리아는'마마 스머프'로 살았던 셈이다.
스키장, 수영장, 농원 ,방갈로들이 있는 호텔 구경을 하고
다음 행선지 너세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 배경지를 찾아 출발 했다.
너새니얼 호손 1804년 -1864
대학 졸업 후 어머니 집에 칩거하면서 광범위한 독서와 습작을 했다. 이때 청교도적인 배경과 정신적 기질을 탐구하여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정신을 키웠다.
1828년 익명으로 처녀작은 <팬쇼>를 자비 출판했으나 뒤에 작품에 불만을 느낀 나머지 모두 회수하여 없애버리고 말았다.
1838년까지 적어도 44편의 단편 및 소품들을 발표했는데 1830년18편을 추려 <트와이스 톨드 테일스>라는 단편집을 출판했다.
1842년 소피아와 결혼하여 콩코드, 에머슨 소유의 구 목사관에서 신혼생활을 시작 했는데 소피아는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는 내조형의 아내였다. 호손이 세관에서 근무하다 해고되었을 때 "난 당신이 글쓰기에만 몰두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해요."라며 창작활동을 격려했다. 호손이 "돈벌이를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지 걱정이오."라고 말하자, 남편 월급 일부를 저금한 돈을 보여주었다. 감동받은 호손은 첫 번째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주홍글씨》
1852년 5월 웨이사이드로 이사하여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를 출판했으나 <주홍 글씨>, <일곱 박공의 집>보다 평이 좋지 못했다.
친구 피어스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자진해서 <피어스 전>을 썼다. 피어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리버풀 영사로 임명되었다. 가족과 영국으로 갔다가 영사직을 사임한 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후 웨이사이드에 정착하면서 다시 집필을 시작,
영국의 풍경, 생활풍습 등을 그린 작품들을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친구 피어스와 여행중 플리머드에서 60세의 일기로 객사했다.
남북 전쟁 직후, 시골 마을 산에 사람 얼굴을 닮은 바위가 있었다.
자연이 새긴 그 얼굴은 거룩한 표정으로 마을을 굽어보았고 마을에는 ‘언젠가 이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리라’는 예언이 생겼다.
소년 어니스트는 이 예언을 굳게 믿으며 고대했지만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로 거론된 이들은 번번이 소년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여전히 어니스트는 예언의 완성을 기다릴 뿐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화이트마운틴에 올랐다. 4080미터. 백두산 높이는 2,744m
케이블카에서 귀가 멍해졌는데 머리가 아프다고 우는 아이도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니 기온이 차이가 났다. 쌀쌀해서 몸이 웅크려질 정도
등산화 없이 걸을 정도로 가파르진 않았지만 오싹오싹한 코스도 더러 보였다.
이 선생이 절벽 끝에 서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서둘러 내려와서 큰바위 얼굴 조망대로 향했다.
2003년 5월 4일 자 중앙일보/ 얼굴 잃은 '큰 바위 얼굴'
19세기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이 쓴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잘 알려진 미국 뉴햄프셔주 프랑코니아 주립공원 내 자연암석인 '산의 노인(The old man of the mountain)'상이 지난 3일 폭풍우로 붕괴돼 사라졌다.
철제 빔 조형물을 세워 놓았는데 자기 키에 맞게 서야 사라진 큰바위 얼굴을 볼 수있다.
자기 키에 맞게 서서
요렇게 철제로 조각해 놓은 산의 노인상을 볼 수 있다.
유안이 카메라 앵글로 잡은 큰바위 얼굴
5시 15뷴 <타샤튜더 정원>이 있는 브레틀보로로 출발. 2시간 반 만에 도착한 <타샤튜더 뮤지엄>
1805년에 지어진 건물 옆에 커다란 빅트리가 있었다.
관람 시간이 지나 문을 닫았겠거니 했었다.
현관문에 안내문이 붙어있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이전한 주소가 없다.
우리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애석해 하는데 안에서 남자가 나왔다.
그는 물건을 다 빼내갔다.는 이야기 뿐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그가 말조심을 하는 것 갗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무가 엄청 크지 않느냐는 말 만 남기고 차를 타고 떠났다.
브레틀 보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랑스럽게 여길 뮤지엄의 이전 장소를 알려줘야 마땅한데 모르쇠라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를 찾아야 할 판. 1시간 반 만에 길거리에 세워진 그 집 번짓수 우체통을 찾았다.
급한 김에 우체통이 있는 집을 향해 케리어를 끌고 들어갔다.
한 밤 중에 케리어 끄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던 여자가 소리쳤다.
스톱!
우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이선생을 따라 우르르 몰려오는 우리를 보고 동양인 떼강도로 오인한 모양이었다.
총을 안 맞은 게 다행이다.
"빌 집을 찾아욌다"는 말에 그들이 골목 안 쪽으로 들어가라 일러 주었다.
백인 아내와 사는 건장하고 잘 생긴 빌이 우리를 위해 빵을 구워 놓았다고 자랑했다. 엄마 대신 딸내미가 집 안내를 맡았다.
이 선생은 다락방으로 올라가고 나는 타샤 튜더 패밀리 홈페이지에 있는 주소를 검색 해두었다.
대박 황당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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