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넷. 한창 살림 재미를 알아가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과의 일상을 중앙일보 독자란에 써 보내곤 했었다.
오상 출판사에서 독자투고란에 실린 주부들의 글을 받아 책으로 묶었고,
그 주부들이 '코끼리문학회원'이 되어 박범신, 신달자, 서영은 선생, 강계순 시인의 문학 강연을 들었다.
<1986년 서영은 선생 모시고 보광사 나들이>
그날 선생님은 흰색 린넨원피스에 귤색 벨트로 늘씬한 피트라인을 강조하고
까플린스타일의 챙 넓은 밀짚모자로 마흔 넷의 세련미를 돋보이셨다.
(아름이랑 선생님 모시고 찍은 사진은 숨바꼭질 중이다)
수필 합평을 하던 이 아줌마들이 선생님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날 선생님이 버스 정류장까지 일행을 배웅하셨는데,
내 가슴 께를 손으로 콕 찍으며 말씀하셨다.
"이 속에 동화가 들었어요. 동화 쓰세요."
그 무렵 나는 선생님의 소설책을 쌓아 놓고 열독을 하다가 밑줄을 그으며 필사를 했다.
미처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못했을 때였다. 그냥 사무치게 좋아서 그리 한 것이었다.
마흔 살에 등단을 하고 5년 차 되던 해.
성바오로딸 수도회 계간지 '듣봄' 만남 페이지 인물평을 선생님께서 흔쾌이 써주셨다.
( 주변머리가 없는 나는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드렸다.)
그리곤 간혹 문학상 시상식 자리에서 선생님을 뵈었을 뿐 , 작품으로만 선생님을 독대했었다.
내가 사별의 고통으로 두문불출 허우적 댈 때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다.
선생님이라면 내 슬픔의 깊이를 이해하고 어루다독여 줄것 같아서였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작은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사무국장 변현주씨를 통해
선생님 소식을 듣곤했었다,
그동안 불통이던 전화를 선생님이 받으셨고 그리고 어제 현주씨 대동하고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선생님이 스페인 모 대학에 현대문학 특강을 구실로 3개월 여 머물다 오신다기에
여행에 편한 옷을 지어드리기로 했다.
하필 미싱이 고장이 나서 손바느질을 하다보니 약속시간까지 마무리를 못했다.
현주씨가 돋보기 쓰고 바느질하는 내 모습과 지켜보는 선생님을 카메라에 담으며 즐거워했다.
2년전 선생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고 올 봄 순례기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펴냈다.
(오늘 새벽 순례기를 손에 들었는데 새벽마다 야금야금 읽으며 내 인생의 화살표를 대입해 볼 생각이다.
그런데 흡입력이 좋아 3분의1을 읽어버렸다)
무지한 나는 산티아고가 해발 몇 천미터 고지에 있는 성지고 화살표를 따라 걸어올라가는 곳인줄만 알고
얼뚱한 질문을 했는데, 서울 -부산을 왕복할만한 거리를 40여일동안 걸었다셨다.
그동안 45개국 160개의 도시를 여행한 경험이 있으시다는 선생님이 유언장을 쓰고 떠난 길.
이때 신중선 작가가 <환영 혹은 몬스터>라는 따끈따끈한 소설집을 들고 문이당 사장님하고 나타났다.
그들이 맥주집으로 간 사이 나는 바느질을 마쳤고 ,선생님은 화장실을 피팅룸 삼아 갈아입고 오셨다.
눈대중으로 만든 옷이 보아줄만하게 뚝 떨어졌다.
복숭아 빛깔 레이온이 민낯인 선생님 얼굴을 화사하게 받쳐주었다.
옆에 앉은이는 현주씨 대학 동창으로 한복디자이너인데 인사동 매장에서 불려왔다.
'옷을 안 입은 것 같이 가볍고 편하다'고 기뻐하시니 되었다.
이틀 동안 손바느질한 노고는 충분하다.
신중선 작가 출판기념으로 맥주집에서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귀가길에 오른 나는,
'글을 쓰는 것은 궁둥이 싸움'이라던 선생님 말씀을 떠올리며
'한창 쓸 나이'를 세상 사람들의 인정, 명예를 얻는 일로 낭비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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