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가장 큰 벚꽃 축제(National Cherry Blossom Festival)의 역사는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7년 미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부부는 일본 방문 중에 벚꽃의 매력에 빠졌다
태프트가 2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도쿄 시장은 3000그루의 벚나무를 기증했고.
영부인 헬렌 태프트 여사는 워싱턴D.C.의 포토맥 강변에 심었다.
태프트 대통령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등장하는 장본인.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 간의 밀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하기로 한다.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받고 미국과 우호관계를 다지면서 벚꽃이 ‘외교사절’로 워싱턴D.C.에 보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일본이 벚꽃 외교로 보낸 벚나무는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왕벚꽃 나무.
1908년 제주도를 방문한 프랑스인 신부 '타케'가 한라산 중턱에서 왕벚나무 자생지 발견.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벚꽃의 원산지가 제주도라고 밝혔다
일본 뱃사람들이 제주도에서 벚나무를 가져다 신에게 헌상했다는 문헌도 있다.
원산지 판단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생지 여부, 제주도에 자생 벚나무가 확인된 것만 200그루가 넘는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의 일본과 한국 벚나무의 DNA 분석 결과와,
미국 농림부가 일본과 한국의 벚나무 시료 82개를 채취해 염기서열 등을 분석한 결과도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벚나무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확인했다.
후배 이현숙이 반곡 간이역이 원주 벚꽃 명소라고 알려줬다.
투표 끝내고 폐역이 된 반곡역으로 갔다.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박사는 "워싱턴의 벚나무는 일본산이 아니라 제주도산 왕벚나무다라고 밝혔다.
1910년에 일본이 미국에 처음 기증했던 2000그루가 병충해로 전량 소각된 이후,
미국풍토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종자를 제주도 등지에서 채집했다고 발표했다.
꽃의 형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분류학적 형질들로 보아 제주의 왕벚나무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매년 벚꽃 축제를 통한 DC의 관광 수입은 1억 6000만 달러에 달한다.
워싱턴 벚나무가 일본산으로 둔갑한 것에 분개한 이승만 박사가
1943년 4월 아메리칸 대학에 제주 왕벚나무 네 그루를 심으며 한국벚나무 명명 기념식을 거행할 때
‘워싱턴에 심어진 벚나무들은 한국이 원산지이며 이들 나무 또한 한국 벚나무임을 선포한다'는 결의안을 발의 했다.
반곡역은 일제강점기 임산 자원 수탈을 위해 1941년 7월 1일 중앙선 보통역으로 영업시작 1974년 3월 소화물취급 중단되고 2007년 6월 여객취급까지 중지 2021년 1월 5일 중앙선 개량 구간이 개통되면서 폐역이 되었다. |
한겨레 자생식물 밀반출 100년의 역사
1800년대 열강들이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할 때 조선을 다녀간 선교사들이,
한반도 희귀 자생식물의 묘목과 종자를 가져갔다.
1914년 영국인 어네스트 윌슨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식물 채집과 반출에 앞장 섰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반출되며 유럽 각국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프랑스 신부인 타케는 제주도와 남해안의 난대수목과 백두산 북방식물을 반출해 유럽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우리 자생식물은 일제 강점기 때 집중 반출의 대상이 됐다.
총독부의 식물채집원이자 식물학자인 나카이는 조선에서 10년을 머물며 탐사대를 이끌고 다녔다.
이들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우리 산야에 자생하는 대부분의 식물을 반출했다.
우리나라 기후는 해양성과 대륙성 기후가 공존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다.
독특한 기후조건으로 자생 식물들은 내한성과 함께 내병·내충성이 강하다.
이 때문에 외국 식물학자들과 종자회사들이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우리나라 나무나 꽃의 원종과 신품종만 311가지에 달하고 있는 실정.
자생식물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반출을 막을 제도적 장치도 갖추지 못한 결과다.
우리 자생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책까지 엮어낸 일본과 대조된다.
한반도 특산 식물 527종 중 327종 학명에 Nakai
조선의 식물을 연구 분류하던 나카이 다케노신(1882~1952년) 의 성이 새겨졌다.
일제를 통해 서구의 식물분류학을 배우던 시절,
1세대 한국 식물학자 장형두(張亨斗·1906~1949년) 선생은
“조선 식물에 조선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외친 고집불통.
창씨개명을 거부해 직업도 갖지 못했다.
장형두는 한국 식물학 선구자의 기개로 로 ‘나카이 식물’을 외면했다.
한자어 ‘식물’을 묻혀 산다는 뜻의 ‘묻사리’로 표기했다.
아가풀, 애기똥풀, 괴불주머니, 놋젖가락나물, 긴잎별꽃, 큰별꽃, 놋젖가락나물, 들바람꽃, 그늘바람꽃, 매발톱꽃, 꿩의바람꽃, 바람꽃, 꿩의다리, 눈빛승마, 좀사위질빵, 넓은잎애기고추나물, 가는마디꽃, 애기마름, 달맞이꽃 등이
장형두와 당시 식물학자들이 명명한 우리말 식물 이름.
조선인 식물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라틴어로 종(種) 기재를 할 수 있던 학자였고,
“일본어로 조선 식물을 표기한다는데 나는 못 하겠소. (채집자 이름에) 내 이름을 빼주시오”라던 꼰대였다.
서울대 산림과학부 장진성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45년 이전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표본 중 장형두의 ‘마디 굵은 손’을 거친 표본 수는 모두 2170점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 채집된 표본 900여 점이 보관
연희전문에 기증한 7000여 점의 표본 중 일부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통설.
해방 후 본격화된 식물학 연구를 주도하던 장형두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경찰의 취조 도중 기절하게 되고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제헌국회는 임시회의를 긴급 소집 이른바 ‘장형두 변사사건 진상보고의 건’을 토의했다.
"경찰이 아버지를 억지로 엮어서 이북하고 내통을 한 것처럼 만든 거예요.
당시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사건이 있었잖아요. 걸면 다 걸리던 때였어요.
나중 혐의는 온데간데없고, 사망 원인이 고문치사냐 병사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어요."
우리 현대사는 정치와 상관없는 식물학자의 어이없는 죽음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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