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 4천평의 복도에 키브츠를 만들고자 원주 최초 트렉터를 들여왔고,
후원 받은 젖소 2마리를 40마리로 키워 HPI 후원금 내고 내셔날 지오그래픽에 보도
민응규(88세) 1937년생.
홍천에서 피난 후 52년 간현에 정착. 대전 농민학교 은사 중매로 이해정씨와 결혼 .
2남 2녀를 키웠다.
섬강 파크골프 클럽에서 민응규 위원장님을 만나 인근에 있는 댁에서 인터뷰를 했다.
고향이 홍천 서면 모곡인데 모곡리 한서 국민학교 졸업했어요. 당시 아버지는 백 오십호 되는 동네 구장을 봤어요. 6. 25가 터져서 아버님은 국민병 간 사람들 남은 식구들도 데리고 피난 갔어요. 4- 50명을 인솔해서 충북 내수까지 갔다가 국군 수복할 때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피난 안 가고 인민군하고 소잡아 먹던 놈들이 아버지 말 한마디에 총살 당하게 생겼거든. 와이로 쓴다고 밀주에다 메틸 알코올 타서 대접 했단 말이야. 무식하니까 그랬겠지. 본인도 먹고 우리 아버지도 잡수신 거야. 밤새도록 앓다가 아침에 바람벽을 긁으며 진통을 하셨어요. 그게 창자가 녹는 거라구. 아버지는 피난 잘하고 돌아오셔서 술 대접받고 돌아가신 거야.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상주가 없잖아. 집에 어머니하고 나 밖에 없는데. 작은 형님은 학도병 나가고 큰 형님은 같은 학교 선생들끼리 피난갔거든. 형님들이 돌아오면 장사 지내려고 땅을 얕게 파고 나무로 덮어 초병을 만들었어요.
학도병 나간 작은 형님은 식량보급이 끊겨 뿔뿔이 흩어졌대요. 충청도 보은까지 내려가서 남의집 꼴머슴을 산거야. 국군이 치고 올라갔다는 소리 듣고 집으로 갈 생각을 한거지. 모곡리 삼십리 밖까지 와서 밤을 지내고 길을 떠날 생각이었대요. 마침 고향 동네 노파를 만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거지. 그 길로 자벌레처럼 팔짝팔짝 내달려서 해 떨어지기전에 마을 동구에 도착 한거야. 거기서부터 설음이 복받쳐서 디굴디굴 구르며 집에 왔잖아.
중공군이 재침해서 아버님을 모곡 교회 근처에 묻어드리고 1.4후퇴 때 피난 나왔어요. 이고지고 양동으로 해서 문막으로 걸어왔어요. 큰 형님이 선생이니까 봉급타려면 임시 도청 있는 원주로 올 것이다 해서 원주로 온 거지. 도청에 가서 형님이 월급타러 오면 집주소를 알려주라 부탁 했어요. 큰형님도 무사히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어요.
문막 의성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가야하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았어. 담임 선생님이 평양에서 피난 나온 미션 스쿨 광성 고등학교가 서울에 있는데 학비가 싸다고 하셨어요.
어머니 친척이 서울 전농동에 사셔서 그 집에서 친구하고 자취를 했어. 화덕에 연탄 숯을 넣고 양은 솥에 쌀 앉히고 풍구 돌려서 밥 해먹고 다녔어요. 학교 갈 때 전농동에서 종로 5가 까지 걸어다니고 전차 표 15원 아낀 돈으로 꿀떡을 사먹었다고. 밥 먹을 것도 없는 형편인데 월사금을 어떻게 내. 학자금을 떼어 먹고내려와 흥업에 있는 육민관 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지. 거기서도 학자금 떼어 먹고선 여주 공립 점동 공업학교로 들어갔어. 학자금을 못 내니까 담임 선생님이 부잣집 아들을 서울 고등학교 보내려는데 니가 가정교사로 가르쳐 볼래냐 물어. 그 집에 들어갔는데 한참 가르쳐 놓고 쉬었다 물어보면 다 까먹었어. 얼마나 돌머린지 제기, 답답해서 수없이 울었네.
3학년 1학기 하고선 담임 선생님한테 나 이제 군대가야하는데 졸업장 주겠냐 물었어. 사변나는 바람에 후배들하고 공부한 사정을 아시니 갔다 와라 내가 챙겨주마 한 거여.
나는 대학을 안가면 사람 구실 못 한다고 생각 해서 어떡하든 대학에 가려고 했어요. 군대에선 숙식이 해결 되니까 해군 인천 경비부나 서울,부산 경비부에 배치 받으면 야간대학에 갈 수있겠다 생각한 거지. 바로 해군 시험을 봐서 지원했어요. 군대를 이용해서 대학에 다니려 했는데 외래 기합 받고 야구방망이로 두둘겨 맞고 직사하게 고생만 했어.
훈련소서 70명 앞에 담요 한 장 펴놓고 다 들어가라 그런 기합도 줘유. 교관들이 담요 네 귀퉁이에 야구방망이 들고 서서 이놈 새끼들 기합이 빠졌다하고 두둘겨 패면 안 맞으려고 일개 중대가 다 거기 엎드려 포개져. 밑에 깔린 놈들이 아이고 다리야 갈비야 허리야 죽겠다고 소리치면 다시 호루라기 불고 일렬로 섯 그런 걸 했다고.
수요일마다 훈련병은 목욕을 시켜. 호루라기 확 불면 들어갔다가 호루라기 확 불면 씻지도 못하고 나온다고. 그럴 때 보면 궁뎅이가 멍이 들어 시퍼래. 훈련소 들어갈 때 68키로였는데 57키로로 줄을 정도여. 훈련병 때 사진 보면 박쥐가 굴인줄 알고 들어갈 정도로 눈이 쑥 들어가서 해골 같어.
수료식하면 LST 큰 배에 태워 부산에 떨궈 놓고 자대 배치를 한다고. 한문으로 주소 본적 최종학력을 쓰라해요. 복무기록을 보고 너 감자바우로구나 이쪽으로 서 하더니, 행정 참모실 서무 조수로 배정 받았어. 아침에 기상하다가 하품하면 너 쌔끼 일루와 고향 생각했다고 두둘겨 패는데 그렇게 군기가 쎈 걸 여기서는 몰러.
제대하고 오니까 담임이 졸업장을 보내 놓으셨더라고. 고등학교를 엉터리로 다녔으니 대학 갈 실력이 있어야지. 열등의식 속에 살다가 대전 농만학교를 간거라고. 오전에는 학과 공부하고 오후에는 실습을 해. 졸업하면 젖소 실습할 때도 없으니까 친구 세 놈이 만날 젖 짜고 사료 주고 똥 치우는 걸 도맡아 했어. 그 때는 젖소 구경 하려면 30리 가야 있을 둥 말둥 할 때라. 어른들이 양소가 고양이처럼 얼룩 덜룩 하고 젖이 바깨스만치 크다고 구경가자 할 때여.
65년 대전 농민학교 졸업생 후원회로부터 임신 6개월 된 젖소 2마리를 후원받았어요. 미국서 원조 해주는 소를 누굴 줘야 잘 먹이겠냐 했는데 우리가 뽑힌 거야. 두 마리를 받았는데 한 마리가 진드기에 물려 적혈구 파괴돼서 죽은 거야. 지금 시세로 천 만원 정도 되는 소가 죽었어요. 미국 선교사가 일본서 수입한 항생제 주사 놓아서 나머지는 살렸다고. 그 젖소가 밑천이 된 거지.
농협 직원이 되면 농사자금 대출이 수월할 것 같아 5년만 다닐 생각으로 입사 했는데 반백이 되도록 근무했어요. 문막 농협 초창기 맴버였어요. 대전농민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지역 농민들에게 가르치면 농업 발전이 되겠다는 큰 포부로 지도부장을 했어요. 현실은 지도 하는 일보다 벼가마 나르고 농약 나르는 마구제비 일을 했어요. 쌀 한가마 500원일 때 봉급이 15000원이었다고.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일했어요.
내가 28살 집사람이 27살에 결혼했는데 빚 갚느라 결혼하고 3년 후에 아들을 낳았어요. 대전 농민학교 최은교선생 부인이 우리 집 사람 1년 선배라고. 집사람 살아온 걸 아니까 소개를 한거여. 최선생도 우리 집이 형이 선생이고 목사인 줄만 알지 가마니떼기 들추고 들어가는 집인 줄 모르고 사람만 좋다고 중신을 한 거야.
집사람이 맏이고 장모님이 처남 낳고 두 달 만에 산후탈로 오진해서 약을 쓰다 돌아가셨어. 집사람이 고등학교 다니면서 처남을 학교에 데려가 사무실이나 숙직실에 놔두고. 공부 끝나면 집에 데려오고 하면서 호스돈 여고 대대장을 했어.
신혼살림하는데 땅이 없으니까 선교사한테 농사짓게 돈 좀 빌려달라해서 250만원인가 주고 2100평을 산거라고. 선교사가 삼 년 후 안식년에 본국 들어가 여기서 활동한 걸 보고하는데 쓸 돈을 빌린 거지. 돌아가기 전에 갚으라 해서 이년 안에 사흘 먹을 양식도 안 남기고 돼지 팔고 고추 팔고 수박 팔고 해서 가져 가니까 그렇게 기뻐 하더라고. 나중에 그 선교사가 초청 해서 29일 동안 데리고 다니며 성공한 사람이라고 자랑 해서 미국 구경 했다고. 그때가 오십 먹어서 였을 겨.
목장 초창기에 아내가 새벽 4시에 젖을 짜서 코카콜라 병에 담고 콜크마개로 막아 중탕처리해 놓으면, 밀개떡 한 조각 먹고 배달을 나가요. 간현은 우유 먹을 만한 경제력 있는 집이 없어. 문막에도 폐병환자나 젖이 부족 하거나, 영양실조 든 애들만 우유를 먹었어요. 장마가 지면 지정초등학교 있는데 철다리로 건너가야해. 철다리에 자전거를 올려놓고 침목을 밟으며 가다 딴 생각하면 대번 떨어져. 소나기 만나면 아무도 없는데 가서 옷 벗어 짜고 집에 오면 열시여.
간현에 우유 처리장이 없어서 천안에 1년 내려가 있다 오고 . 그러다 우리 소를 가지고 가서 천안 남양 분유 공장있는데 친구네 하고 합쳤어요. 우유가 남으면 의도적으로 체세포가 많다 산폐했다 하면서 사흘에 한 번씩 반품을 시킨다고 .
목장이 번창하기 시작해서 30년이 되자 착유 가능한 소가 40마리 되었어요.
목장 사업이 최대로 번창한 95년에 HPI본부에 후원금을 보냈어요. HPI본부에서 111개 나라를 지원해주는데 그 중에서 성공한 농민이 후원금 보낸 나라는 한국뿐이었대요. 내셔널 지오그라픽회사에서 사진 기자를 보내 취재할 정도로 성공한 시절이었어요.
그러면서 여기 복도 땅 판다는 바람에 우유 소 몇 마리 팔아서 칠천 여 평을 더 산거지. 사람들이 섬에는 뻐꾸기집만 있는데 참깨도 안 되는 땅을 뭐하러 사냐고 했어요. 처음 2100평 살 때 평당 16원 씩 샀어요. 화페교환 전이라 건너 땅이 150원 할 때 여기는 100원도 안했어요. 나는 가축을 먹여서 물 건너 땅보다 기름지게 할 자신이 있었어. 퇴비를 묻었다가 빼먹으면 될 거 아니냐 생각한 거여. 비료 살 돈이 없어 순 퇴비로만 농사 짓는데 퇴비가 썩지 않으면 당년에 수확이 오르지않아요. 그렇게 어려운 농사를 지었어요.
간현의 복도는 15만 4천평이야. 이곳에 이스라엘 집단 농장 키브츠같은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70년대 초 트렉터를 들여 왔는데 원주에서 처음으로 기계농업을 시작한 셈이여.
72년 장마가 내가 겪은 장마 중에 제일 큰 장만데 밤새도록 비가 왔단 말이에요. 나는 농협에 근무하고 아내가 애들하고 집에 있었는데, 병자년 장마에 필요없는 모래를 쌓아놔서 제방처럼 된 데가 있어요. 아내는 거기 애들 데리고 올라가 피신해 있었대요. 헬리콥터가 와서 우리 애들이랑 싣고 지정 중학교 마당에 내려 놓고. 소는 지절로 제방으로 올라가고 집은 떠내려가고 대단한 물난리였어요.
나는 애들은 고생 안시키겠다고 이를 갈아부치고 살았어요. 열심히 살다보니 우유 소 키 워 자리 잡혔는데 일 하느라 시간이 없어 돈도 못 쓰고. 쿼터제 하는 바람에 더 많이 키울 수도 없었어요.
맏이가 아들인데 고생 모르고 살았어요. 애로 사항 있으면 즤 에비가 해결해주니까. 내 몹쓸 습성 집사람의 나쁜 습성만 받아서 얼마나 속썩였는지 몰라. 큰놈이 소를 먹인다고 기계화 해달래서 1억 몇 천을 들여 착유실부터 우사까지 미국식으로 갖춰놨는데 그것도 못하겠다는 거여. 여기 있다가 장가도 못가겠다고 박차고 나가버렸어. 시설해놓은 게 아까와서 집사람하고 죽어라 일하다 보니 내 다리가 U 자가 된 게 그 탓이야. 그 바람에 아내가 속썩어서 일찍 죽고, 그 놈이 즤 엄마 죽고 나서 후회 되니까 자살해 버렸어.
지난 세월 돌이켜 보셨을 때 공과는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잘 버티고 애쓴 거는 잘 한 거 같은데, 집 사람의 애로사항을 몰라 준 거. 지금은 생보대상자도 나라에서 도움을 주니까, 사흘 먹을 양식이 없는데 어디가서 꿔 올 때도 없이 살진 않잖아. 직장에서 시달리다 집에 오면 집사람이 이렇고 저렇다고 하면 너만 그런 거 아니고 다 그렇게 산다 하고. 그 정도는 견뎌내야한다고 보듬고 챙겨 주지 못한 게 후회되고 마음 아프지. 집 사람 보낸지 벌써 6년이 되었어. 집사람도 그렇고 아이들한테도 자상한 아버지 노릇을 못 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은 언제예요?
거의 행복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 배고픈 설음에 본인은 희생하더라도 아이들한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달렸거든. 그때 트렉터 가지고 농사 짓는 게 최고의 꿈인 줄 알았잖아. 보람을 느끼고 이런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지 못하고 취미생활도 못 했어. 죽기전에 내 맘대로 화장실 다니다 죽어야겠다고 뒤늦게 파크 골프 치는 거지. 2021년 노인회장 할 때 120명 서명 받아가지고 파크 골프 클럽을 만들었어. 지금은 18홀에 130명 회원이야. 이젠 더 바랄 것도 없어요.
올해 미수를 맞은 위원장님은 손가락 구부러지고 다리가 굽도록 한 세상 치열 하게 사셨다. 파크골프크럽 회원 100여명의 신상을 꿰고 계실 정도로 아직도 총기가 있으시다.
지정면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 추진 위원장으로 ' 현재만 생각하지 말고 미래를 염두에 두고 일하라 '조언 하신다.
부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소리 들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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