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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김향이의 블로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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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9회 막장 드라마 같은 삶을 산 문옥자 어르신

멀리 가는 향기 2024. 12. 28. 11:01

결혼 4개월 만에 친정다녀 오니까 월세방을 빼 오갈데 없어 시가에서 출산.

년년생 둘째 낳고  두 달도 안돼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집 나간 남편. 

 

문옥자(83세) 1942년생

경남 기장군 철마면에서 나고 자라 27살에 한 동네 동갑 총각과 연애결혼. 

29살에 년년생 둘째 아들  임신 중에 종적을 감춘 남편 없이 아들  둘을 키웠다.

남편이  배다른 자녀 둘을 데리고 들어와  서울에서 함께 살다  원주로 내려 왔다.

 

주차장이 있는  뒷문 정원으로 들어선 집의 외양이 단정하다.  \

정문으로 이어진 정원의 나무 뿐만 아니라 돌에 쓰인 싯귀에도 정성이 배어 있었다.

제작년 12월에 돌아가신 이 댁 바깥 양반 솜씨라 했다.

 

 비깥양반은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도 큰데다 언변이 좋았다 한다.

황토방에서 기거하셨다는데,  황토방 바깥벽에 당신 사진과 애송시를 걸어두었다. 

좋아하는 애송시를 봐도 애주가 티가 나는데 술 한잔 걸치면 가진 것 죄다 퍼주는 기분파 .

이웃들은 군무관으로  전직 정보부 요원으로 알고 있지만 원예사로 일했다 한다. 

 집 화장실에서 쓰러져 17일간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서 배 다른 딸과 아들이 알려졌다.

옥자 어르신은 가까운 지인에게도 남편 채신을 살려주느라 외도 사실을 숨겼다 한다.

판대 보건소장님 소개로 만난 문옥자 어르신은 성경 필사 노트 8권, 성경구절 만번 필사한 노트, 24년 째 일기를 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27살에  6년 사귄 한 동네  동갑하고 결혼 했어요. 우리 아저씨가 키 크고 잘 생겨서 동네서 사위 볼라고 애썼어. 우리가 결혼 한다니까 친구가 엄청 울더라고. 나이 먹도록 시집 못간다고 동네사람들이 쑥덕 거렸는데, 사촌들이 '꿍심은 있었네.하고 놀라더라고.

  결혼하고 일주일 만에 남동생하고 시어머니하고 이불 보따리 들고  서울로 올라 왔지. 장충 체육관 근처에 방 한 칸  얻어 놨더라고. 우리 아저씨가 기술고등학교 원예과 나와서 엠버서더호텔에 근무했거든.

  안방 아줌마가  전라도 여자였는데  참 잘해주더라고. 멸치 젓갈에 쌈이 먹고싶다고 했더니 병원에 한 번 가보자 해.

의사가 임신인데 애기도 건강하대. 아줌마가 입덪하면  오만게 먹고싶다고  음식 갖다주고 잘해줬어.

  4개월인가 지나 친정에 갔다 오니까 방이 없는거야. 방을 빼가지고 그 돈으로 뭘했는지. 짐도 옮겨 버리고 오도갈 데가 없는거야. 돈이 없어서 뭘 어쨌다나 하면서  집에 내려가서 애기 낳으래. 시집에는 그런 말 저런 말 안하고 춥다고 애기 놓고 오라더라 했지.

 1월에 애기 낳았는데 백일 되가지고 내려왔더라고. 올라가서 방을 얻는다더니 방배동 쓰레기장있었잖아. 거기 비닐 하우스에 딸린 부엌도 없는 방 하나  얻어놨어.  고향 선배가 거기 살던데 돈이나 주었겠어?  방이라고 셋이 눕기도 비좁은데  또 년년생으로 임신이 된거야. 

 첫 애는 의사가 애 받으러 왔는데 창피하다고 두 번이나 돌려 보내고 시집에서 낳느라 애를 먹었어요. 

 둘째 낳을 때가 되서 병원 갔다 온 날 저녁에 배가 아파 또 집에서 낳은 거야. 그때  애 아빠 직장 동료라는 여자가 집에 와 있었어요.  그 여자도 사연이 많아. 그 여자가 가위들고 애를 받더라고. 

 둘째 낳고  두 달도 안돼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어. 둘째도 아들 낳다고 좋아서 난리를 죽였다는데, 갓난쟁이 데리고  갈 수 없어 애 아빠 혼자 갔지. 오더니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안 들어오는 거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어린것하고 먹고살 길도 막막했어.

  - 8권의 성경책 필사를 보면 , 국민학교도 다니지 않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약수동 강가 판자집으로 이사를 갔어요. 먹고 살아야겠는데 젖먹이 데리고 할게 없어. 장사 밑천도 없고. 손뜨게질 부업을 해서  겨우 수제비를 해먹었어요.

 누가 한복 저고리 동정 장사를 하러 가재.  아들이 서울대학 다니는 옆 집 아줌마는 밀가루죽도 못 먹으면서 집에서 놀아. 그 집에 큰 애를 맡기고  애기 업고 따라갔지. 금방 팔아서 돈이 많이 남았어. 욕심에 한 탕 더 뛰어서 돈을 벌었는데 그기 우째 잃어버렸는지 생각이 안나. 쓰리를 당했는지.   

 옆집에  큰 애를 맡겨 놓고 장사 나갔는데 옆집 아저씨가 배에서 화투치고 노는데 빨간기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래. 우리 아들이 빨간 티 입었거든.  그 당시 한강 옆에 모래 퍼냈거든.  세 살 먹었는데 뭘 알아. 모래 파논데서 놀다가 푹 빠져 버렸지. 아저씨가 건져다 옷을 갈아입혀 가지고 아랫목에 눕혀 놨더라고. 그래가 아들하고 실컷 울었어.

 지금까지 살면서 봉사도 하고 남도 돕고 그랬는데. 그 아저씨를 못찾겠는거야. 그때 보답하려는데 없어가지고 못하고. 

 동작동 흙벽돌집으로 이사를 했어. 아줌마들이  진달래꽃 따다가 약술 담는다고 가자고 하더라고. 엄청 많이 땄더니 팔라고 해서  쌀을 한 말 샀어. 쌀을 사다놓으니까 엄청 부자가 된 것 같이 좋았어.

 그 이틑 날 누가 왔냐면  애들 아버지 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 시동생이 애인 데리고 왔는데  우째 찾아왔는고 모르겠어.

 저그 동생 욕을 욕을 하면서  우리 집에서  잤어. 애들 아빠 찾아 온다고  자고 나가드만 갔으면 오지 말아야 할 거 아녀. 가지도 않하고 삼일을 있었어. 그래가 쌀 한 말 바닥이 났지 뭐야.

 동네 사람이 성남으로 이사 갔는데 집세도 싸고 글타고 자꾸 이사를 오래. 옆집 하고 이사 가는데  세발 오토바이에 두 집 살림 싣고  사람도 타고 이사를 간거야.  독채에 방하나 가게도 볼 수 있고, 거기서도 뜨게 하고 속눈썹도 붙이고  살았어. 

 


- 2000년 1월1일  새천년부터 일기. 쓰기 작정하고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24년 동안의 일기장도 모아 놓았다.

 

 성남 살면서 이사를 일곱 번 다녔어요. 그렇게 고생한다는 소문 듣고 방배동에서 온실하는 애들 아빠 고향 선배가  건국대학교 온실에서 근무한다고 직장을 알려줬어요. 

 작은 애 업고 온실에 찾아가 사람을 보니까 열 불이 안나겠어? 보자마자 귀싸대기를 올려붙였지. 두 말도 안했어.

네 새끼 네가 책임지라 애를 내삐러 두고 나와버렸어. 요게 조작조작 걸어 나가니까 엄마 따라 가겠지하고 내비뒀나 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차 타고 와 버린 거야. 밤에 애가 눈에 밟혀 잠이 와야지.

 날 밝자마자 찾으러 갔어. 지는 모른데  엄마 따라간 줄 알았대. 애 이름부르며 미친년같이 뛰어다니다 가게에서 물어 보니까 파출소에서 데려갔대. 거서 하룻 밤 자고 아동보호센타로 보냈대. 찾으러 갔는데 맨발로 뛰어다니다가 호진아 하니까 멀뚱멀뚱 쳐다 보다가 엄마하고 달려 오더라고. 

 내가 이혼 하겠다니까 부산에서 남동생하고 형부가 올라왔어요. 형부가 가죽 잠바 입고  애들 아빠를 찾아가니까  형사인줄 알았던가 봐 . 무릎 꿇고 빌면서 올며 불며  잘못했다하고 생활비도 주고 그 쪽 여자도 해결하고 오겠다고 했어요.

 오긴 뭘 와.  오빠하고 동생이 애 둘을 그 집에 데려다 준거예요. 남편 없이 살아도 자식 없이 몬 살겠더라고. 간이 뒤집어 질라 해서 애를 찾으러 갔더니 그 년이  둘 다 아들이냐고 물어. 애들 아빠가 총각 때 우짜다가 애가 생겨가지고 딸이 하나 있다고 했대.  거는 그때  가시나 하나 낳았어. 그러고 있는데 구경꾼들이 오고 그럴 거 아니야. 그 년이 내를 쥐어뜯으려고 달려 드는거야. 그래가 나도 연탄 뚜껑 벌건 거를 들고 그 년 죽일라고 했지. 그 년  언니라하는 사람이  니가 누구를 때릴라고 그러냐고  말리는 거야. 사람이 됐더라고 사리분별을 알잖아.

 애들을 데리고 오면서 이 순간부터  내 인생은 끝이다.  남편도 필요없고 자식 밖에 없다하고 마음먹었어요.

 

 친정엄마는 시골에 오면 등 따시고 배 부르게 사는데 왜 거서 고생하냐고 성화야. 나는 서울에서 굶어죽어도 시골에는 안 갈라그랬어요. 처녀 때부터  남이 친정에 와서 모 심고 품팔이하고 사는 거 보면 왜 그렇게 꼴 보기 싫은지.  모른데 가서 살지 왜 친정에 와서 그런 꼴을 보이나 싶었어요.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자식 키워 봐야 소용 없다 새 출발하라 별 소리 다 하잖아. 우리 시어머니가  재혼으로 오면서 데리고 온 시숙 시누가 있었어요. 일자 무식이야. 그런데다 우리 애기들 보내 놓으면 뭐가 되겠어요? 자식들 버려놓으면 우에 살겠어요?  

시누님이 눈 멀뚱멀뚱한 자식 두고 가면 눈에 밟혀 니가 어찌 살겠니 쥐 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함 살아 봐라 그랬어요.

 아모레 판매원이 와서 화장품 외판원을 해보라는 거야. 보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시누님하고 언니한테 보증을 서달라 편지를 썼어요.

 아모레 들어갔는데 첫 달에 마이나스 통장이야. 월부 장사를 하니까 다음 달부터 월급을 탄거지. 그래가 외상 미수 안 받을라고 애를 썼어요. 그래서 3년 만에 집을 샀어요.

  대리점 사장이 판매원 모집해서 들어 오면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렇게 저렇게  알뜰히 해가지고 집을 샀다고. 집을 110만원 주고 사는데  십만원이 모잘랐어요. 시누한테 이야기하니까 5만원을 보내주더라고. 우리 언니는  돈이 없어도 얻어라도 줄 거 아니에요?  한 푼도 안 빌려줬어요.

 그 무렵에 친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우리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업을 했는데  집에 다니러 오면서 돈 가방을 짊어지고 왔어요. 해방이 되니까 못 들어갔어. 우리가 수표 같은 거를  딱지를 접어가지고 버리다 시피했잖아. 그게 남아가 은행에 있었나 봐.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돈 찾아가라 연락이 온거야. 형제들한테 도장을 받아야 하니까 남동생이 뭐 한다고 말도 않고 도장만 찍어달래.  나중에 알고 보니 나만 모르고 못 받은 거 아니야. 우리 언니도 못 받은 걸  늦게 알은 거야. 그래서 내가 그 돈 받아서 집 사는 줄 알고 돈을 안 빌려준 거야.

 한 사무실에 근무하는 언니한테  3개월 있으면 계 타가지고 갚을게요 하고  빌려서 다 갚고 그랬어요. 시누 돈도 갚았는데 돈 받아서 미안하다 그러더라고요. 시누가 내한테 참 잘했어요. 한마디를 말해도 내 편들지 저그 동생편 안들었어요.

 애들 아빠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에고 쌔빠질놈 그래도 복은 있어가지고  마누라 앞에 갔다고. 마누라 죽고나서 지가 고생하는거 어떻게 볼거냐고 그래.

 

    베드로 전서 2장 24절을 만 번 필사하고, '감사합니다'를 천 번  필사한 노트도 있다.

 

 아모레 하면서  애들 성공시키려는 목표로 살다보니까 대학 좋은데 보낼라고 성남에서 서울로 빼냈어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있나  도와주는사람이 있나 애를 애를 쓰다가 동사무소가서 울고불고 사정을 했어. 등본을 우편으로 보내는데 내한테 준거야. 그래서 서울에 가지고 갔는데 이사 온 거를 확인해야 전입신고를 해준다면서 안해 주더리고. 거짓말로 세 산다고  주인하고 입을 맞춰서 서초동에 신일 중학교로 전학을 시켰어.

 작은 애는 반장하다 갔는데 그 반에 반장이 8명이 왔더래.  작은 아들이 공부를 잘했어요. 어디나 나가면 상이란 상은 다 타오는 거야.  일년 열두 달 안 타오는 달이 없었어.그 상장을 벽에다  발라놓았어. 

 아모레 하기가 싫어 동네 구역장이 동대문 남평화 시장에서 장사 하는데 나도 좀 해달라고 그랬어.

 

 동대문에서 장사 할라고 교대 옆에 방 두 개 짜리  지하에서 사는데, 저녁에요 애 새끼 둘데리고  가방하나 딱 들고 들어왔어요. 기가 안차겠어요? 우리 애들도 아무 말도 못했어요. 아버지라 해도 함께 안 살았으니 정이나 들었겠어요? 우리 아들  한 살  두 살 먹어서 나가 가지고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 15년만에  들어온 거예요. 데리고 온 가스나는 중학교 1학년 들어갔고 머스마는 4학년 인거야.

 내가 듣기로 그 여자가 술장사를 한다는데 괜찮게 됐나봐. 그러다 장사 안되고 애 아빠는 직장도 없고 하니까  돈 많은 남자하고 바람이 나 나간거야. 굶어 죽을 수 없으니까 애들 데리고 들어왔겠지. 들어와도 미안하다 내가 이래가 와야되겠다. 이런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들어와 . 그 이튼날부터 혹시 걔네들 미워할까봐 눈에 불을 켜고 설치는 거예요.

- 200년 10.10일 첫 일기와  인터뷰 전 날에 쓴 2024년 9월 28일 일기를 비교하면, 글씨체도 단정하고 분량도 많아진 것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세 식구가 늘어  시장 가까운데 약수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나는 결혼 해가지고 남편 월급봉투를 보질 못했어. 십원 한 번 안 받아 보고 살았어요. 그랬어도 남평화 시장 지하에서 옷장사 해가지고 애들 가르치고 살았어요. 

 

일기를 보면 바깥양반이 거의 날마다 술을 드셨는데 많이 참은 날이 4일 . 

술 때문에 다투기도 해서  '너무 속상해 안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왜 이래 힘이 드냐'고 쓰기도 했다.

 

 

 시장 봐서 양 손에 들고 오는데 신호등에 딱 걸린 거야. 짐이 무거우니까  질러가려다가 차 타이어가 내 발목에 올라 앉았어. 뼈가 똑 부러져 버린거지. 1년을 병원에 있었어요.

 대학들어 간 큰아들이 엄마 병간호 한다고 휴학계를 냈어.  간호 하고 아르바이트 해가지고 용돈 쓰고. 교회서  봉사했더니30만원을 주더라고 가져왔어요.  거기서 십일조를 떼고 너가 쓰라했더만 교회 다 줬대요. 돈 준 집사님이 너 용돈하라고 줬는데 그걸 다 내면 어떻하느냐고 막 뭐라더래요. 

 작은애는 고3이었어. 지가 밥해 먹으면서 살림을 다 살은 거야. 

 1년만에 퇴원했더니 그 애들이 가고 없더라고. 같이 살 때 저그 엄마 좋다는 소리를  안 하고 이모만 좋다 하고. 내보고 엄마 엄마 하더라고요. 마음씨가 착하다고 그러고. 저그 엄마가  돈 많은 남자하고 살다가  젊은 남자하고 사니까 가스나 보기에 하나에서 열까지 좋은 게 없는거야.

 도로오겠다고 그러는 걸 우리 애들이 그애들 들어오면 우리가 나가겠다 그거야. 그러니까 애들 아빠가 두 말도 안하더라고요.  

 애들 아빠가 친구랑 동업을 했는데 니는 마누라가 잘 버니까  월급을 조금만 가져가라 그래서  그만 두고 이천만원만 해달래요. 마련해 줬더니만 몇 달 안가 홀딱 해먹었어요. 애들아빠 하는 짓을 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손해지 덕 된 게 없어.

하나 벌면 반개는 저축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데  하나 벌면 두개 세개 먹을라그러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배짱은 크고 눈을 높아가지고 입는 거 좋은 거입어야 되고 먹는 것 비싼 거 먹어야 되고. 뭐가 먹고싶다  옷 사가 보내라 뭐해라 뭐해라. 애들한테 요구를 하는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알뜰히 살림하면  그렇게 해서는 몬산대요.  

 

 동대문에서 장사해가지고  평촌아파트 분양을 받았어요. 내가 옷도매 밤 장사를 하니까 밤마다 술만 먹고 낮에 내가 잘 때 내 지갑에서 돈 꺼내다가 술 사먹고. 술로 술로 먹다가 바짝 말랐어요.   여 있으면 못 살겠으니까 시골로 가자고 밤낮으로 졸랐어요. 지금 거 있었으면  평촌 아파트 십억 넘어요.  
양심에 가책이 되니까 술먹고 오면 무시한다 그러고 칼로 찔러죽이려고 해서 한 번은 이혼하자 했더니 어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고 하면서 죽이려고 하더라고요. 내가 이혼 해달라 그랬을 때 이혼 해줬으면 빌딩 한  채 있을거라 그랬어요. 내가 장사를 잘했어요.

여기 집 지을 때 명의를 내 앞으로 하라했는데 남자 위신있다고  애들 아버지 이름으로 해준거야. 

내한테 못되게 한거 생각하면 죽어도 분은 분대로 남지.그래도 애들아빠고  남편이니까.

 바람피고 살면서도 천 마디 만마디도 내가 미안했다 잘못했다 안하고 이혼은 죽어도 못해준다니까 그냥그냥 살은 거예요.

 

 가스나는 우리 집에  결혼 하겠다고 인사를 왔더라고요.  아버지처럼 경상도 사람이라 안할라고 했는데 임신이 된거야. 

사위 되는 사람이 현대 자동차 다녔는데  미국에서 사업을 해서  딸 하나 낳고  잘 산대요. 

 머스마도 직장 다니다  치과 간호원을 알아서 인사를 왔더라고요. 전라도에 단독주택 지어  아들셋 딸 하나 낳고 잘 살아요.

 그 여자는 장가 못간 총각하고 산다 그러더라고.  둘이 살면서 왜 빚을 져요? 사위가 빛 다 갚아주고 영세민으로 해놨나봐.   여기 이사 와서도 그 여자한테 전화가 와요. 옥자한테 얘기해가지고 돈 좀 얻어달라고. 옥자가 미쳤나 돈이 썪었나 지 돈 얻어주게.  우리도 여기 와서 자식들이 생활비 줘서 사는데. 그런 여자도 있대요.

 술 먹고 운전해서 차를 몇 번을  망가 트렸는데. 내가 암보험 들은거 만기 돼서 700을 탄 거 보고 평생에 한번이니까 좋은 차 바꿔 달래요. 그 차  얼마 안 타서  술먹고 사고를 내서  몰래 이 집 잡히고 몇 백만원 남은 거는  영창 산대요. 영창살이로 한 달에 십만원씩 갚는다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 거서 폭푹 썩어도 괜찮다했어요. 영창 산다고 보따리 싸서 가고 이틀인가 삼일인가 사는데  마음이 안 편했어요. 애들한테 얘기 했더니  막 뭐라하면서 그날로 갚아줬어요. 먹고싶다는 거 다 해주고 하고 싶다는 거 다 해줬잖아요.그랬으면 조심 하고 자식들한테 미안한 감을 느껴야 하잖아요. 그런게 없어요. 술 취하면 내가 당신 같은 사람 만나 지금까지 산다고는 하더라고요.  내가 안 받아줬으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애들 아빠 돌아가시기 15년 전에 법원에 가서 목사님 사모님 증인 세워  집 명의를 아들 앞으로 돌려놨어요. 

 애들 아빠가 병원 있을 때 가시나한테는 연락하지 말라더라고요 가스나는 아버지 아플 때도 장례식 때도 안 왔어요.  아들만 왔어요. 초상 다 치르고 가면서 형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도장 다 찍어 줄게 그러고 잘 지내자고 하고 갔어요.  

그런데 에미가 너도 자식인데 재산을 받아야지 하고 시켰나 봐. 애들이 아버지 재산 받아야겠다고 소송했다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도 안 나온오는 건데 초상집에 가면 자식이 몇이라는 거 써놓잖아요. 목사님과 사모님만 알지 다 몰랐어요.  머스마가 온다 그러는데  이름을 안 쓸 수가 있어요? 그래서 다 알게 된거야 .

 말도없이 집나가서 어데 간 줄 몰랐는데, 여자 얻어 딴 살림 살고있다는 소리 듣고 내 정신이 아니더라고. 내 혼자 방에서 디굴디굴 뒹굴며 울었어. 내 이래 얘기했다고 불쌍하게 보지마요. 

 나는 한가지  괘씸한 것이 애들  버리고  가서 돈 한 푼 준 적이 없잖아요. 내가 애업고 직장에 찾아갔더니 30분 전에  퇴직금 타 갖고 갔다더라고요. 당신 애들 버려놓고 가 살면서  퇴직금 어떻게 다 썼노 맘이 편하드나?  죽기전에 물어 보려고  했어요 .자존심 상할까봐 도저히 못 물어 보고 결국에는 갔어요.

 

 

요새 너무 행복해요.

우리 애들이 너무 잘 하니까 미안해서 오래 살면 어떻하나 그게 걱정이에요. 애들이 피곤하고 힘들잖아요.

허리가 아파 음식을 못 먹으니까 아들집으로 가자고 성화여서  하루 밤 자고 왔어요.

작은 아들이 주말 마다 오잖아요.  큰아들이 석달을 여기서 자고 출근했어요.

며느리도 참 잘해요. 며느리들이 신랑이 잘 못하면 내한테 다 일러.

 못 살면 형제간도 없어요. 남보다못해.

오형제 자식들 여기서  모이면  30명가까이 돼요.  친척 들한테 다 선물하고 조카 손주들 용돈 주는 거 큰 애 밖에 없어요.

외갓집 큰집에 가도  우리 큰 아들이 최고예요.

 

자존심 강하고 생활력 강하고 모성애 강한 어르신이 살아낸 가슴 아린 세월은 자식들의 효도로  다 잊혀졌다.

자격 지심에 술먹고 괴롭히던 사람도 떠났으니 노후가 편안하다.

복은 스스로 짓는 자에게 온다는 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