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사흘거리로 두둘겨 패야한다던 폭력 남편이 죽기 직전 "같이 죽지".
박정원 84세 (1941년생)
원주 만종에서 태어나 19살에 친청언니 소개로 23살 남편 만나 호저면 산현리에 살다
가마골에서 5녀 1남을 키웠다.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뒀던 속 아픈 얘기 다 털어버리세요.
친정 형편은 별로 어렵지 않았고 딸 부자집 막내예요. 언니 다섯에 오빠 둘 8남매고요.
6.25 나면서 오빠하고 조카들하고 칠봉 언니네로 피난 갔어요. 모심을 때가 돼서 못자리 보러 집에 왔는데,
정서방네가 이북 들어갔다 와서 자기네 하고 빨갱이 노릇 안 한다고 오빠하고 친구를 경찰서로 끌고갔어요.
오빠 친구 부인이 밥을 해 경찰서에 이고 가니까, 어떤 아저씨가 엊저녁에 들어온 두 사람 총살 시켰다고 하더래.
가 보니까 두 사람을 양쪽에서 묶어서 총살 시켰는데, 오빠 친구는 가슴을 맞아 얼굴이 시커멓고 오빠는 이마를 맞아 골이 다 쏟아졌어요.
사람을 사서 들것에 실어 오는 데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눈앞을 가렸어요.
오빠를 방에 눕혀 놓았는데. 그때 4학년 책을 받아놓고 피난 나갔을 땐데 어려서 그걸 봤어.
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해서 골이 허옇게 쏟아져 엉망이 된 데 쑤셔 박아 밀가루 땜을 해서 장사를 지낸 거야.
그러고 나서 엄마가 속병이 나서 옷도 못 입고 여름을 보낸 거여. 열이 나서.
겨울에 또 난리가 나서 전부 피란 가라는 거야. 조카 머스매 하나는 집에서 페렴으로 죽고, 업고 간 애는 길에서 죽어 충주 저쪽에 묻어놓고 돌아왔지.
동네 사람들이 올케더러 신랑도 없는데 뭐하러 시집살이 하냐고 그래서 딴 데로 갔잖아.
조카딸들 하고 나하고 나무를 해서 쌓아놓고, 나물 뜯어다 팔고, 엄마는 콩나물 장사 하고 그렇게 사는 거지.
농사는 남을 줘서 쌀이 없잖아. 조카하고 셋이서 칠봉 산현리 언니네로 쌀 얻으러 갔어요.
쌀을 반씩 나눠서 이고 신평저수지 꽝꽝 언데로 걸어와서 항아리에 부었더니 쌀 닷말이 고냥 들어가.
그날 밤 밥 한 번 못 해먹고 도둑놈이 홀랑 쏟아간거여. 아유, 그러니 어떻해.
그럭저럭 고생하다가 조카 딸들 시집 보내고 나도 결혼하고 엄마는 칠십에 돌아가셨어요.
결혼하고 친정에 삼일 도벽이라고 왔다 가니까, 작은 집에 양자 들어가래.
무장리 다리 건너 길가에 작은 시어머니가 사는데 그 집으로 간거야. 방 한 칸에서 작은 시어머니랑 살았다니까.
사촌 시누는 바로 울타리 옆에 사는데 그 시누가 연주창(림프샘의 결핵성 부종)이 걸렸어.
그때는 동네에 우물 하나라 소여물 끓이는 물 여다 줬지, 밥 해줬지, 그 시누 일 다해줬어. 앓는 사람이 뭘 해.
그 집 시어머니가 있는데 애만 업고 돌아다니지 뭘 도와줘. 그 집 식구들 때문에 고생 무척 했지.
우리 쥔은 그렇게 고생해도 고생한다는 말 한 마디 없어. 성질이 아주 개떡 같어유. 좀 저기하면 주먹질하고 때리고.
먹을 게 없으니 화전 만들어서 농사 지었어. 산에서 나무 잘라다 장작 패서 새벽에 태장까지 지고가 팔았어.
그렇게 저렇게 해서 살다가 일루 이사왔어. 여기와서 고생은 말도 못해.
우리 쥔이 나가서 술 먹다가 남하고 입씨름 하잖아. 그러면 그 분풀이를 집에 와서 식구한테 다 해요.
애들 초등학교 중학교 간현고개 넘어 걸어 다니잖아. 밥도 못 싸가는데.
어떤 땐 학교 갔다 오면 저녁을 해서 먼저 먹고 자라하면 아버지 오면 혼난다고 펀펀이 굶어잤어.
어쩌다 먹고 자면 밤늦게 들어와서 너는 뭔데 밥을 먼저 처 먹고 자빠져 자느냐고 몽둥이 들고와서 들쑤셔 깨우고, 때리고, 머리 쥐어 뜯구, 그 지경이여. 한 두번이 아니야. 부아가 나서 참다 못하면 아주 죽고싶더라고.
그러는 중에 시누가 본 남편이 죽어 새로 남자를 얻었어. 시누랑 앞 뒷집에 살던 여자가 서울 가서 사는데,
우리 쥔한테 그 여자를 소개해줘서 짝꿍이 된거야. 넷이서 개새끼처럼 몰켜 다니는 거야. 서울로 갔다 원주로 갔다.
누구네 청첩이 오면 힘들다고 나더러 대신 가라던 사람이 어디서 잔치만 한다면 먼저 나서 .
그 여자가 예식장에서 기다리다가 같이 밥 먹고 끌고 가는 거여. 한 번 가면 하루 이틀 있다 오구. 그짓을 하고 살어.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대걸이를 안하고 무섭게 안해서 그런다고 해.
여보 말도 말어. 한번은 칼로 목아지 짤러 죽인다고 그래서.
그래 죽일테면 죽여라 하고 나도 남하듯이 죽을 작정하고 달라들었어. 그랬더니 하는 소리가
대통령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박정희 대통령 죽이듯이 너도 나를 죽이려고 그러는구나 그래.
여태까지 나한테 한 걸 생각해 보라고 그랬어. 아뭇소리도 안 해.
그러구 나서도 하두 애들을 들볶아서 막내도 겨울에 쫒겨나갔어.
하도 부아가 나 한 겨울 밤 중에 논두렁 밭두렁을 뛰어 넘어서 택시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어.
택시를 세우고 아저씨, 나 지금 쫒겨나서 돈도 없고 이 형편인데 만종까지만 데려다 줘요 사정을 했어.
만종 언니네로 들어갔지. 그 이튿날 찾아왔더라고 할 수없이 왔어. 안그런다고 해놓고선 하루도 안 지내 또 여전하고.
어느 날 아들이 아파서 마이신 사러 시내 갔다 왔을 때야.
백은순 엄마 영감님이 우리 쥔이 술 많이 마시면 일 못한다고. 자네 집에 큰일 났나 가봐 하고 보낸 거야.
뭔 큰일이 나 내달아 오더니만 내가 마이신 사온 거 부엌에 놓고 나오는데,
뭐여하면서 머리를 잡어 끄들르고 몽둥이로 훔쳐 갈겨서 내 허리가 구부러진 거여.
머리카락 뭉텅 다 뽑혔지. 눈 있는데 피도 맺히고. 애들도 맞아서 몸이 성한테가 없어유.
그러다 저러다 하두 못견디겠어서 팔월 추석에 내가 도망을 갔어유.
애들 보구 아버지 깨서 엄마 어디 갔냐고 물으면 일어나지 말고 자는 척 해라 하고. 일하던 옷에 고무신 신고 니왔어.
밤 열시 넘어 깜깜한 길을 가곡리로 해서 광터로 해서 만종 도시가스 있는데 걸어서 갔더니만,
내 위에 언니가 추석 쇠고 새벽 통근차로 가려고 풋고추 따다가 깜짝 놀라더라고.
조카가 역전까지 데려다 줘서 새벽 통근차로 서울 언니네로 올라갔어. 언니 소개로 남의 집살이를 했지.
식모살이 일년 되고 그럴 때였는데 언니가 주인집으로 전화를 했어.
"야, 원주서 네 시누하고 다 왔더라 잠깐 와라. "
그래서 버스 타고 왔더니 시누, 시누 남편, 조카, 조카 딸 죽 들어와서 언니네 집에 앉았더라고.
뭔 조건으로 가자는 거냐 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그냥 집에 가재.
"산에 사냥을 하러 가려면 일단은 몰이군은 둘째여. 총가진 포수가 와야지.
총을 쏴서 잡아가던지 끌고가던지 해야지. 몰이꾼이 막아도 틈으로 빠져나가면 늬네 꽝이여. 가!"
그랬더니 내가 자기 집 고추를 훔쳐 갔대. 가다가 팔아서 차비해가지고 가려고. 그런 거짓말이 어디있어.
그 해에 김재근씨네 집에 모여서 테레비 보다가 스무 명이 한달에 천 원씩하는 계를 모아서 했어.
그때 계를 타서 주머니에 넣고 십원 하나도 못 가지고 오고. 남의 누에 친 돈도 못 받아가지고 나갔는데.
남의 고추를 훔쳐다 어디 갔다 팔아. 그렇게 애먼소리 하려면 가라고 쫒아냈지.
그랬어도 우리 쥔이 잘못했다는 소리 안했어.
그 무렵 집에 있을 때 부터 아픈 무릎이 도진거야. 오금이 뭉쳐 오그리지도 펴지도 못하게 아팠어.
남의 집살이를 하는데 얼마나 눈치 보였겠어. 다행히 침 맞고 약 두 제 먹고 나았어.
애들이 눈에 밟혀서 못살겠어서 4년만에 집에 왔지. 오니까 안 그런다고 맹세를 해. 그런데 한 달을 못 버텨.
애들 통장에 매달 모아 논 돈 찾아 와서 외양간을 다시 지었지.
그랬는데도 너 나가서 벌은 돈 다 안가지고 오고 또 지랄하면 나가려고 엇다가 숨겨 두었지 그러는 거야.
시장 볼 돈을 주는데 점심도 못 사먹고 오는데 뭐 얼마 줬냐 다 따져서 십원 이 십원 착오가 나면 엇다 꿍쳐 뒀냐 족치는 거야. 그렇게 고약하게 굴더니 환갑 나이에 병원에서 한 2년 있었나.
원자력병원에서도 이젠 안된다고 해서 집으로 왔어.
여기 들어누워서 내일 모레 죽을 판인데 내가 손발 닦아주면서 내가 죽을 때 되면 누가 이렇게 해주나했더니,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해놓고 "같이 죽지" 이래. 있던 정도 없어지는 거야.
살면서 잘해줬다면 그런 소리 할 수 있지.
하도 얻어맞아서 허리도 구부러졌지만 턱도 튕겨져서 치과 가서 입 벌리기도 힘들고 먹기도 힘들어.
애들 출생신고도, 이사하고 주민등록 이전하는 것도 다 내가 했어. 쥔은 평생 면에도 한 번 간 적이 없어.
내가 이러고 살았다고 .
병원에 다녀오신다는 어르신 집앞에서 기다리는데, 전동스쿠터 타고 오다 활짝 웃으며 손가락 브이를 날렸다.
이장님한테 미리 속사정을 들은터라 첫인상이 너무나 쾌활하고 밝아 소개 받은 분 맞나? 싶었다.
폭력남편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사신 어르신은 아직도 남편을 '우리 쥔'이라 호칭했다.
할만큼 하고 살았으니 이제는 자식 걱정도 말고 당신 몸만 위하고 속 편히 사시라 했다.
내 당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겁게 씩씩하게 사실 분이라 돌아오는 발길이 가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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