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나라 인형의집을 꿈꾸다
꿈을 향해 자신 있게 걸어간다면
꿈꾸는 대로 살기위해 노력한다면
꿈은 기대하지 않은 순간 일상이 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윌든>
동화와 인형은 나의 운명
방금 동화 속에서 나온 듯, 인형 같은 엄마는 인형을 모으신다. 집에는 이미 그동안 수집해온 인형들로 가득하다. 이사 간 집에는 아직 가 본 적이 없지만 분명 화장실까지 인형으로 장식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엄마가 인형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징그럽다고 눈살을 찌푸렸었다. 요즘엔 어딜 가도 자꾸만 눈에 인형들이 들어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이한 인형들을 보면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를 생각하면 인형이 떠오른다. 출장이 잦은 오빠도 해외에 다녀오면 엄마한테 인형을 안겨주게 되었다고. 사랑인가보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고 함께 좋아해준다는 것은. 내가 미국으로 오게 된 후에는 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날 거 같다는 엄마에게 인형들이 내 대신 위로가 되었을 테고, 아빠가 엄마를 위해 공들여 만드시던 미완성의 인형의 집을 거실에 두고 매일 아빠를 추억하며 하나하나 완성하셨을 테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도 엄마의 인형들은 추억이고 힘이고 사랑이다. 이번 전시들을 통해서 이야기 할머니가 되고 싶은 엄마의 오랜 바람이 이루어지길 소망하고 응원한다! 딸 아름이가 싸이월드 홈피에 올린 글 |
동화작가가 인형전시회를 연다니까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꿈꾸는 인형의집>이 출간 되고 나서 사람들의 의혹은 절대적인 지지로 바뀌었다.
<꿈꾸는 인형의 집>의 독자 리뷰만 봐도 그렇다.
- 김향이에게 동화와 인형은 운명이다.
운명.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저자가 자주 병치레를 해서 헝겊조각을 가지고 놀다 인형을 만드는 취미를 붙이게 된 것도.
어른이 된 이후에도 인형 사랑이 남달라 계속 인형을 만들고 다친 인형을 고쳐주고,
일반인들은 모르는 온라인 경매 사이트를 통해 입양된 우리의 인형을 도로 데려오는 등의
인연도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멀리 가는 향기
독자 리뷰를 읽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동화책 한 권으로 내 운명을 간파하다니!
내친김에 다른 분들의 리뷰도 퍼왔다.
개인적으로 내용도 내용입니다만, 전 저자의 삶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 분야의 극한에 가있는 사람을 종종 구루라고 부릅니다.
한 권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없겠지만, 저자의 글을 통해,
그리고 사진을 통해 보여 지는 그의 삶은 한 분야의 구루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 역시나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인형을 지극히 사랑하는 작가,
그러기에 그에게 인형은 하나의 인격체이며, 그 나름의 삶, 인생이 있습니다.
따뜻한 가끔은 시린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책을 통해 펼쳐집니다.
인형들의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가 글 곳곳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인생 한 단면을 책으로 옮긴듯합니다. --- 맑은 독백
마침 신문에 작가에 대한 글이 나왔다.
'살림의 여왕' 소개 편에. 타샤튜더, 마사 스튜어트 등 살림으로 성공한 이들과 함께
주부도 프로임을 이야기 하면서. 아이들 열심히 키우면서 나온 부산물들이
지금의 자기를 있게 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자기의 현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
직장이다 살림이다 바쁜 엄마들에게
"엄마는 절대 밑지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스스로 밝힌 작가의 말이 무진장 큰 힘이 된다는 사실.
------------자히르
인형사진을 먼저 본 것은, 책의 구성을 전체적으로 훑은 다음에 읽는 습관 때문이다.
뒷부분에 실려 있는 인형사진과 그 인형과의 인연을 먼저 읽게 되었다.
인형에게서 이 시대 아이들의 고민을 너무나 잘 뽑아 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형을 그만큼 사랑하는 저자였기에, 인형에게 각자의 삶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았나싶기도 하고,
또, 아이들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김향이 라는 작가의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양물감
책을 읽으며, 작가의 놀라운 필력에 감동한 적은 있지만,
작품이 아닌 작가가 부러운 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즐거운 경험을 글로 엮어 책으로 펴낼 수 있는
행운아가 과연 국내에 몇이나 있을까? -소금이
이 작품도 놀랍다. 처음 작품을 읽으면서는 이것이 한국작품이 맞나 몇 번이나 확인했다.
작가도 한국 사람이고 작품 분류도 810 한국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나오는 인물들이
존, 릴리, 셜리 템플, 골동품 가게, 인형수선병원 등등 이국적이었다.
그림이나 책 편집 기법도 기존의 작품들과는 많이 달랐다.
재생용지를 쓴 것 같은 누런 종이에 연필이나 펜으로 그린 듯한 세밀화들도 한국동화에서는 보기 드문 것들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뒤에 나온 책 속의 책 부록을 읽어 보고 나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작가의 또 다른 취미가 인형 모으고 만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모은 인형들에게 사연을 뽑아 내여 동화를 만든 것이다.
----------오월의 바람
인형의 이야기였지만 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책을 해석하게 되었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그가 꼭 여자이거나 아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 치유된다고 한다.
스스로 닫은 마음의 문을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 열 수 있을 때 인형 셜리 템플처럼
사랑스러운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비의 딸
역시 김향이 작가다. 이 책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다.
작가가 손재주가 좋아서 글을 쓰는 것 외에도 인형을 곧잘 만든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 작가가 준 인형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꽤 잘 만든 인형이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었다.
언제쯤 이 분의 인형들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 책 속에 작가의 인형들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책의 내용이 오밀조밀하면서도 정감 있게 쓰인 글이 재미나게도 읽힌다.
-행복단지
.김향이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도 우리 주변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보듬어주고 힘을 준다. 고통을 이겨내면서 또 다른 고통에 대해 면역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책도 내 삶에 있어서 고통을 견디는 좋은 예방접종이 될 것이다.
동화와 인형이 어쩌다 내 운명이 되었는지는 어린 시절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나는 한국전쟁 중에 태어났다. 고향 임실은 노령산맥 골짜기를 따라 섬진강 물줄기가 구비 도는 산간 지대다.
그래서 더욱 전쟁 피해가 컷 던 곳이다. 내가 태어난 이듬해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지만,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루 말 할 수없이 궁핍했다.
<사진1 첫돌 >
아버지는 스물일곱에 국군 정보과 문관으로 외가마을에 파견 되었고, 열여덟의 어머니를 만나 이듬해 결혼을 하셨다.
임실 읍내 향교 옆집에 신접살림을 차린 아버지는 휴전이후 면사무소 서기 일을 보셨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벌거벗은 아기 인형이 떠오른다. 유엔구호물품으로 받은 큐피인형이었다..(Kew·pie.
<사진2. 큐피인형>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생전 처음 서양 장난감을 손에 쥐었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유치가 나기 시작한 남동생이 큐피 인형의 손가락 발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어 놓았으니까.
일곱 살 인생 최초로 겪는 슬픔 이었다. 집안이 떠나가라고 울었다. 울다 지쳐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한나절을 울었고 , 어머니는 헝겊 인형을 만들어 달래주셨다.
이불호청을 뜯어 만든 인형은 검정물들인 명주 치마에 새하얀 옥양목 저고리를 입었는데 허수아비 같고 눈코 입이 없어 얼굴이 달걀 귀신 같았다.
퇴근하신 아버지가 남포등 불빛 아래서 인형 얼굴에 눈 코 입을 그렸다.
“우리 행이 닮게 그려야지.”
아버지는 내 이목구비를 찬찬이 들여다보면서 만년필로 눈썹 한 올 한 올 공들여 그리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에 둘도 없는 인형이었다. 그러나 그 헝겊인형하고도 오래 놀지 못했다. 남동생이 요강에 빠트려버렸으니까.
요강에서 건저 올린 인형은 만년필 얼룩으로 볼썽사납게 되었다. 두엄더미에 내던져진 인형을 바라보며 또 울었다.
어머니는 새 인형을 만들어주마 달래는 대신 울음 밑이 길다고 혼찌검을 내셨다.
내남없이 헐벗고 궁색했던 그 시절에 인형을 만들자고 옷을 자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가 종이 인형을 그려주셨다.
해종일 논밭으로 나가 있는 어른들 대신 아이들이 집을 지키고(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니 도둑이 들끓었다) 아우를 보살피던 때라 어른들은 ‘문둥이가 어린애를 잡아다가 간을 빼 먹는다’는 흉한 소문으로 아이들을 집안에 붙잡아두었다. 동생을 업은 어머니가 들로 나가면 혼자 집을 지키며 인형놀이를 했다.
인형을 상대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게 종이인형은 장난감 그 이상이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말벗이었다.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국회의원 비서가 되어 서울로 올라가셨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집에 오시던 아버지가 일제 오빠루 천을 어머니께 선물하셨다.
어머니는 한복을 지어다 햇댓보 속에 걸어 놓고 나들이옷으로 아껴 입으셨다. 오동꽃 빛깔의 보들보들한 천이 어찌나 고와 보이던지 나는 그만 한복 치마 밑단을 싹둑 잘라 인형 옷을 만들고 이불호청으로 만든 인형에 입혔다.
어머니의 나들이옷을 요절낸 죄로 내 종아리에 벌건 빗금이 그어졌다.
<사진3. 초등 입학 무렵 남동생과>
초등학교 1학년 때 이도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중간 미닫이문을 닫으면 두 개로 나뉘던 넓은 안방과 부엌으로 연결되던 도장방, 안방을 가운데 두고 건넌방이 두 개나 되었다. 사과나무가 있는 텃밭을 끼고 돌면 뒷마당에 땔나무를 쌓아놓은 헛간이 있던 넓은 집이었다. 앞 뒷마당과 우물가에 철철이 꽃들이 피고 지는 집이 내 마음에도 흡족 했다.
나는 이도리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 뛰어 놀 기운도 없었지만 계집애들이 치마를 펄럭이며 고무줄뛰기를 하는 건 시장바닥 아낙네들의 욕지기만큼이나 상스러워보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이 보는 언니가 우리 집에 왔다. 그 언니는 우리 형제들을 잘 데리고 놀았다. 헛간에서 작대기를 가져다 열십자로 묶고 옷을 입힌 다음 바가지를 씌워 꼭두각시를 만들었다.
언니가 꼭두각시를 쳐들고 어깨춤을 추면 우리 형제들이 뒤따르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언니가 부잡스럽고 사납다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잠시 서운했지만 곧 예전처럼 혼자 놀았다. 마당의 흙을 숟가락으로 오목오목 긁어내고 그 속에 꽃송이를 넣고 유리조각으로 덮었다. 그렇게 대문에서 안마당까지 꽃 타일을 깔았다. 나는 꽃길을 걸어 들어가 꽃나라 공주가 되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내 멋대로 하고픈 대로 실컷 즐길 수 있었으니까.
그 뿐만 아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다 주신 란도셀 가방, 분홍색 우비와 장화, 비즈로 수놓은 해어밴드,학용품들로 부러움을 샀으니 나는 충분히 행복한 아이였다.
그 무렵 막내 이모를 따라 자주 외갓집을 오갔다. 외갓집 작은 방에 마을 처녀들이 모여 앉아 십자수를 놓았다.
혼수 준비로 양복 덮게, 인두판, 베갯모, 베갯잇을 만들었다. 햇댓보에 활짝 핀 목단과 나비 한 쌍이, Home sweet home이 수놓아지는 걸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틀에 메운 광목천을 뚫고 올라온 바늘이 색실을 이끌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양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겨울 방학이면 외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마을처녀들이 작은 방 남폿불 아래 머리 맞대고 수를 놓으면 그 옆에서 빛깔 고운 수실들을 한 바람 한 바람 바늘에 꿰어 인형 옷을 지었다. 밤이 깊어 사방 벽으로 그림자들이 일렁일렁 춤을 추면 그림자놀이를 했다.
뒷산에서 부엉이가 울면 처녀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방문 밖으로 나오면 소리없이 쌓인 눈이 산수화를 그려 놓았다. 아, 그 밤의 처연한 아름다움이라니!
나는 종이상자에 색실, 단추, 색색의 자투리 천 조각들을 모았다. 나만의 보물 상자를 들여다보는 은밀한 즐거움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다섯째를 임신한 몸으로 이삿짐을 싸셨다.
3학년 신학기에 서울로 전학을 온 나는 촌뜨기로 불렸다. 교실에서는 반벙어리였다. 사투리를 흉내 내는 서울내기들의 놀림감이 되는 게 싫어서였다. 꾀병으로 결석 하는 날도 잦았다.
아버지는 퇴근 후에 골목에서 남동생들과 놀아주셨다. 권투나 씨름판을 벌여놓고는 동네 아이들을 끌어들여 심판을 봐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외동딸이자 맏이인 내게 각별하셨다. 아이들에게 기죽지 말라고 동아백화점(신세계)에 데리고 가서 옷과 구두를 사 주셨다. 무용학원에 등록 시켰다가 흥미가 없는걸 알고는 미술학원에 보내주시기도 했다. 가끔 학교에 오셔서 남동생과 내가 잘 적응하는지 살펴보셨다.
<사진4, 열 살 때 서울로 이사 온 기념사진>
이 무렵 아버지가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빌려오셨다. 아버지는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만화책을 이용해 방안으로 끌어들이셨다. 만화책으로 책 읽는 습관을 키운 우리는 아버지를 따라 도서관나들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국립중앙 도서관(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가던 날, 나는 도서관 현판을 보고도 뭘 하는 곳인지 모른 채 따라 들어갔다. 어린이 열람실에 들어와서도 과외공부를 하러 온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도서관 앞에서 산 도넛 상자를 사서 선생님께 맡기고 말씀하셨다.
“우리 아이들이 책을 한 권 읽을 때마다 상으로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가로 달려가 책을 골랐다. 도넛을 동생보다 한 개라도 더 먹기 위해 이솝, 흥부놀부, 신데렐라, 해님달님을 읽었다. 그날 나는 책이 도넛보다 훨씬 맛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대문을 들어서지 못했다. 입이 근질근질 해서. 동네 꼬맹이들을 모아 놓고 책 읽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 대문 앞에 꼬맹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옛날이야기 응?.”
그런데 이 아이들이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 값으로 눈깔사탕과 누룽지를 가져왔으니까.
통금 사이렌이 불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밑천이 떨어지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되니까 신바람이 났다.
만리동에서 도서관이 있는 소공동까지 걸어 다녔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아백화점에 들렀다. 백화점 1층 인형코너에 아리랑드레스를 입은 귀부인과 주름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쓴 왕눈이 인형이 있었기에. ‘나는 언제쯤 저렇게 예쁜 인형들을 살 수 있을까?’ 싶었다. 피아노 위에 인형 케이스를 올려놓을 수 있게 되는 날을 꿈꾸었다.
어느 날 월요 조회 시간이었다. 주번 선생님이 이름을 불렀다. 독서 감상문 최우상을 타러 나오라고 했다. 상을 타고 교실에 들어오자 아이들이 내게로 몰려왔다.
“정말로 네가 쓴 거 맞아? 무슨 내용인데?”
그날 반 친구들 앞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희 집 어디야? 이따 갈 때 같이 가자.”
나는 더 이상 촌뜨기가 아니었다. 꾀병을 부려 결석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해 열 살 생일 선물은 계몽사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 50권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책이 아닌 내 책이 자그마치 50권이 생긴 것이다.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고 어머니는“‘전기세 나간다. 불 꺼라” 소리를 입에 다셨다.
세계명작들은 나를 먼 미지의 세계로 데려갔고 책 속에서 나는 소공녀 세라가 되기도 하고, 알프스의 하이디가, 톰의 여자 친구 배키가 되어 울고 웃었다.
‘이 다음에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꿈은 삼십년 후에 마흔 살 나이로 계몽사에서 주는 계몽문학상을 타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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