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의 고향 >
'달님은 알지요''쌀뱅이를 아시나요'의 작품 배경 '임실'
1991년 9월 어느 날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TV에서 흘러나온 북소리에 이끌려 TV앞으로 다가갔다.
진도 씻김굿 기능보유자가 죽은 이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치는 북소리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TV 자막광고를 보고 대한민국 국악제가 열리는 날 KBS홀에서 팔도 무속음악과 마당 굿 공연을 보았다.
작두날 위에서 춤을 추는 무녀를 보고나서 앞으로 내가 쓸 동화의 주인공 할머니는 무당이라고 설정했다.
다음날부터 도서관에서 무속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자료가 정리 되었을 때 내 창작노트의 첫 페이지에
‘주인공 할머니는 무당이다. 세습무가 아닌 보통 사람이 신내림을 받으려면 그럴듯한 역경이 있어야 한다.’라는 메모와 함께 무당 할머니의 한 많은 삶을 구상했다.
할머니의 이름, 나이, 고향, 가족관계 등 세부사항을 도표로 그려놓고 우리 현대사와 접목해 사건들을 엮어갔다.
임진강변 외딴집에 사는 열두 살 송화 이야기는 무당 할머니의 신산스러운 삶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송화 할머니의 캐릭터는 임실 고모님을 모델로 그려나갔다.
송화네 외딴 집도 향교리 칠성당 밑에 있는 고모님 댁을 배경으로 그려나갔다.
송화 아버지 또한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다.
천대 받는 무당 어머니가 부끄러워 가출을 한 뒤 목돈을 벌기 위해 월남전에 자원입대한다.
지뢰 파편을 맞고 열병을 앓다 제대한 그는 만삭의 몸으로 철공소에서 함께 일하던 아내마저 잃는다.
갓난아이를 감당 할 수 없었던 그는 어머니 집에 어린 딸을 두고 몰래 두고 떠났다가 십이 년 만에 고향을 찾아 온다.
무당 할머니와 아버지, 손녀로 이어진 한 가족의 이별과 그리움 그리고 만남을 통해
가족간의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 나아가 우리 현대사에 휘둘린 한 여자의 한 많은 삶을 고리로 하여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 그리고 통일의 염원까지 담으려 했다.
그러자니 머릿속에 얼크러진 이야기를 동화로 풀어내기가 버거웠다. 뚜렷한 병명도 없이 온 몸이 아팠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꿈만 꾸었다. 가위에 눌리고 식은땀으로 목욕을 했다.
하루에 두서너 줄 쓰고 고치고 다듬고 ............ 그렇게 이년 가까이 썼다.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송화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비늘을 보았다. 새가 곤두박질치듯 물비늘 가까이 날아들었다. 송화는 새의 날갯짓을 눈으로 따라다녔다. '송화야, 집에 안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둑길을 걸어가며 소리쳤다. 송화는 몰래하던 짓을 들킨 것처럼 놀라며 일어섰다. .............. 강가 습지에는 갈대와 부들이 배게 자랐고, 조리풀, 수크령들이 얼크러져서 몸을 숨기기에 좋았다. 송화는 나무토막에 오도카니 앉아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강물은 뭐가 그리 좋은지 저 혼자 들까불며 흘러갔다. |
초등 2학년까지 임실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 갈 때는 고종사촌 오빠들과 정문이 있는 신작로로 다니지만
혼자 귀가하는 길은 후문이 있는 둑길을 이용했다. 임실천이 흐르는 둑길에는 해찰할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강가 습지에 무성한 풀들을 헤치고 걷노라면 더러 물새알이 눈에 뜨기도 하고 새들이 노니는 풍경을 만났다.
둑에 거적을 치고 사는 미친 여자를 엿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뛰어 놀기보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공상하며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송화네 집은 볕고개에서 뚝 떨어져 외따로 있었다. 청남 빛 슬레이트 지붕위로 저녁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울타리 콩이 잿간지붕까지 뻗어서 보랏빛 콩꼬투리가 주렁주렁 탐스러웠다. 울타리 안의 꽃밭에는 가을꽃이 한창이었다. 부엌 쪽에서 감주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할머니가 한뎃솥에 감주를 달이고 있었다. 한데 아궁이에 왕겨를 끼얹으면 불꽃이 사그라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풍구의 바람개비를 돌려 불꽃을 살려내었다. |
툇마루에 가을볕이 푸짐하게 내려앉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송화가 보꾹을 올려다보았다. 누런 흙벽에 햇살이 물무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시렁에는 교자상과 소반 크고 작은 목판과 채반들이 층층이 얹혀있었다. 이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살림살이들이 색이 바라고 흠집이 난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파리통이 있는 선반기둥에 등초롱이 걸려있었다. 아무도 밤 깊어 찾아온 적이 없는데 할머니는 직심스럽게 밤마다 등불을 밝혀놓았다. |
고종사촌 형제들과 어울려 놀던 고모네집은 우리 집보다 더 또렷이 기억이 난다.
방안 가재도구의 문양이며 숨박꼭질로 숨어들던 잿간 짚덤불의 감촉까지.
-남동생이 3개월여 작업끝에 완성한 송화네집.
베갯잇으로 인형의 손발을 마름질하는 동안 영분이가 바늘귀에 실을 꿰어 놓았다. 송화는 바늘에 더러 손톱 밑을 찔리기도 하면서 인형의 몸통을 꿰매놓았다. 꿰매놓은 것을 영분이가 뒤집어서 솜을 넣었다. 몸통에 팔다리를 꿰매 붙이고 얼굴까지 이어놓으니 영락없는 허수아비였다. "달걀귀신이다 이히히히..." 영분이가 인형을 들고 흔들어댔다. "이리 내. 눈 코 입도 그려야 해." 송화는 색연필로 눈을 그렸다. 인형의 눈은 왕사탕만 했다. 쌍꺼풀 없는 작은 눈이 불만이라서 턱없이 크게 그린 것이다. 송화가 주름을 잡아 부풀린 치마를 인형에게 입히자 영분이가 신기하다는 듯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너 이다음에 인형 만드는 사람해라. 어렸을 때 우리 엄마도 헝겊인형을 만들어 줬다. 아빠가 내 얼굴보고 만년필로 인형 얼굴을 그려줬어. "" 송화는 잠자코 검정 실을 땋아 인형머리에 꿰매 붙이고 영분이 혼자 떠들었다. "바로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 그 애가 내 인형을 요강에다 빠트렸단다. 금방 건졌는데도 잉크가 번져서 얼굴이 시커멓게 된 거야. 아기 때렸다고 엄마한테 야단맞고 우니까 아빠가 인형을 사다줬어. 지금 영희가 가지고 노는 인형이야." 송화는 영희가 입에 물고 다니던 인형을 떠올렸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고무인형의 참외씨 만한 손가락마다 잇자국이 나있었다. 엄마 정에 굶주린 영희가 잘근잘근 씹었을 것이었다. '영분아, 그 인형 너 가져." 영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화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영희 주려고 만들었는데 너 가져도 돼." 영분이는 인형을 영희 품에 안겨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
어려서 나는 병치레를 많이 했기에 방안에서 종이인형을 만들어 혼자 놀았다.
어느 날 구호물자로 들어온 고무인형을 셋째 남동생이 잘근잘근 씹어 망가트렸다.
그날 종일 우는 바람에 어머니가 광목으로 헝겊인형을 만들어주셨다.
면사무소에서 퇴근하신 아버지가 만년필로 인형의 눈 코 입을 그려 주셨다.
해묵은 기억 중에 그날의 장면은 너무도 또렷하다. 향교 집 안방에 아버지와 내가 마주앉았다.
아버지가 내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시곤 “우리 행이 닮게 그려야지.” 하고 인형 얼굴을 그렸던 것이다.
그 소중한 인형도 오래 데리고 놀지 못했다. 어린 남동생이 요강에 빠트려 버렸으므로.
이번엔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가 인형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손으로 인형을 만들게 되었다.
내 이름 위에 인형작가란 수식어가 하나 더 얹어진 것은 그때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금순네 행랑 흙벽
1994년 12월, <달님은 알지요>가 출간 된 직후 고향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어스름 새벽에 겨울 비 내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임실역에 다다랐을 때 남편은 내 묵은 기억을 위해 자동차의 속도를 늦추어 주었다.
그 낡고 허술한 시골역사는 너무도 낯설었다.
서울에 대한 벅찬 기대와 설렘으로 기차를 타던 곳이, 그렇게 비좁고 초라한 모습일 줄이야.
우시장이 서던 숩정이를 지나 이도리에 이르렀을 때 추억의 장소들을 찾는 내 눈길이 뿌옇게 흐려졌다.
임실향교와 담장을 잇댄 곳에 내가 태어난 향교집이 있었다. 일곱 살까지 살았던 그 집은 돼지우리만 남아있었다.
윗집 금순네 집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행랑방 흙벽에 우리 형제들이 곱돌로 그려 넣은 낙서들도 남아있었다.
괴발개발 그려 놓은 낙서들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어릴 적 감회에 젖게 만든 낙서들이 <쌀뱅이를 아시나요>의 모티브가 되었다.
가볍게 들먹이는 쌀뱅이의 어깨 너머로, 군데군데 흙이 떨어져 나가 수숫대가 드러난 흙벽이 보였다. 흙벽에는 쌀뱅이와 내가 곱돌로 그어 놓은 낙서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쌀뱅이와 내가 허수아비 같이 팔을 벌리고 서서 새 발자국 같은 손을 잡고 있었다. "이것 봐 여기 코 흘리게 쌀뱅이와 순애가 있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흙벽의 그림을 바라보던 쌀뱅이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림 속의 순애가 되어 쌀뱅이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고추잠자리들이 난데없는 손님을 맞아 부산스레 날아다니는데, 잿간 옆의 백일홍이 갸웃이 내다보며 볼을 붉히고 있었다. |
금순네 행랑방에 연하실 사람한테 서울서 시집 온 서울 댁이 살았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미선이를 데리고 삯바느질을 했다.
남편은 작은댁을 얻어 서울서 산다고 했다. 미선이는 소아마비를 앓아 거동이 불편했다.
종일 엄마 곁에서 바느질 밥으로 나온 천 쪼가리를 가지고 놀았다.
얼굴이 백납처럼 하얀 미선이가 두 다리를 뻗대고 앉아 칭얼댈 때면 어린 마음에도 보기가 짠했다.
나는 미선이 부축하고 나와 행랑방 흙 바람벽에 곱돌로 토끼도 그리고 풍선도 그려주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 이었다.
명랑 할매는 내가 숯막에 오는 걸 반가워했는데 심심하다고 칭얼대던 쌀뱅이가 나를 언니라 부르며 따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 놀고 가야지'하면서 쌀뱅이의 초콜릿과 껌을 야금야금 빼앗아 먹었다. 아버지의 우체국을 통해서 별스럽고 희한한 먹을 것들이 숯막으로 보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쌀뱅이가 가여워서 숯막에 더 자주 들렸다. 이번에는 내가 쌀뱅이의 군것질거리를 챙겨다 주었다. 삘기, 버찌 ,산딸기, 오디, 까마종이. 파리똥, 망개 ,칡........ 우리들의 주전부리는 산에 들에 그득 널려있었다. 나는 쌀뱅이를 데리고 소꿉놀이, 숨바꼭질, 공깃돌 받기, 십자가이생, 땅따먹기놀이를 했다. |
미선이는 서울로 취직이 되어 떠난 우리 아버지를 나보다 더 기다렸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오는 머리핀이나 인형, 과자 때문이었다.
미선이는 백일해를 앓다가 고작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하고 갔다.
얼굴이 쌀처럼 하얘서 쌀뱅이로 불리던 혼혈 아이는 미선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태어났다.
(고향 마을에 ‘쌀뱅이’로 불리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도 왜 쌀뱅이라고 불렸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싹싹하고 경우 바른 서울 댁 아줌마는 나를 미선이 보듯 하셨다.
영등포 친정에 다니러 갈 때면 나를 데리고 다녔다.
우리가 이도리 집으로 이사 했을 때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내 어린 날의 고향 사람들은 아직도 내 동화 속에 살아있다.
고향은 내 동화의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샘물이기에.
-2003년 7월 <소년> 잡지「2003 어린이 문학교실 문학기행」으로' 쌀뱅이를 아시나요' 작품의 고향, 덕치를 찾았다.
- 2003년 8월 계몽아동문학회원들과 임실 -덕치 진메-천담-구담-회룡- 장구목 섬진강 문학기행을 했다.
방학이면 외가가 있는 덕치에 내려가 자연 속에서 뛰어 놀았다.
섬진강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의 생가도 덕치면 진메에 있다.
김시인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덕치에서 초등교사로 정년퇴임을 했다.
정채봉 선생님이"임실이 낳은 두 문장이 있는데 운문에 김용택이고 산문에 김향이다"고 추켜 세운 적이있다.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시로 임실을 널리 알리는 고향 선배가 있어 자랑스럽다.
그 강에 가고 싶다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에
그 강에 가고 싶다.
특히 임실의 구담과 순창의 회룡마을이 만나는 너럭바위 아래 장구목은
'아름다운시절'과 '소나기' 촬영지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이다.
수수만년 동안 강물이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빚어낸 바위들이 드러누운 곳,
무심한 봄바람이 불면 매화꽃비가 내리는 곳.
길은 강물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고 물길 따라 사람 사이로 정이 흐르는 곳 ,
그곳이 내 고향 임실이다.
-2010년 4월 향교 옆의 생가는 허물어지고 터만 남았다.
-2010년4월 생가 안방이 있던 자리에 히야신스가 피었다.
임실 향교와 보호수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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