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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추억

271호 통영 문학기행

멀리 가는 향기 2012. 4. 9. 12:31

계몽문학회원들의 첫 문학기행지는 통영이었다. 

2012 통영문학 기행은 20년 만의 나들이다.

 

 

통영은 문화 예술인의 산실이다.

극작가 유치진.시조시인 김상옥, 시인유치환, 작곡가 윤이상, 시인김춘수,

소설가박경리, 화가 전혁림, 소설가 김용익,등 걸출한 예술가들을 태어나게 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청마문학관,

 

 

 

 

  이영도를 향한 청마의 연모는 이영도에게 띄운 5000여 통이 넘는 편지와 시로 대국민 선포와 같은 스캔들이 되었다.

 

 재색을 고루 갖춘 이영도는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고향에 돌아온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파도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청마 기념관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가족의 냉담에 기인했을 것이다.

세간의 무수한 입담에 오른  청마의 사랑은  부인은 물론 자식들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고  남았으리.

 

 

윤이상은 위대한 예술가다. 아마 유럽에서 태어났더라면,

명예를 누리면서 한평생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세계의 근저를 아우르는 민족이라는 화두는

 아이러니하게 그를 정치적인 인물로 변형시켰다.
예술인생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던 한국계 독일인에 대하여

분단시대의 냉전적 잣대를 들이대고  국가보안법까지 운운하는 것이 안쓰럽다

 

 

 

당신의 영원의 낭군이,

이 한마디가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연모를  달래주고도 남았을 것이리.

결혼한 남자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것임을 모르는 남자들이 많다. 

 

 

 

 

윤이상 선생의 <친북활동>이라는 것도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로서가

아닌 냉전적 시각으로 평가하기에  생기는 오해이다.

이제 윤이상 선생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그의 영혼을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통영 앞바다에 놓아드려야 할 것이다.


 

 

 

 

윤이상이 살던 독일식 주택을 지어 놓고 그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차고 안에 모셔두었다.

 

  

박경리 기념관,

 

'애를 데리고 가난하게 살던 때라 방 한 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 시절이 정신적으로는 건강했던 것 같아요.'

 

가을 선생이 '동정호' 다방 드나들던 시절에,

 박경리 선생 집에 젊은 남자가 드나든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답니다.

나중에 그가 사위 김지하로 밝혀졌다는 .......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도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자유로운 정신에서 작가는 태어납니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업입니다. 아주 작은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사랑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견디어야 합니다.'

 

 

 

그 밤 우리는 묵혀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허호석 선생님이 박경리 선생의 <토지> 야사를 들려주셨고,

손님으로 오신 이가을 선생님이 십대 때 박경리 선생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미도파 건너편에 '동정호'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당시 내로라하는 문학가들이 드나들었다고.....

 

 

 

도다리 쑥국으로 해장을 한 일행들이 케이블카를 타고

한려수도 조망을 위해 미륵산에 오른다.

 

 

산꾼 박경태가 저먼저 올라 산꼭대기서 손 흔든다.

 

 

미륵산 정상에도 서보고 

 

동서남북 빙글빙글 돌아보아도 내려다 뵈는 것은 섬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수묵화처럼 멋들어진 통영

 

 

벚꽃이 터널을 이룬 마을길을 걸어가노라면

내가 미술관이오 하고 자태를 드러내는 집이있다.

 

 

 

 

 

빛의 마술사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게  전혁림(1916-2010) 미술관은 화사하다.

전시장 외벽의 도자타일들은 전혁림화백과 그의 아들 전영근 화가의 작품들로 구성 되었다.

 

 

그는 통영수산학교시절  미술교사를 통해 그림에 눈을 떴다. 

방과후 아마추어 화가 도시야스 선생 집에서 지도를 받았다.

이후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한 그는 국전에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받고 데뷰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그의 작품

한국적 조형감각과 한국적 색체 오방색을 풀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든 화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피난온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단체전도 열고 입지도 굳히게 되었다.

 

김춘수시인은 그의 작품에 대해,

"하늘은 쾌청이라 더없이 푸르고

저 건너 내다뵈는 바다 또한 질은 쪽빛 .........."이라 표현하였다.

 

 

 

그러고보니 실내 계단과 외벽 게단의 블루가 '짙은 쪽빛'과 무관하지 않다. 

그에게 푸른색은"충무시의 하늘빛이요 특히 그 물빛이다."

 

94세에 타계하기까지 그는 현역이었다.

<90, 아직은 젊다>전시 때 노무현 대통령이 사들인 '통영항'은  청와대에 걸려 있다고.

 

 

통영항 강구안 ,

저 꼭대기 달동네가 동피랑 이다.

 

 

동피랑은 동쪽 피랑(벼랑)이라는 뜻.

통영성의 3개 포루 중 하나 인  '동포루'를 이곳에 복원한다는 계획이 발표 되자,

시민단체에서 재개발을 반대하여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공모전을 열고 벽화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벽화마을로 유명새를 타게 되었다.

 

 

"무십아라,와 넘우집 벤소깐까지 사진기 디리대고 그라노?"

 

구질구질한 달동네 남루한 집도 그림 옷을 입으면 관광지가 되누나.

 

누추와 남루가 꽃 한송이로 활짝 웃는다.

 

 

 

  좁은 골목의 벽화가 산토리니를 떠올린다.

 

 

붕숭아 채송화 분꽃을 키울 마당이 없어도 시멘트 담장이 화들짝 꽃을 피워 놓았다.

 

드라마 '빠담빠담" 촬영지.

 

 

통영의 공무원들이 미처 조명하지 못한 통영 출신 소설가가 계시다.

(계몽 식구들한테는 지례예술촌에서 이바구한 바있지만....)

 

부귀영화와 안정을 거부하고 구속과 허세를 싫어했으며, 자신의 외모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괴짜 소설가 김용익(1920-1995).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 이미 세계가 극찬했다.

 

영어로 한국인 특유의 감수성을 표현, '마술의 펜'이란 칭호를 얻은 김용익은 1956년 단편 '꽃신'(The Wedding shoes)을 미국에서 발표해

영어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편 소설을 쓰는 작가로 손꼽혔다.

또 해녀, 행복의 계절, 푸른씨앗 등 발표한 작품마다 미국과 영국, 독일,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주목을 받아

 세계 각국의 교과서와 문단의 특별한 사랑의 받아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고국 하늘만 바라봐도 눈물이 난다. 쇠똥에 빠졌던 고향의 그 골목길이 내 창작의 원천이다.

여행의 마지막 종점은 어릴 적 뛰놀던 고향 바로 통영 그곳이네"(미국생활 중 소설가 김용익)

 

 

"난 힘없고 가난한 신생 한국의 외교적 대변자였다면, 내 동생 김용익은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한국 정서를 세계 무대에 당당히 알린

작가로 후세는 김용익을 더 오래 기억할 것이다."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

그는 미국유학 중에 공부보다도 작품 쓰는 것에 열중햇다.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쓰는 일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세 시간씩 작품을 줄기차게 써서 잡지사나 출판사로 보냈는데. 

우체국 직원이 "당신처럼 평생을 작품 우송하며 보낸 노인이 있다. 쓸데없는 고생 그만두라'는 충고까지 받았단다.

퇴짜 맞은 원고들이 쌓여가는 것을 바라보며 깊은 절망에 사로잡히던 어느 토요일,

눈이 소복하게 내리던 날  주머니돈을 다 털어서 싸구려 축음기를 하나 샀고 비발디의 ‘사계’를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틀었다. 

그러던 중  조각배 같은 흰 버선을 담은 꽃신 한 켤레가 환상처럼 떠올랐다.

꽃신 신은 여인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그를 뒤따르는 김용익의 마음은 그 고운 비단이 눈에 젖을까봐 자꾸 발닥거렸다.

그리고 한 달 반 만에 완성한 단편소설이 바로 <꽃신>.
드디어 '꽃신"이 잡지에 게재되어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꽃신의 문체가 간결하고 아름다워 미국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남들이 엉뚱하고 불가능하다고 비웃을  갈망일지라도

그 것을 품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며 끈질기에 물고 늘어질 때 무엇인가 이루어진다느느 것을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느꼈다.

 

 

 

펄펄 뛰는 생선과 꾸덕꾸덕 말린 건어물이  있는 시장통을 지나

다시 통영항에서 모였다.

 

 

계몽회원간의 이별의식

 

우리는 서로를 껴안아 등을 다독여 기운을 북돋우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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