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배유안 작가가 부산에서 올라왔다. 강연 핑계김에 서울에서 며칠 묵기로 했단다.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점심 먹고 시립미술관에 들러 <고갱전>을 볼 참이었다.
시청역에서 하염없이 쏱아지는 빗발을 구경하다가 지하도를 이용해서 '서울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진 어르신들을 보았다.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움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고 활기찬 노년을 즐길 수있다.
폭우가 잦아지기를 기다려 덕수궁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덕수궁 돌담길은 내게 추억이 많은 장소다.
초등학교 때 단짝 혜정이랑 과외 빼먹고 은행 줍던 일, 미술학도인 남편 따라 스케치 다니던 덕수궁,
광화문에 있던 아버지 사무실 (동화면세점에 있던 구 감리회관)들락 거리던 ........
내가 부산에 강연을 가면 배유안 집에서 잠을 잔다.
범초 선생이 우스갯소리로 날 재워주고 기를 받으라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녀의 기를 받아야할 판.
그녀는 <초정리 편지> 이후 얼마나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는지 역사동화 전문가로 나설 정도로 유명 작가 되었다.
이가을 선생님도 배유안과 창비 맴버라 동행을 했다.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고흐>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단짝처럼 화자된다.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고흐에게 선물했는데 이 그림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고흐가 들고있는 붓이 마치 바늘처럼 가늘고, 고흐의 멍한 눈은 해바라기 눈보다 작고.
무엇보디 뒷배경의 고갱이 그리고있는 풍경화가 고흐를 위에서 억누르는 듯한 구도였다.
고흐를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이 그림을 보고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고흐는
술잔을 던지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지만 고갱이 아를에 온 뒤로 다시 폭주를 시작했다.
고흐가 그린 <지누 부인 > 고갱이 그린 <아를의 밤의 카페>
고갱이 고흐의 아트리에에서 지내던 어느 날 카페주인 지누 부인의 초상을 그리기로 했다.
지누 부인은 고흐가 아를에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고흐는 자기가 좋아하는 지누부인 초상화를 그리면서 테이블에 낡은 책을 놓아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고갱이 그래봤자 술집 마담이지 하고 비웃었다.
잩은 장소에서 같은 모델을 그린 고갱은 지누부인 테이블에 싸구려 술병을 놓아 싸구려 선술집 포주같은 인상을 주었다.
뒷편의 배경으로 그린 창녀와 손님들은 고흐의 지인들이었다. 고갱이 고희의 지인들을 경멸하듯 그렸다는데서 문제가 되었다.
고흐 자화상 고갱 자화상
서양의 모던 아트는 고흐와 고갱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고갱과 고희의 개성적인 표현은 20세기 화가들의 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두사람은 서로의 그림에 대해 논쟁을 하다가 서로를 미워하게되고
분을 삭이지 못한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고흐보다 5살 연상인 고갱은 인습타파 주의자였고 냉소적인 궤변을 일삼으며 상대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고흐는 우정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줄듯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같은 성격인 반면 버림을 받으면 자신을 괴롭히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둘은 차가운 물과 뜨거운 불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세 사람 ,나이도, 성격도, 작품 성향도, 취향도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은 변함없다.
시립미술관은 개화기에 독일 영사관으로, 조선총독부 정동분실로 ,1995년까지 대법원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저 돌기둥에는 일본 총독의 사인이 세겨진 정초석이 있다.
미술관 앞마당의 조각상과 멋진 나무들
미술관을 나와 정동의 근현대사 건물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 남편이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 정동이라 나는 이곳에 대한 추억이 많다.
덕수궁 뒷편에 위치한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곳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건물임에도 세간의 이목에서 벗어난 숨은 공간이 되었다.
'광명이 이어져 그치지 않느 전각'이라는 중명전은 원래 고종황제의 도서관으로 수옥헌이라 불리었다.
1904년 경운궁(덕수궁)의 대화재로 고종이 거처를 옮겨 경운궁 복원전까지 생활하셨다.
서양식 전각 중명전은 러시아인 사바쩐이 설계를 했는데 몇 해전 향기가 인형전을 연 '제물포 구락부'도 그가 설계를 했다고
제물포 구락부
1905년 11월 18일 새벽,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속국을 만들기위해 을사늑약을 강압적으로 채결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 조약으로 조선왕조 27대 519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어나게 된다.
그 시기 조선은 영국, 독일,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야욕으로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그때 만약 영국의 속국이 되었더라면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수모도 덜 당하고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을사늑약이후 고종은 각국의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렸다.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 제국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
이 사건을 알게된 이토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퇴위를 종용했다.
외무대신 하야시와 함께 밤새 고종을 협박하던 그들은 황태자 섭정의 조칙을 승인하도록 겁박했다.
일제와 친일각료들은 고종이 양위한 것으로 발표했고 서울 장안은 유혈과 통곡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중에 중명전은 외국인 사교클럽(구락부)로 사용되다가 일본에 인질로 잡혀있던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에게 기증되었다.
그 뒤로 정동극장 소유로 넘어갔다가 문화재청이 다시 매입하여 관리하고있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의 일부
경복궁에 있던 고종이 명성황후 시혜사건 이후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1년여 감금된 사건이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구출된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경운궁에 머물렀다.
자신도 언제 시혜를 당할지 안위가 두려운 나머지 밤잠을 못자다가 낮에 상궁들 방을 전전하며 토막 잠을 주무셨단다.
고종이 물러난 이후에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덕수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머무르면서 궁궐이 되었으며,
광해군 1611년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얻었다.
이후 광해군은 1615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어가를 옮겼으며,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원래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 미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명전을 비롯하여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지내는 선원전이 있었고,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조선호텔 뒷편 정원)을 설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덕수궁은 조각나 버린데다 건물과 정원은 물론 석탑까지 일본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이것으로도 제국주의 침탈이 가져온 문화재 파괴가 얼마나 심각한지 증명이 된다.
정치인들이 사리사욕에 눈 멀고 백성들이 우매하면 앞으로도 내우외환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예술의전당 V 겔러리 명성황후전시회
명성왕후의 가례 재현/ 안혜경
초소형 인형작가 안혜경씨가 초대장을 보내왔기에 이날 날 잡아서 관람을 한 것이다.
일본의 낭인들에 시혜당한 조선의 마지막 국모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인형으로 조각으로 비디오 아트로 다양하게 표현한 전시였는데
메모리 공간 부족으로 카메라가 이웃되어서 담지 못했다.
연 삼일 ,서울역사 겔러리 아시아 청년작가전. 그루 겔러리 하프돌 전시회에 이어 고갱, 명성황후전까지
전시회 관람으로 종아리가 아파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덥다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기보다 일에 몰두하여 더위를 잊는것이 내가 여름을 견디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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