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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강연

568호 조선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여성 화가

멀리 가는 향기 2014. 8. 2. 11:06

 

 

2001년 두산동아에서 출간한 <신사임당> 영문판이 나왔다.

여성가족부 후원으로 해외봉사단원들이 대한민국 브렌드 홍보용으로 사용할  책이다.

 

 

신사임당은  조선 왕조의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자기 개발에 매진했던 사람이다.

시문과 그림으로 이름을 알리고 예술가의 생애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7남매를 정성으로 양육했다.

맏딸 매창은 어머니 사임당의 예술적 소질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셋째 아들 율곡은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넷째 아들 시, 그림, 서예, 악기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다.

남다른  태교로  아들을 주나라 왕으로 기른  태임을 본받겠다고  아호를 사임당으로 정한

그녀의 바람대로 현모가 되었다.

문학가, 화가, 서예가로 이름을 알리던  신사임당은 1551년, 47세로 생을 마쳤다.

 

 

2007년 한국은행이 "백범은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으로서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다"며

 5만원권 도안 인물로 선정 했을 때 여성주의자들이 집단 반대운동을 벌렸다.

 

"기존 남성중심 사회의 구미에 맞았던 인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내세워선 안 된다.

새 화폐에 들어갈 여성으론 유관순이 가장 합당하다."/호주제 폐지 시민모임 고은광순 대표

 

"남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심하게는 조작되고, 은폐되었던 역사를 이제 여성의 시각으로 보겠다.

재 조명해야할 여성상의 모델로 허난설헌이 적합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생각입니다." 여성운동가 / 김신명숙 

그녀들이 반대하는  핵심 입장은

훌륭한 현모양처와 예술적 재능까지 성공적으로 펼친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신사임당이 화폐인물로 선정될 경우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전형적 이중 노동구조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사임당이 남성중심의 봉건주의 속에서 여성 인물로 우뚝 자리 잡은 데는  율곡이 쓴 `어머니의 일대기'(先行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의 행장은 쓴 적이 없지만, 어머니 사임당에 대해서는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행장을 썼을 뿐 아니라  모친상을 당한 직후 금강산에 들어가 칩거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 중기에도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재혼 하거나 불륜행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므로  양반 사대부가의 여식들에게  율곡 이를 기른 훌륭한 어머니로 숭배되었고 모범 사례로 훈육되었다.

 

 

고대의 여류 예술가들이 기녀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  여염집의 부인이 집안 일 대신 예술적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임당의 친정 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처가살이할 사윗감을 골랐다.

청상과부로 자녀 양육에 힘을 쏱아 열녀비를 세운 외할머니와 무남독녀로  친정살이를 한  어머니 이씨를 보아 온 사임당에게도 친정살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율곡의 <어머니 일대기>에  드러나는 사임당은 가부장제사회에 부합하는 양처는 아니었다.

학문이나 재능이나 의지면에서 성에 차지 않았던  남편 이원수에게 순종하기 보다는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다”고 하였다.


 

사임당은 남편의 과거시험을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공부하기 좋은 명산을 알아내 남편을 보냈다.

의지가  약하고 결단력 없는  남편이  집으로 되돌아오자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이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편은 3년만에 학문을 단념하고 말았다.  

음서(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지위가 높은 관리의 자손을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리로 채용)로 관직을 얻은 남편은

 한성과 파주 본가와 강릉 처가를 오가는 동안  주막집 여인 권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신사임당 사후에는  안방으로 맞아들였다.

 

 

 

 

사임당은  자식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머니였지만 남편에게는 버거운 아내였다.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꼽히던 그시대에, 병약한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한 사임당은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외도와 재혼을 강력히 거부했다.

사임당이 병중일 때 외조부의 사당에 가서 기도했다는 율곡의 일화로 미루어볼 때  사임당의 자녀들 또한 부계보다는

모계에 더 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라는 전통적 여성상 보다 독립적이고 진보적이며 강한 자의식을 가진 여성에 가깝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산 첩첩 싸인 내 고향 천리이지만

                      꿈과 생시 오직 돌아가고픈 마음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 스치는 한가닥 바람

                      갈매기 떼는 모래밭에 모이고 흩어지고

                      바닷가에 고깃배 동시에 오락가락

                      어느때나 고향길 다시 돌아가

                      색동옷 갈아입고 바느질 할까

 

사임당은 7남매를 기르면서 딸아들 차별 않고 글과 그림을 가르키며 인성과 감성을 길러냈다.

" 그림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그릴수 없는 것이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

곤충이든 식물이든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그림으로 표현해도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려야 한다."

 

 

 

  400여 년 전 그림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14살 소녀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 저자의 정밀한 조사와 세련된 문장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라비니아 폰타나 (1552-1614)

최초의  여성화가인 그녀가 집중했던 분야는 ‘아름다운 초상화’였는데, 르네상스 미술계를 풍미했던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화가 프로스페로 폰타나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남자 제자들을 배제시킨 가운데  직접 딸을 지도했다.

아버지의 열정 덕분에 라비니아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차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림 뿐 아니라 조각과 주조법, 고대의 조각품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25세 때 부인들 취향의 그림을 그려 격렬한 비평을 받아왔음에도  비중 있는 작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남성 작가들이 미처 표현할 수 없는 꿈같이 감미로운 풍경을 배경의 모티브로 삼을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그때문에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던 당대 미술계에서 라비아니는 남성 화가들과 자유롭게 경쟁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라비아니 폰타나의 남편은 아버지의 제자였다.  이들은 몬타나의 화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 서약서를 주고받았는데, 

'폰타나가 예술적인 재능을 위해 결혼 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 할 것을  시댁 가족들이 책임지고 후원할 것이며,

독립한 후 제작한 작품에 대한 소득은 지참금으로 간주한다.’고 쓰여 있다.
결혼 후, 라비아니는  8년 동안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결과  ‘역사화가’로 평가 받게 된다.

열한 명의 아이를 출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유모들과 하녀가 육아를 도와주었지만 화실을 운영하면서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볼로냐의 부잣집에 대모를 찾아 아이들을 보냈다. 그 결과 그녀는 상류 사회의 총애를 받는 화가가 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동시대였던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존재 가치는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었던 듯하다. 

자신의 능력과 사회적 위치를 물려줄 아들만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자의 인생은 조선이나 중세 유럽이나 다르지 않았다.

바느질과 음식 등 신부수업을 받고  평판 좋은 신랑감 만나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그 당시 여성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이미 오랜 전통과 학습에 의해 여자는 아버지의  귀여운 인형이었다가 남편의 사랑스런 인형이 되는 삶을 순종했다.

오랜 인습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 여자 남자 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사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용기에 달려있었다.

폰타나가 남성작가들에 맞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남성 작가들이 미처 표현할 수 없는 꿈같이 감미로운 풍경을 배경의 모티브로 삼을 줄 알았던 "  여성성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옷을 지어 입히고 집안을 정리정돈하는 일은 여성성에서 우러나온  즐거운 노동이다.

현모양처가 ,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전형적 이중 노동구조를 정당화할 우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성향이 강한 여성은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반면 집안 일에는 무관심하기  마련이고

반대로 여성 성향이 강한 남성은 전쟁터 같은 사회생활보다  집안 일에 유능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여성의 일  남성의 일  구분하지 말고  자신의 성향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구태여 여성주의니 여성운동가가 나서서 목소리 높일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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