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고속버스를 타야해서 전날 밤 도시락을 싸두었다.
나이들면 밥심으로 산다는데 ,지난 번 김제갈 때 KTX 도시락은 형편없이 부실했다. 만원에 중간 마진이 엄청나게 붙었나 보다.
차안에서 따끈한 생강차와 과일 곁들여 든든하게 먹어두었다.
군산 늘푸른 도서관은 보건소를 리모델링 했다는데 아파트 주거지역에 있어 접근성도 좋다.
집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프레미엄이다. 도서관이 육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 젊은 엄마들이 모르는게 탈이지만.
오전 10시반 강연이라 관심있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참여 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모이를 먹는다고 했다.
무엇에건 부지런한 사람은 앋는 게 많다. 귀차니스트들은 게으름 떠느라 항상 사후 약방문이다.
나중에 소문 듣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점심은 청국장 정식. 집에서는 좋아하는 청국장도 인형에 냄새 벨까봐 삼가는 편이라 맛나게 먹었다.
채만식 문학관을 찾아가겠다 했더니 금강 하구 외곽에 있어교통편이 좋지 않다고 정숙경 쌤이 가이드로 나섰다.
채만식 1902~ 1950 (향년 47세) |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1914년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재학중에 은선흥과 결혼했으며,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했다.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취직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사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그뒤 개성·안양 , 고향 등 떠돌며 창작에 전념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8·15해방이후 이리시 고현에 있던 작은 형의 집에 기거하다가, 폐결핵이 악화되어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에도 창작의욕은 대단하여 이때 많은 작품을 썼다.
1950년 폐결핵으로 죽기전까지 일제강점기의 불안한 사회를 배경으로 지식인의 불우한 삶을 풍자한 소설과 희곡을 썼다.
중절모에 모직코트를 차려입은 핸썸한 외모 때문에 '불란서 백작'으로 불렸다지만 무척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나는 중학생 때 아버지의 한국문학전집을 읽었다.
우리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대가들을 어린 나이에 만난 셈인데 그중에도 유독 마음에 와닿는 문인들이 있었다.
채만식도 그 중 한 분이다.
1936년부터는 기자직을 버리고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농촌의 현실을 그린 《보리방아》가 검열로 인해 연재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이후 대표작인 중편 《태평천하》(1938)와 장편 《탁류》(1938)를 발표했다. 역설적인 풍자 기법이 돋보이는 〈태평천하〉와 1930년대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바라보는 냉소적 시선에 통속성이 가미된 《탁류》 이후, 《매일신보》에 연재한 《금의 정열》(1939)는 완전한 통속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발표한 《아름다운 새벽》(1942), 《여인전기》(1945)는 친일 소설이다. 타계하기 전까지 소설과 희곡, 평론, 수필 등 200여편이 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풍자문학의 진수로 알려진 그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교묘하게 포장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썼다.
태평양 전쟁후 일제가 노골적으로 탄압을 시작하자 <탁류>3판의 출판이 금지되고 그도 풍자글을 쓰느 작가로 연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나의 꽃과 병정>을 시작으로 친일성향의 글을 썼다.
광복 후 자전적 성격의 단편 〈민족의 죄인〉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변명했으며 이 때문에 자신의 친일 행적을 최초로 인정한 작가로 불린다.
한국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11일, 49세 나이로 노후성 폐결핵으로 병사했다.
묘소는 임피면 축산리 계남마을에 있으며, 문학비는 현재 군산시 월명공원 안에 세워져 있다.
철길마을 경암동.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동요를 떠올리게 하는 좁은 골목.
빨래가 널린 빨랫줄 윌로 올망졸망 화분들이 해바라기 하는 남루한 집.어린시절로 돌아 온 듯 정겹다.
철로 변에 심어 놓은 무우밭의 무청이 새파랗게 실하다. 어린 시절 손톱으로 무청을 벗겨 베어 먹었었다.
"무가 왜 지리고 매운지 알어? 맨 처음에 무우씨를 몰래 들여 온 사람이 똥구멍에 찡겨 들여 와서 그렇댜.
무우라는 이름도 무소 씨 이름을 따서 지었거든."
어릴 때 외할아버지 한테 들은 이야기는 무우를 볼 때 마다 생각난다.
<제 18은행>은 근대 미술관이 되었다. <필름의추억>이라는 사진전이 열렸는데 사진속의 인물들이 한 동안 내 발길을 붙잡았다.
1960년대 경암동 철길마을 풍경.
그 시절 아이들은 철길에서 자랐다.
철길에 못을 올려 놓아 납작해지면 그것으로 연장을 만들고 기차 안의 사람들을 향해 주먹감자를 날리기도 ''
그 시절엔 부모님은 돈벌이에 나서고 아이들이 아이를 키웠다.
내 등허리에서도 남 동생 넷이 컷다.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계집애가 딱 내 모습같다.
'맏딸은 살림 맡천'이라는 말이 저래서 생겼을 테지.
1920년대 군산의 내항에 지어진 일본 은행과 세관 창고 ,적산가옥들은 근대건축물의 귀중한 역사관이 되었다.
방송의 위력은 대단하다. <1박2일>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십대와 이십대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어쨋거나 친일잔재 어쩌고 하면서 싹 쓸어 버리지 않고 활용하는 사업은 잘 한 일이다.
각 지자체마다 개성없이 유행처럼 따라하는게 꼴 불견이긴 하지만.
통영에서 시작한 벽화마을은 전국에 퍼져서 담장마다 페인트 칠이다. 못 말릴 따라하기 유행병,
군산 근대 역사박물관.
아쉽게도 관람시간을 놓쳤다.
옛 조선 세관
1908년에 지어져 1920년대까지 세관 건물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군산의 1백년 역사를 알려주는 사진과 물품을 전시한다.
관람시간이 지나 겉모습만 감상한 꼴. <이영춘 가옥>과 함께 다음을 기약 할 수 밖에.
대한제국이 벨기에로부터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해다 지었다고 한다.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물로 손 꼽힌다.
적벽돌과 하늘빛 나무문이 묘하게 어울린다. 고기비늘 같은 동판지붕을 얹은 건물은 단아한 기품을 지녔다.
세월이 지나고 유행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잘 보존되기를 .......
이성당.
일본인이 운영하던 화과자점을 해방직후 인수하여 이성당 간판을 달았다.
단팥빵과 야채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빵을 사기 위해 줄서서 시간을 죽일 만큼 빵을 좋아하지 않기에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건축 재생관 1동. 시대형 숙박체험관 5동 ,근대역사 교육관 3동 ,근린생활시설 12동 으로 구성된 게스트 하우스 <고우당>
가족과 함께 여행 온 아이의 즐거운 발걸음이 이어지는 좁은 골목
개스트 하우스 <고우당>은 일제가 쌀수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집단으로 거주하던 공간을 나라 잃은 시대의 아픔을 되새기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군산의 구도심에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역과 한국인들의 토막집 사이에 콩나물고개가 있었단다.
일본인 히로쓰 가옥
군산에서 큰 포목점을 운영하여 돈을 번 히로쓰가 일본 무사들의집 야시키 형식을 빌어 지은 집
장군의 아들 하야시의 집으로 타짜 백윤식이 도박기술을 가르치는 집으로 등장한 이 집은 현존하는 일본식 가옥 중에 가장 뛰어난 건물이라고.
일본 붙박이장 '오시이레' 손님을 맞는 ' 도코노마"등 전통 가옥의 모습을 엿볼 수있다.
도코노마
도코노마는 그림이나 꽂꽂이를 감상하기 위해 다다미방 벽면에 만들어둔 공간을 말한다. 방바닥을 약간 높여 벽에 족자를 걸고, 그 앞에 화병이나 장식품을 올려 두었다.
오시이레
다타미 방의 한 면에는 보통 붙박이 벽장이 있다. 깊이가 90cm, 폭은 방의 크기에 따라서 90cm, 180cm, 270cm로 되어 있다. 미닫이문으로 되어서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으며 문은 종이로 발랐다. 열어 보면 내부가 위아래의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위칸에는 요와 이 불, 아래 칸에는 방석이나 잡동사니를 넣는다.
부쓰단
일반가정에서 불상이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반가정에 반드시 부쓰단이 있었다. 옷장이 당연히 있는 가구인것처럼 부쓰단 역시 당연히 존재하는 가구의 하나였다. 하지만 일본도 집값의 상승, 신앙심과 조상경배사상의 상실로 인해 부쓰단이 있는 가정은 격감했다.
고타쓰
고타쓰는 일본의 유일한 난방도구라 할 수 있다. 낮은 책상 같이 생긴 곳에 적외선 등을 달고 이불을 덮은 뒤 이불위에 또 윗판을 덮고 그 아래에 발을 넣어 몸을 덥히는 도구이다. 고타쓰는 식구들이 둘러 앉아 식탁이나 책상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동의 생활공간이라 할 수 있다.
동국사 가는 길
골목 안에 낡은 기와집이 있었는데 팔작지붕을 한 것이 일본가옥인듯
<동국사>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
우리나라 사찰과 분위기가 다르다. 흑백의 대비로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인 고은이 삭발을 하고 불교에 입문한 사찰로 알려졌다.
범종루 앞에 앉아 다리쉼을 하며 대웅전 뒤편의 무성한 일본 대나무를 바라 보았다.
세월을 따라 시대도 사람도 유행도 흘러가건만 초목은 저리도 변함없이 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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