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서쪽, 서촌은 조선시대부터 수많은 문학·예술인을 배출한 '예술 1번지'였다.
서예와 가야금에 능한 '풍류 왕자' 안평대군,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 명필가이자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 를 비롯, 인왕산 기슭에 중인 출신 지식인들이 모여 살았다.
이들은 경치가 수려한 골짜기에 서재를 만들고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18세기 '위항문학'(중인계층이 창작된한 시조, 가사 산문을 일컫는다)의 대표 주자였던 장혼, 김낙서, 왕태 .
일제강점기 이상과 윤동주, 서정주, 이중섭, 이상범, 박노수 등이 이곳을 기반으로 예술 활동을 했다.
이 곳에 역관과 의관, 예술에 특별한 재주를 지닌 중인 계급이 모여 살았다
이항복 집터 , 윤동주 하숙집 이중섭 집터, 안평대군 집터 , 박노수 가옥, 세종대왕 나신곳, 추사 김정희 집터 ,윤덕영 집터, 이완용 저택 (관광 안내서에 표시 안 됨) .홍건익 가옥, 신익희 가옥 이광수 집터
경복궁 3번 출구- 영추문방향 8분 -보안 여관 -8분- 세종대왕 생가터 - 4분 이상의 집 -노천명 가옥 -2분 - 이상범 가옥 화실 (천경자 집터) -박노수 가옥 화가 -2분 - 윤동주 하숙잡 - 이중섭 집 -3분 - 수성동 계곡 기린교 ( 안평대군 집터) 송강 정철의 집터(청운 초등)겸재정선 집터 (경복 고등학교) , - 윤덕영 가옥 - 이완용 저택 - 통인시장 - 경복궁역
4월 27일 토요일 12시경 청량리역에 내려 동대문 시장 들러 바느질 재료 구입하고 경복궁 역에 2시 경에 닿았다.
아름이를 만나 삼계탕과 갈비탕으로 늦은 점심 해결하고 골목 투어 시작
골목 안에서 작은서점 발견. 반갑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
가진 것 없던 시절에도 도둑이 많아 저렇게 무지막지 방범을 했었다.
보안여관
1930년대 ‘보안여관’은 시인 서정주가 머물며 소설가 김동리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시인부락’ 을 만든 곳이다. 광복 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등 예술인들이 장기 투숙하는 곳으로 문학인들의 교류의 현장이었다. 당시 종로에 출판사가 많았던 까닭 .
당시엔 화장실 욕실은 복도에 있어 공동으로 쓰고 방안엔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 뿐,
남장네 두 사람이 누우면 방이 꽉 차는 구조.
군사독재시절 청와대 직원들과 경호원 가족이 머무는 곳으로 이용됐다가.
2006년 여관 폐업 후에는 리모델링을 통해 ‘예술이 쉬어가는 문화숙박업소’로 이름을 바꿔 운영
이상의 집
이상은 3살 때 몰락한 양반인 큰 아버지집으로 입양되어 유교적인 가치관과 한문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큰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받은 구박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풀었고,
이상을 입양 후 아들이 태어나자 이상을 대놓고 무시 했다한다
백부가 죽자 이상은 친가로 돌아오게 된다.
친부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전직 이발사였는데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친부가족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회사를 그만둔 이상은 요양차 온천에 갔다가 기생 '금홍'과 알게 된다.
요양에서 돌아온 이상은 다방 <제비>를 차리고 금홍을 마담자리에 앉힌 후 동거를 한다.
다방은 잘 되지 않았고 금홍은 몇 번의 가출 끝에 이상의 집을 완전히 나가버리고 <제비>는 폐업한다
오죽했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냐고 하소연했을 정도. 결국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가게 된다.
"우리 같이 죽을 까 어디 먼데 갈까"라는 고백으로 이화여대 영문과 변동림에게 고백한 이상
변동림은 집을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3개월 만에 이상은 동경으로 떠났고 ,
사상 혐의로 한 달 정도 조사를 받다 폐결핵 악화로 출감한 뒤 사망. 28세를 일기로
박태원은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 했다.
사별이후 변동림은 딸 셋을 둔 이혼남 화가 김환기를 소개 받는다.
변동림의 부모는 개가를 반대 했지만 "사랑은 믿음이고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 "하고 재혼.
재혼을 반대한 부의 성을 버리고 남편 성을 따서 김향안으로 개명했다.
그녀는 예술가의 아내로만 산 것이 아니라 파리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파리와 뉴욕에서 살며><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등 수필집을 발간했다.
개인전을 여는 등 예술가로 산 김향안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다 뉴욕 자택에서 89세로 생을 마감.
노천명 가옥
시인 소설가 기자 로 활동한 친일 반민족 주의자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할 때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사슴>발표.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승전하는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등 다수의 친일 작품발표했다. 월북 작가인 임화, 김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 대회' 행사에 참여 .유엔군 서울 수복 뒤 부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 받자,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하던 시인 김광섭에게 "거기 있으면서 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나를 구하라"는 명령투의 편지를 보냈다. 여러 문인이 구명운동을 벌여 6개월간 투옥한 뒤 1951년 4월 석방됐다.
노천명의 집은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그는 내성적인데다 꺼칠한 성격으로 가까이 지내는 문우가 없었다 한다.
이봉구가 익명으로 쓴 부역 문인 비난 글을 조연현이 썼다고 오해한 노천명이 조연현에게 욕설을 퍼붓자 조연현이 따귀를 때린 일로 고소 한 일 등 .물의를 많이 일으켰다.
건강 악화로 뇌빈혈로 입원했으나 입원비 마련이 어려웠다. 동료 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치료비를 내주려 하자 그는 내가 거지인줄 아느냐며 거절 했다.
1957년 길에서 쓰러져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누하동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출국하는 모윤숙을 공항까지 배웅하고 온 다음날 세상을 떴다.
청전 이상범 가옥, 화실
1897-1972
김은호와 동양화 분야의 토대를 닦은 거장이다.
담장 벽화는 이웃에 사는 천경자 화백이 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웃해 있는 3채의 집을 연결해서 사용.
1950년대 중반 (붓을 옆으로 뉘어 그은 뒤 끝에 가서 직각으로 짧게 그어 마무리하는 기법)'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기법)을
혼합해 바위와 언덕의 질감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자신만의 기법을 개발했다
- 박노수 가옥
- 18살 때 청전 이상범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서울대 미술학부 회화과에 입학해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1세대 작가
-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1886-1965) 의 집을 찾은 박 화백에게 '고예독왕'할 것을 조언했다.
작가는 반드시 개성적인 표현의 길을 개척하고 매진하는 것이 중요하며 외롭게 홀로 가는 작가의 길은 험하고 고독하다는 의미의 이 말은 박 화백의 화두가 됐다고.
박 화백은 선명하고 투명한 색채와 대담한 구도, 여백의 미를 통해 한국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린 작가로 꼽힌다.박노수 미술관(종로구 옥인1길 34)으로 박노수(1927∼2013) 화백이 40년간 살았던 집이자 작업실이다.
종로구는 2013년 박 화백이 기증한 집과 작품 집기 등으로 미술관을 개관했다
친일파 윤덕영(마지막 왕비 순정효 황후의 큰아버지. 친일파) 이 1937년경 딸에게 지어줬다는 이 집은 당시에는 최고급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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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여의륜'(만사가 뜻대로 돌아간다)편액에 걸린 현관.
실내 촬영은 금지. 미술관 자료 사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주방과도 연결이 되는 통로, 이층에서 뒷뜰을 내려다 볼 수있는 작은 휴식 공간 등
요모조모 쓸모있는 공간이 있는 설계. 우리 나라 1세대 건 축가 작품
서양풍 ,일본 풍 중국풍의 건축 스타일을 볼 수 있다
수석과 석조물들이 뒷뜰 돌계단을 오르면 송석원 터.
윤덕영은 이 일대 2만여평에 아방궁을 짓고 일가를 이뤄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첩실이 살던 집과 박노수 가옥만 남아 있다 )
이 집 언덕 너머로 송석원 (벽수산장)이 웅장하게 서있었다 한다.
친일과 매국으로 윤덕영은 6백여평 프랑스풍 대저택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로멘티스트 이중섭(1916- 1956)
담배곽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생활이 곤궁해서 1952년 부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갔다.
부두노동으로 번 돈으로 선원증을 마련해 처갓집을 방문하여 1주일간 체류 한뒤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에 시달렸다.
1955년 친구들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백화점에서 열었으나 수금이 안되어 수고비 정도 벌었다고. 이 일로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 그는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된다 . 다음 해 41세 세상을 떠났다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추모 음반 《그 사내 이중섭》 발매
나의 가장 높고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나만의 오직 한 사람, 현처 남덕 군.
건강하오?
내 가슴은 그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오.지주 집안 부잣집 도련님답게 당신은 마음 넉넉한 이었어요. 낭만 넘치는 괴짜이기도 했지요.
유학 시절 이노카시라 공원 근처 살 때 하숙방 한가운데에 난을 두고 키웠던 기억이 나네요.
온갖 화구 뒤죽박죽 뒹구는 좁은 방에서 당시로선 고가 식물이었던 난초를 고이 키웠어요.
망중한의 풍류를 아는 멋쟁이였어요. 소설은 싫다 했지만 시는 좋아했지요.
문학소녀였던 내게 보들레르, 릴케 시를 멋들어지게 써서 편지 보내곤 했지요.
당신은 내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며 '남덕(南德)'이란 이름을 붙여줬지요.시댁 식구 모두 살뜰히 날 챙겨줬고, 이웃 살던 김안라(가수 김정구 누나)씨가 말동무 해주었지요.
하늘이 우리의 행복을 시샘했을까요. 전쟁이란 불청객이 찾아왔지요.
6·25 터지고 그해 12월 미군 물자 수송선 타고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란 갔어요. 당신은 화구부터 챙겼지요. 그게 마지막 배였다지요? 그 배를 못 탔다면 '한국의 이중섭'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듬해 1월 부산에서 다시 서귀포로 옮겼지요. 우리가 도착한 날, 눈 귀한 제주에 함박눈이 쏟아졌어요.
아고리는 태현이 손잡고, 나는 태성이 업고 걷고 또 걸었어요.
배급받은 식량 바닥나면 농가 기웃거리고 마구간에서도 잤어요.
"우리 예수님 같네. 허허."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아고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부부
당신과의 결혼, 후회하지 않느냐고. 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생이 달라졌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아고리, 나는 우리의 사랑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우리는 운명이니까.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수금이 안되 외상술값 금전압박, 외로움, 영양실조로 심신이 지친 그는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되 정신분열과 간 손상으로 다음해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발견. 41세로 생을 마감
윤동주 하숙집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도시샤 대학 재학 중,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가 출간되었다
용정에 살 때 다녔던 용정 중학교 윤동주 기념관에는 자료들이 잘 구비 되어 있었다.
교토 도시샤 대학에도 시비가 있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1938년 입학한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 생활하다 졸업 할 즈음 이곳으로 와서,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 훗날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정병욱과 하숙을 시작.
10개월 여 지내는 동안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대표적인 시 탄생다.
수성동 계곡은 다음에 날 잡아서 ........
18세기 '위항문학'(중인계층이 창작된한 시조, 가사 산문을 일컫는다)의 대표 주자였던 장혼, 김낙서, 왕태 등
중인 출신 지식인들은 경치가 수려한 인왕산 골짜기에 모여 살았 다.
이들은 높은 산에 올라 꽃구경하기, 성루에 올라 초파일 들불 구경하기, 달구경하며 다리 밟기, 시냇가에서 갓끈 씻기 , 국화 핀 뜨락에서 단란한 모임, 눈오는 날 화롯가에서 술 제우기 등 철마다 시회를 열고 풍류를 즐겼다.
한옥체험장소 ‘상촌재에서는 각종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데 이곳 뒷문 앞집이,
매국노 이완용 가옥. (미스터 션샤인을 떠올리면서 그의 비열한 짓거리들을 떠올렸다 .드라마에서 보다 더 사리사욕을 채운 나뿐 X 인 걸 짐작
마침 옆 집 노부부가 화단을 가꾸고 계시기에 넌즈시 물었다.
"저 집엔 누가 살아요?"
"후손이 살죠. 골프장이 다섯 개고, 호텔도 가지고 있어요. 앞 건물이 주차장인데 그걸 팔고 지금 주차장 짓는 공사 중이요."
나랏돈 꿀꺽 해서 자자손손 부의 세습.
미군정때는 미헌병대장 베어드대령과 김수임이 살았다.
온 나라가 떠들썩 했던 , 당시 어린 나도 어른들 가십거리에 귀동냥 했던 이야기.
김수임과 이강국
가난한 집 태생 김수임은 11살에 민며느리 살이를 하다가 고된 시집살이에 뛰쳐나와 선교사 양딸이 되었다.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 미군정청 직원, 주한미국대사관 통역 등을 지냈다,
단짝 모윤숙 소개로 독일에서 공부한 엘리트 이강국을 알게 되어 동거.
이강국이 월북한 뒤 존 베어드와 동거 기간 동안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각종 기밀을 이강국과 남로당에 제공하였다가 1950년 4월 수사기관에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간첩이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1950년 6월. 39세 김수임이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됐다. 언론은 '여간첩'이라고 했다.
김수임은 미군 존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49년 '미군 철수계획'을 북측에 넘기고 애인 이강국을 월북시킨 혐의로 처형당했다.
58년 뒤 2008년 AP통신은 "비밀 해제된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기록에 따르면 김수임 사건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봉인해제 기록에 따르면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없고 이강국이 CIA 비밀조직에 고용됐다는 기록도 나왔다. 이강국은 북한에서 '미국 간첩'이라며 처형당했다.
미 기밀 문서는 김수임의 아들인 김원일 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신학) 교수의 노력으로 밝혀졌다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 짚차로 이강국을 월북시킨 간첩 죄로 체포 된다. ( 베어드 대령의 집은 치외 법권이라 모윤숙집으로 김수임을 꼬여 내 체포)
북한에서 간첩 혐의로 처형당한 이강국과의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에는 극적인 요소가 풍부했고 반공주의 고취에 좋은 소재로 영화 《나는 속았다》《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연극 《나, 김수임》 드라마 《서울 1945》등 여러 창작물에서 그의 삶이 다루어졌다.
낙랑 클럽에 소속되었던 김수임 (한국판 마타하리 사건 ) 변호를 목적으로 전숙희가 쓴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낙랑클럽은 매춘 단체에 가깝게 묘사된다.
김수임 사건으로 이 단체를 조사한 미군 조사 보고서에도 낙랑 클럽을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했다.
노천명 , 김수임의 친구 모윤숙 의 삶,
이광수의 소개로 안호상(초대 문교부 장관)과 결혼 후 딸을 낳고 이혼
1948년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던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 메논과 교제하면서 이승만 지지로 회유시켰다.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 선거는 없었을 것이며,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없는 사실이다."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 매리언 모였다."
이후 "건국의 아버지는 크리슈나 메논이고, 건국의 어머니는 모윤숙이다"라는 비웃음이 세간에 퍼졌다.
이승만의 지시로 만든 낙랑 클럽 김활한 총재 모윤숙이 회장을 맡음(영어 능통한 이화여전 출신 100명여성들 모임) .
통인시장엔 먹거리들이 많아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나는 맛 집에 줄서서 귀한 시간 허비하는 걸 싫어하는 지라 과일 착즙주스와 씨앗 호떡을 사들고 정자에 앉아 다리쉼.
경복궁역 가는 길에 만난 대오서점 . 운영이 어려워 카페가 되었다.
역 근처 카페서 언 몸 녹이고 아름이와 헤어져 승환이 집으로 갔다.
다음날 시부모님 산소 벌초 행사가 있기 때문.
시아주버님은 성경 강독 대신 인터넷에서 서치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있고 어머니는 술집에서 일하는 초등 5학년의 생활글이었는데 임대료를 못 내 길바닥에 나앉게 될 형편이었다.
심사를 한 동화 작가 할아버지가 어렵게 수소문해서 아이 집을 찾아와 주고 간 동화 책 속에 수표가 들어 있었다고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져 아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
늘 범사에 감사하라느 말씀을 일깨워 주신다.
가족 모임 때마다 좋은 말씀을 들려 주시는 아주버님 뵐 때마다 친정 아버지 생각이 간절.
아린이 하는 짓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시누님.
아린이는 식구들이 찬송을 하자 어리 둥절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살펴 보는 중.
삼촌이 찍은 사진을 뚫어져라 보는 귀염이 아린이는 온 가족 사랑을 독차지.
1박 2일의 발품을 끝내고 귀가 했으니 호미들과 삽 들고 정원사 일이 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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