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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김향이의 블로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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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추억

1-1 내 마음의 풍경화 우붓

멀리 가는 향기 2019. 7. 10. 10:25
내 마음의 풍경화 우붓 2006.6
 




이십 대부터 나는 아무 때고 훌쩍, 혼자 길 떠나는 것을 동경해왔다. 오십 중반에 이르러서도 그 바람은 여전히 희망사항이지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처럼 내게 보상 휴가를 주고 싶었다. 내 몸과 마음이 더 망가지기 전에.

두어 달 전부터 여행 가방을 싸놓고 호시탐탐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훌쩍 떠날 수없는 이유들은 많았다. 마무리 못한 작업과 강의 일정표. 그리고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친정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에 대한 죄스러움....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한약을 먹고 침을 맞아도 내 몸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리하게 전시회 준비를 하느라 몸을 혹사 시킨 탓이었다. 남편도 갱년기 증상을 앓느라 절인 배추 같이 숨죽어 지내는 것도 안쓰러웠다. 나는 두 눈 질근 감고 떠나기로 했다. 여행목적은 결혼 29주년 기념 여행이었다.


행선지를 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누가 내게 살아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언덕과 발리의 우붓을 두고 저울질하다가 서슴없이 우붓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해왔으니까.
5년 전 처음 발리 여행을 했을 때 우붓 예술인 거리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어 내 가슴 속에 걸렸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도 우붓의 풍물들을 비디오에 담아 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남편에게 딱 한 달만이라도 우붓에서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드디어 마침내 그토록 그리던 발리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덴파샤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 열대의 꽃과 나무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면서 눈이 즐겁다. 차창 너머로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건물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힌두사원(푸라)과 마을회관(반자르)들이다. 이른 아침에는 차낭을 이고 사원으로 향하는 여인들의 행렬을 보기도 하고, 금요일에는 성지 순례를 하는 마을사람들의 긴 행렬을 만날 수 있다.


발리 사람들의 일상은 매일 아침 신에게 공물(차낭)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될 만큼 종교와 밀착되어있다. 마을 입구, 민가, 상점, 호텔, 곳곳에 바쳐진 차낭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바나나 잎으로 만든 작은 상자에 꽃과 떡 과자나 돈을 담아 신께 공물로 바친 다음,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비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자신보다는 가족을 더 위하는 발리 사람들의 종교 의식이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먹고사는 것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는다. 빈부의 차이 또한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삼모작하는 쌀과 채소 일 년 내내 열매 맺는 과일 덕분에 남의 것을 탐할 줄도 모른다. 윤회사상을 믿는 그들은 다음 생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현세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 사는 동안 자신의 영육을 순결하게 가꾸며 타인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유럽을 여행 할 때처럼 가이드에게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당부도 밤늦게 호텔 밖 외출을 삼가 하라는 부탁도 들을 일이 없다.

갈대 지붕을 인 여염집들은 우리의 초가집을 연상케 한다. 대문 앞에 세워 놓은 벤조르는 우리네 솟대 의식과 닮았다. 벤조르가 깃발처럼 살랑거리는 마을길을 달릴 때면 명절을 맞은 아이처럼 흥겨워진다. 담장과 길가에 얼크러져 핀 붕아 끄레따스 꽃은 또 얼마나 화려한지. 검은 화산재로 만든 석재 조각들과 잘 어울린다.
발리 사람들은 부지런하다. 새벽 5시면 일어나서 7 시에 출근을 하고 3-4시면 퇴근을 한다. 집에 와서 수공예제품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투잡족이 많다. 어려서부터 부모들의 일을 보고 배운 탓도 있겠지만 손재주와 눈썰미를 타고난 것 같다.

관광 코스를 돌다보면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아이들의 표정이 참으로 해맑다. 7시에 등교해서 12시 30분에 하교를 하는데 그 중 1시간 반이 쉬는 시간 이라니 그 아이들에게 입시 스트레스는 없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나보란 듯이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없으니, 학교 끝나고 이 학원 저 학원 쫓기듯 돌아칠 일도 없다. 그야말로 安貧樂道.


여행 이튿날 거북섬 관광을 하고 해변에서 해양스포츠를 즐겼다.

 




그날 밤 남편이 발리에 정착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가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 양반이 풀 빌라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풀 빌라가 뭔지 몰랐다. 호텔보다 작은 규모의 빌라겠거니 여길 정도였다.


 


우리는 한 사장님이 운영하는 드림랜드로 숙소를 옮겼다. 남편명패가 붙은 빌라로 안내 되고서야 나는 함께 패키지여행을 온 아가씨들이 좋겠다는 말을 연발하던 까닭을 알게 되었다. 융단 같은 잔디마당에 들어서니 대리석으로 꾸며놓은 풀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 한쪽에 원두막이 있고 탁자 위에 도르르 말아 놓은 새하얀 타월수건에는 깜보자꽃 장식이 돋보였다.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신혼부부를 위한 로 맨틱한 공간이 연출되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뜻밖에 앙코르 신혼여행을 즐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장을 풀자마자 스파로 안내되었다.

 

지난 번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발리 스파에 대한 소문을 들은 터여서 아쉬움이 컷는데, 이번에 발리 스파의 진가를 몸소 경험해 보리라 내심 벼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꽃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는 달콤한 상상에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꽃을 띄운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으려니 테라피스트가 두 손으로 발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오일을 바른 손바닥에 적당히 힘을 실어 마사지를 해줄 때는 온 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 했다. 테라피스트의 나긋나긋한 손놀림에 온 몸의 말초신경이 나른하게 풀어지면서 몽환적이고 단조로운 전통음악 가물란의 선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황후가 되었다.



몸을 맡기고 엎드려 있으려니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모든 것 다 내어주고 사신 어머니가 걸렸다. 어머니에게 마사지를 받자고 하면 필경 “돈이 썩었냐!”하실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혼자 웃었다. 허리와 목 디스크로 고생을 하던 내 몸은 호강을 했지만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 종일 손님을 맞다보면 손목과 팔이 얼마나 아플까? 내 몸의 피로를 풀자고 남을 고달프게 한 것 같아 그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



점심을 먹고 우리 부부는 한 사장님의 BMW를 타고 누사두아에서 꾸타- 사누르- 덴파사 거리의 가구점들을 돌아보았다. 엔틱 스타일의 마음에 드는 가구들이 많았지만 운송료가 비싸 엄두도 못 내고 눈요기만 했다. 저녁에는 사장님이 준비한 만찬에 초대 되었다.






무대가 있는 메인 풀 앞에 어린 돼지 바비큐와 색스럽게 장식한 요리들이 차려졌다. 밤바람은 서늘하고 하늘의 별들은 손에 잡힐 듯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술을 즐기지 않는 남편 대신 와인을 한 잔 마셨는데, 온 몸으로 퍼진 술기운이 적당히 나른했다.

 
다음 날 서둘러서 우붓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정 이사님 차를 이용했는데 박찬호를 닮은 젊은 운전기사가 한국어와 영어를 조금씩 알아들어서 어제보다 훨씬 편했다. 누사두아에서 우붓까지는 두 시간 여 거리였다. 발리에는 대중교통 버스가 없다. 그런데도 교통체증이 없다. 위압적인 고층건물이 없고 난삽한 대형 간판도 없는 차창 밖 풍경이 병풍그림처럼 펼쳐진다.(우리나라 건물들을 덕지덕지 도배한 간판들을 싹쓸이로 걷어내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붓의 거리는 걷기에 편안하다. 오랜 세월 묵묵히 자라온 둥치 큰 나무들과 이끼 덮힌 건물들이 예술적인 분위기와 에스닉(eth·nic)한 정취를 만들어 낸다. 이방인의 눈길을 꼼짝 못하게 빨아들이는 매혹적인 골목 풍경이 끊임없이 걷고 싶은 충동을 자아내는 곳이다. 2차선 도로변의 여염집들이 바로 상점이다. 배꼽을 내놓은 아이들이 대문을 들락거리며 뛰어놀고 대나무 평상에 모여 앉아 노닥거리던 상인들이 손님을 맞는데 팔리면 팔고 안 팔리면 그만이라는 듯 여유가 있다.

우리는 승용차를 세워 두고 상점가를 걸어 다니면서 쇼핑을 했다. 골동품 가게에 들러 티모르 산 골동인형도 건지고 헝겊 인형도 샀다. 열대 정글의 나무에 앉아있는 한 쌍의 새 그림도 사고 바틱 제품의 인테리어 장식품들도 샀다. 이곳의 핸드메이드 소품들은 독창적이다. 중국 물건처럼 조악하지도 않고 모사품을 살까봐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진열장 구석에 숨어있던 헝겊 옷을 입혀 놓은 남녀 목각 인형을 발견 했을 때의 기쁨이라니!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그린 얼굴 표정과 꽃과 나비는 수준급이었다. 나는 물건을 살 때마다 무 자르듯 절반으로 자르고 흥정을 했는데 이 인형만큼은 깎지 않았다. 장인의 솜씨를 인정한 탓이었다.
“여보, 다음에 올 때는 우붓에 민박을 하 면서 샅샅이 훑어보자.” 더위를 타서 걷는 게 질색인 남편이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승환이 여기 오면 작품 사진 찍을 것 많겠다. 봐, 봐 보이는 게 다 작품이잖아. ” 나는 양손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사각의 앵글을 만들어 보였다.
“우리 아름이 여기 오면 좋아죽겠지? 겨울 방학 때 오면 함께 올까?” 샌프란시스코에 유학 가있는 딸도 들먹거렸다. 이번 여행에 따라오고 싶어 스케줄 맞추려고 얼마나 애 썼는데.
골목골목 누비고 다니며 구경하느라 점심때가 지난 것도 몰랐다. 우리는 운전기사에게 인도네시아 전통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고추장이나 김치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 나라 음식을 먹어 봐야 그 나라 문화를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발리 음식은 중국음식처럼 느끼하지도 않고 향신료 냄새가 역겹지도 않다. 더운 날씨 탓에 튀긴 음식이 많았는데, 이탈리아 음식처럼 짜거나 맵지도 않아 입에 맞았다. 사람들이 순하니까 음식 맛도 순했다. 음식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성정을 알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우붓에서 돌아왔을 때 캔들 라이팅 디너가 준비되었다. 세상에! 마당의 풀 속에 꽃잎을 띄워 놓고 풀 가장자리에 촛불을 밝혀 놓았다. 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원두막에 둘만의 식사가 준비 되자 우리는 초저녁 하늘의 별들을 증인으로 데리고 오붓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스무 살에 만나 스물일곱에 결혼을 하고 아들 딸 낳고 평탄하게 살아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서로 얼굴 마주 보고 지낸 세월이 35년이나 되었다. 남편과 나는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낸다. 나이가 같기도 하지만 남편이 아내의 일을 인정해주고 말없이 지켜봐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별 탈 없이 같은 쪽 같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늙어갈 것이다. 이 세상 여행 끝내는 날 까지.


 

여행 마지막 날 오전, 페키지로 함께 온 사람들과 합류 했다. 울루와뚜 절벽사원, 우붓 관광 상품점, 해상사원, 면세점관광 등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졌다. 일행 중에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두 팀이 있었다. 무더위에 아이들이 관광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따라다녔다. 문화가 다르고 볼거리가 많으니까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발리는 경관이 아름답고 기후 변화도 적어 영화 촬영을 많이 하고, 신혼 여행지나 가족여행지로 적합하다. 낀따마니 화산지대. 새 공원, 파충류 공원 ,코끼리 공원 원숭이 숲 등,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즐길 곳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폴빌라에 이틀 있는 동안 페키지로 온 사람들은 우붓 계곡에서 레프팅을 하고 짐바란 해변에서 씨푸드를 먹고 선셋크루즈를 타고 원주민 섬에 다녀오고 해양스포츠도 즐겼을 것이다.

자정 무렵에 공항 면세구역에서 탑승구로 이동하는데 우리 일행의 아가씨들이 연예인과 비행기를 함께 탄다고 난리가 났다. 톱스타 J양, 신인배우 k양 톱모델 B양들이 스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을 알아본 한국 사람들이 몰카를 찍고 흘끔거리며 화장 안한 얼굴이 별로라느니, 얼굴이 주먹만 하다느니 부러움과 시샘어린 입방아들을 찧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익명성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 얼굴이 알려진 공인들은 어디에 가든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그녀들 모르게 작품 속의 숱한 인생을 살아보여야 하는 배우로서의 얼굴이 아닌, 인간 본연의 모습을 관찰 했다. 말씨와 태도 몸동작 하나하나로 드러나는 사람 됨됨이 말이다.
화려한 조명이 꺼지면 그네들도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은데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어쩌면 조명발을 받은 무대 위고,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집이 나의 내면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네 삶도 연습무대가 없는 공연장이잖은가.


우리 부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퀭하니 눈이 들어가 계셨다. 어머니 혼자 아버지 병수발 드느라 지치셨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우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신 탓이었다. 발리에 도착하지 마자 집에 전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전화를 안 받으셨다. 할 수 없이 남동생에게 메일을 보내고 어머니에게 안부 전해 달라했는데, 남동생도 낚시를 가서 3일 동안 집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인도네시아 지진 소식을 접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일이 났다고 믿으신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전화 한통 없을 리 없다고. 속이 타서 숯검정이 되신 어머니는 손녀딸이 있는 미국으로 전화를 하고 손자를 시켜 여행사를 수소문하게 하고 ..... 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선놀음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초죽음이 되어 계셨다니!
“에미, 넌 앞으로 여행갈 생각 말아라!” 어머니 불호령이 떨어졌다. “엄마, 아름이 오면 지난번처럼 여인삼대가 여행 떠나자. 응?” 내 응석에 눈 흘기시는 어머니. 오십을 넘기고도 부모님 슬하에 있는 나는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