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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김향이의 블로그 세상

문득 돌아보니 한 순간

여행의 추억

966회 그가 어떤 삶을 살다갔는가?

멀리 가는 향기 2019. 9. 3. 20:31

문학 작품이나 명화를 보고 감동 받을 때  그가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진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그토록 훌륭한 작품을 빚어 냈는지 알고 싶어진다.

창작은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다갔는가?

그가 지향한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소설이나그림을 통해 작가의 면면을 상상해보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동안 그 사람을 가까이서 느껴 보고 싶은 펜심에 발품을 팔아 문학 기행을 시작 했다.

 

 

 

2011년 7월 서유럽기행 (영국.런던. 윈더미어/프랑스 파리/스위스  취리히 마이엔펠트)

 

 나의 롤모델,

베아트릭스 포터가 <피터래빗>의 성공으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힐탑 농장을 구입한 건 1905년이었다. 인근의 토지들이 골프장으로 개발되는 것을 반대해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며 ,4000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게 된다.세상을 떠나기전까지 40년간 농부로 살면서 지역 농업문화를 보존하는데 앞장섰다. 그녀는 자기가 살던  집과 농장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내셔널트러스트  첫 번 째  기증자가 되었다.

 

영국 혹스헤드 워즈워드의 집 
워즈워드 남매가 살았던 집 문을 나와 뒷산으로 오르면 마을의 경관이 내려다보인다. 마을을 휘돌아 강이 흐르는데  강이 얼면  시인은 최신식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을 지쳤다고 한다.마을의 정경을 넉놓고 휘둘러 보느라면 보이는 것이 다 시 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 런던 캔싱턴 공원
스코틀랜드 태생 제임스 매튜 배리(1860~1937)는  『피터 팬』을 쓴 공을 인정 받아 기사 작위를 얻고, 영국 국민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인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런던으로 온 소심한 남자 메튜 배리는 켄싱턴 공원에 산책을 했다.우연히 만난 데이비스 부부의 다섯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작품 구상을 했다.

.

배리는 유년 시절 형의 죽음으로 심한 충격을 받은 데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위해 죽은 형의 옷을 입고 형을 흉내내며 살았다. 

배리는 이런 비극적인 기억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열두 살에 죽어 영원한 소년으로 남은 형과, 성장을 멈춘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는 피터 팬’에 투영시킨것.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그는 자기가 작품 구상을 하던 자리에 피터팬 동상을 세워 어린 독자들에게 깜짝 선물을 했다.그리고  데이비스 부부의 다섯 아이들도 거두었다.

 

 

스우스 마이엔펠트 하이디 박물관  (알름할아버지 농장)

 

알프산 산 자락

경치를 즐기며 산을 오르는 사이 어느덧 <하이디 집>박물관에 닿는다.

 

<하이디> 요한나 쉬피리남편은 변호사였고, 신문 발행인이었으며  시의회 서기로도 활동했다. 자신은 취리히에 사는 문인들과 교류하는 데 열중했다. 이 정도면 남부럽지 않을 만한 위치지만 정작 슈피리는 도시 생활에 찌들어  쇠약해졌고,우울증이 생겼다고 한다.  요양을 위해 찾은 시골마을에서 하이디를 썼다.

 

 

 

나는 알프스를 만난 기운으로 또 다시 바쁜 일상을 견뎌낼 것이고 ,문득 문득 그리워 할 것이다 . 이 순간을  

 

우리가 왕복 9시간의 하이킹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 후득후득 빗발이 뿌리고 선물처럼 무지개가 떴다.

 

이 날의 행복을 평생 잊지말라고.

 

 

프랑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까미유를 만난 모네는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을 한다.

집안의 후원이 끊기자 친구 마지유의 후원으로 여행을 하며 그림을 그린다.

둘째를 임신중이던 까미유가 임신중독으로 죽자.

죽은 아내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빛에 따라 사물의 모습이 변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50살이던 1890년 지베르니의 과수원을 구입하고 정착하게 된다

모네는 일본인 친구의 후원으로 일본 풍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 문화를 신비롭게 여기던 유럽풍조에 편승한 모네도 일본의 서화 작품을 수집하게 된다.

 

 

 모네는 환갑 이후 죽기전까지 300여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중 40여 점이 대작이었다니 그가 얼마나 이 연못을 사랑했는지 알 수있다.

 

 

그는 1920년 43년간 작품활동을 하던 이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2012,8월 일본  동경 치히로 미술관

 

서른 즈음부터  그녀의 그림을 스크랩을 했었다.

그토록 보고싶던 원화를 주마간산으로 훑어 보았으나 더 바랄 게 없다.

주택가에 자리 잡은 미술관은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1-2관이 연결되었다.

전시 공간은 작품 전시실,세계의 그림책 작가 전시실,그림책의 역사 전시실로 구성.

 이외에도 그림책의 방,어린이 방, 테라스 카페,뮤지엄 샵 등이 있다. 전시 내용은 2달 마다 교체 되고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아즈미노 치히로 미술관>으로 가야한다.

아즈미노 미술관은 광활한 공원으로 둘러 싸여 있다고 한다.

치히로 씨의 산장겸 아틀리에와 체코의 그림책 작가 크베타 파초브스키가 디자인한  연못과 돌 조각들이 있다.

 

 

 

동경 치히로 미술관은 치히로 씨가 1952년 부터 세상을 뜨던 1974년까지 작업 하던 자택에,

 팬들의 성원과 기부금, 그리고 작가의 인세를 모아 미술관을 개관 했다.

이로써 세계에서 처음으로  그림책 작가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탄생 한 것이다.

 

그녀는 평생 어린이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모델없이도 10개월 아기와 1살 난 아이를 구별 해서 그릴수 있었다고 한다. 9300여 점의 원화에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탄탄한 데생 실력으로 그려낸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2013년 6월 

오스트리아.비엔나 /헝가리 부다페스트/폴란드.아우스비츠/슬로바키아/체코 프라하/체스키크롬노프/ 독일 로텐브르크

 

76개의 호수가 어우러진 길겐은 짤쯔부르크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다. 볼프강변에 모짜르트의 외가가 있다.

슈베르트가 이곳을 산책하면서 '송어'를 작곡했다고.

 아름다운 호수 이름을 따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라는 이름을 지었다.(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뜻)

 

오스트리아 비엔나  게트라이네가 9번지에서  1756년 1월 모짜르트가 태어났다. 

12세기에 지었다니까 무려 900년이 된 집. 1-2층에 모짜르트 유품을 전시하고  3-4층에 당시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음악성을 인정 받은 그는 당시 유럽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천재성은 왕족과 귀족들에게 외면을 받게 되고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프라하 구시가지 황금소로 (연금술사들이 모여살던 골목)에 프란츠 카프카의 집이 있다.

 

독일계 유태인이던 그가 <변신><소송><성><선고> 등을 쓰면서 일생을 보낸 곳이다.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의 그는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글을 쓰고 싶어했는데,

그의 누이가 마련해준 집이 바로 이곳이다.

그는 일을 마치고 점심때부터 새벽까지 이곳에서 글 쓰기에 열중했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열망했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는 책이 출간 되었을 정도로 가슴에 담아두고 못다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어린시절에 받은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그리 아름답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묘사 되었다.

프라하를 대표하는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무명이었기에  유대인 묘지에  쓸쓸히 묻혀있다.

글쓰는 일에 일생을 바쳤지만 살아있는 동안 인정을 받지 못한 작가.

그는 죽기 전에 친구 막스브로트에게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부탁을 한다.

브로트는 카프카 사후 그의 원고를 모아 출간을 했다. 결국 그는 생을 마친 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보헤미아의진주  체스키 크롬노프(체코에 있는 말발굽처럼 휘어진 강에 있는 풀밭)

 오스트리아 출신 에곤 쉴레의 미술관은 어머니의 고향 체코 체스키 크롬노프에 있다.

 

 

 

무심한듯 저 당당한 눈빛, 저 눈빛으로 클림트와 첫 대면한 그가 물었을 것이다.

 "제게 그림그리는  재능이 있을까요?

표현이 전방위적이고 경계가 없었던 그의 그림은 퇴폐와 외설로 폄하 하기엔 당당한 그의 눈빛에 압도당하고 만다.

 

 

 

Four Trees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책 표지 그림.

저 앙상한 나뭇가지가 그의 이십대의 번민을 말하는 것 같아 먹먹하다.

아웃사이더인 자신의 삶처럼 어둡고 슬픈 그림들. 결혼도 하도 이름이 날 즈음  임신한 아애의 죽음을 맞고.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클림틔 임종 모습을 스케치한 그도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다. 27세 약관의 나이로. 

 

2014년 7월

핀란드. 헬싱키.트루크 /노르웨이 오슬로 스타방게르 /덴마크 코펜하겐,오덴세/

웨덴 . 스톡홀름 /라트비아. 리가/에스토니아 .탈린

 

무민 캐릭터를 탄생시킨 토베얀손

1914년 조각가 아버지와 일러스트레이터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20세에 무민 시리즈를 시작하여 26년에 걸쳐 8개의 무민시리즈를 완성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고  핀란드 최고 훈장도 받았다.

 일본에서 에니메이션으로 만들며 더 유명세를 탔는데  1990년대에 리메이크 되어 100여개국에서 방영

북유럽의 대표적인 여행 상품이 되었다.

 

핀란드 난탈리 무민월드

 

  난탈리 무민월드에서 방랑자 <스너프킨>과  인사도 나누고  그헣게나 많은 아이들을 본 건 처음이었다.

 

노르웨이 베르겐
작곡가 그리그의 고향이기도 한 베르겐은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했으며 노르웨이 최초의 국립극장이 남아있다.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입센은 이곳 국립극장에서 무대 감독 및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작품 ’절규’ 역시 베르겐의 피오르를 산책할 때 영감을 받아 완성된 것이라 하니 수많은 장소에 예술가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 입센 박물관

 

신문에 풍자만화와 시를 기고하고 파리의 2월 혁명에 감명을 받아 국왕에게 시를 헌정하는 등 정치와 사회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입센.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본격적으로 희곡 집필에 몰두하는 한편,  사회주의적 성향의 주간 신문 『사람』을 창간하여 활동한다

 

 1851년 노르웨이 극장의 전속 작가 겸 무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극작을 위한 밑거름을 쌓던 입센은, 스스로 망명을 선택하여 유럽 전역을 떠돌며 주요 작품들을 집필했다.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집필한 희곡 30여 편은  논쟁의 도마 위에 올랐고,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자수와 비즈로 장식되거나 커다란 조화를 달고  장미가 수놓인 니들포인트  모자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사회주의적 성향의 신문을 창간했다는 사람이라 더욱 그랬다.

 

입센의 대표작이자 근대극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형의 집』과 『유령』은 뜨거운 호평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입센은 여성성의 허구를 폭로하고 나아가 종교와 사회의 부패 그리고 인습을 철저하게 해부함으로써 근대 사상과 여성 해방 운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오슬로시청사 내부는 뭉크의 '인생'이라는 그림으로 도배를 했다.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주제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모자이크 하듯 그려 냈는데 하나 하나 뜯어 보는 재미가 있다.

 

 

 

노르웨이 국민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1000 지폐에 초상화가 그려질 정도로 추앙을 받는다.

"

나는 매일 죽음과 함깨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페병과 정신병이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한 때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가 미술 협회에 출품한 그림을 나치스는 퇴폐예술이라는 이유로 그림을 몰수하기도 했다.

그는 슬픈 가정사의 영향으로  생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응시하는 인물들을  표현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절규》는  핏빛의 하늘 배경은 피요르드라고 한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 인간과 동물 ,곤충 식물들에 이르기 까지  해부되고  해체 된 그 적나라한 모습들이 보기에 끔찍했다.

 그러나 그의 다양한 작업들을 보면서 그의 천재성과 리얼리티에 압도 당해 그만 숨이 멎는듯 했다.

그는 철저히 이기적으로 살았다. 절대 고독 속에서 그림에 미쳤다.

 

그야말로 뭉크의 재발견이었다.

그에 대한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는 이유를 알았다.

 

 

덴마크 오덴세 안데르센 박물관

뒤뜰에 있는 이 작고 아담한  집에서 안데르센이 살았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 집에서 살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그는 술회 했다

 

박물관 앞 뜰에 공연 장을 만들어 놓고 안델센 동화의 주인공들이 단막극을 한다.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 어머니는 10살 연상의 세탁부였다.

아버지는 구두를 만들다가도 틈만 나면 아들에게 장난감을 만들어주던 자상한 사람이었는데 11살 때 병으로 세상를 떴다.

 1908년 문을 연 안데르센 박물관은 안데르센이 출생한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박물관으로  육필 원고와 편지, 사용하던 가구 등 다양한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내가 아이들과 노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학교에서도 그들의 놀이에 끼이지못했다.

집에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인형들이 많았다."

 

 

"나는 투시회 세트와 재미있는 노리게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인형 옷  만들기를 좋아했다"

 

 

안델센이 살았다는 집이 있는 뉘하운으로 갔다.

가 살았다는 집은 관광객들만 찾아오는지 이정표도 없이 표지판만 붙어있었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다리는  쑤시고 저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날이 훤한 탓에 저녁 9시가 넘은 줄도 모르고 안델센 무덤을 찾아가겠다고 호기를 부렸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길을 가르켜준 친절맨들은 엉뚱한 길을 알려줘서 뺑뺑이 돌게 하고.......

 

 

스웨덴 밤베르뷔에 린드그렌 월드

 

 스웨덴 스톡홀름 역에서 기차를 타고 린쇠핑에서 환승, 역사도 없는 자그마한 린드그렌역에 내렸다.

‘말괄량이 피피(Pippi Longstocking)'은 스웨덴의 여성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이 쓴 아동소설.

 1945년 첫 권이 나온 이후, 여섯 권의 책이 출간 . 1969년 스웨덴에서 TV 시리즈로 제작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때 ’말괄량이 삐삐‘ 주인공을 맡은 주근깨 많은 9살 어린 소녀가 바로 잉거 닐슨. 생전의 린드그렌 여사

 

스웨덴 사람들의 국민성을 설명하는 말 중에 .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는 말이 있단다.

 

'닐스의 모험'을 쓴 셀마라르겔 뢰프를 기리는 <홀게르손 월드>에 가려고 역으로 나오다  밤베르뷔에 <린드그렌 박물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베르뷔에서 8키로 떨어졌다는 <홀게르손 월드>를 찾지 못했다.

기차 타고 버스 갈아타고 빙빙 돌다가  밤베르뷔역에 내려 <린드그렌 박물관> 찾아가다가 시간에 쫒겨 돌아오고 말았다. 기차가 2시간에 한 번 온다니 어쩔 수없었다.

 

 

 

 발틱 3국 라트비아 리가 구시가지

 

 베드로 성당 뒷마당의 <브레멘의 음악대>독일 브레멘 시에서 기증한 조각상으로 브레멘시의 조각상과 똑 같다고.

 

 

2015년 8월

영국. 런던 우드 스톡, 보튼 언더 워터. 모어톤 인 마시, 바이버리, 맘스베리, 스트라포드 어폰 에이번, 사이렌 세스터 ,바스 ,윈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캐쉬빌 /벨기에 .브뤼셀. 브뤼헤/ 남프랑스. 리옹 니스 에즈. 모나코

 

 

 

 블렌하임 궁전 (Blenheim Palace)

 

 초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이 1704년오스트리아의 블렌하임에서 프랑스와 바이에른 연합군을 무찌른 전공을 세워 앤 여왕이 대저택을 지어준 뒤  블레넘 궁전이라 칭했다.

영국 바로크 건물의 대표작이며,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이 태어나고 1965년에 사망한 후 정원 남단의 묘지에 묻혔다.

 블레넘 궁전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있는 예술 작품과 타피스트리 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대로 장자 세습으로 물려 내려오다. 8대 공작인 처칠의 큰 아버지가 물려 받았다.

 

 

 

1874년 형의 초청을 받은 처칠부모가 사냥을 즐기다  그의 어머니가 조산기미로  궁으로 돌아와 현관 가까운 방에서 출산을 했다.

큰 아버지 집에서 출생을 했는데 훗날 처칠이 유명인사가 되면서 이 집 문턱이 닳도록  관광객이 드나들게 되었다. 

 

블레넘 궁을 찾은 까닭은 처칠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이다.

그는 자랑스러운 영국인 1위로 뽑힌 사람이다. 

국민들이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 베스 여왕,  대영제국과 바꾸지 않겠다던 세익스피어도 치고  그를 선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를 상대일촉즉발의 세계대전의 전시 상황에도 V자를 그리며 용기를 북돋우고, 

농담과 유쾌한 입담을  놀리던 처칠은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다.

순탄치 못한 유년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이라지만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에 집중했다.

그의 아내가 부드러운 영국 신사와 크루즈 여행을 떠났을 때도 그림을 그렸으며 ,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불행한 가족사도 그림을 그리며 견뎌냈다.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연출한 사람이다.

 

전시 중에 대중 앞에 설 때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든 것도 군복 스타일의 의상을 디자인 한 것도

모두 그가 의도한 자신만의 개성이다.

 

 

세익스피어 생가.

 

세익스피어가 태어난 집은 영국 중부 작은 마을 스트렛 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다. 

그는 18세때 8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해서 3명의 딸과 아들을 두었다

마을에는 생가 이외에도 셰익스피어와 가족들이 묻힌 홀리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나

딸 수잔나의 집인 홀스 크로프트(Hall's Croft)도 볼 수 있다.

그는 이

 마을 문법학교에 다녔지만 열 서너살 때 더 이상 학비를 감당 할 수없게 되자 자퇴를 했다.

스물 두어살 때 런던으로 갔는데 극장 앞에서 손님이 타고 온 말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잡역부를 거쳐 연기자가 되었다.

세익스피어가 한창 전성기 때 고향 마을에 칩거 한 것도 그의 출생 배경과 내세울 것 없는 학력 때문 이었다

비평가들은 귀족 계층의 어떤 인물이 세익스피어 이름을 빌려 극본을 발표했다고 단정 지었다.

그들은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에 다닌 적이 없는 사람은 세익스피어가 될 수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쉰 두 살에 운명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애도의 시를 써준 사람도 없었으며 고향 사람들은 그가 런던에서 유명인사였다는 것 조차 몰랐다. 그의 유언장의 서명은 모두 대필이었고 서명 방식도 제 각각이었으며 이름 철자가 틀리기도 했다.

그런 저런 이유들로 그의 사후에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 되었다..

 

 

당시 세익스피어보다 더한 고초를 당한 작가있었는데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다.

세르반테스는 가짜책이라는 모함을 받았고, 세익스피어는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는 모함을 받았다.

그 두 사람은 한 날 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1616년 4월 23일. 

 이 날은 세익스피어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영국 바스 제인 오스틴 센터.

 

제인 오스틴은 180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와 함께 형제, 친척,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1809년에 듀턴에 정착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이 기간에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 1811)’,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1813)’,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 1814), ‘에머(Emma, 1815)’ 등의 작품을 익명으로 출판했다.

 

리딩 수도원 여자기숙학교에 다닐 때 이미 많은 문학 작품을 접했고 14에는 소설을 습작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습작을 친구나 가족에게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세 권의 노트에 정리했다.

 

 

1801년 아버지는 큰 오빠에게 목사 자리를 양도하고 휴양지였던 바스로 이사를 간다

 바스에서의 경험은 소설을 쓰는 큰 밑바탕이 된다. 당시 가족이 함께 보낸  집은 기념관으로 보존되었다.

 

1802년 해리스 빅 위저드라는  부유한 가정의 6살 연하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받았다.

당시 미혼녀는 평생 아버지와 형제에 의존하여 생활해야 했으므로   절호의 기회였다.

제인은  하루 만에 마음을 바꾸어 거절을 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언니 세 명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아내를 잃은 셋째 오빠 에드워드의 권유로 튜턴으로 이사한다

건강이 악화되어 집필도중 요양을 위해 윈체스터로 옮겼지만

4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윈체스터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제인 오스틴은   단 여섯 편의 소설로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 세계의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BBC지난 천년간 최고의 문학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부유했던  에드워드의 아내 집에서 생활했는데  그 집은 현재 오스틴 기념관으로  개방된다.

 

 

 

1817년 7월 18일 건강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1818년에 ‘노생거 사원(Northanger Abbey)’과 ‘설득(Persuasion)’이 출판되었고,

후에 재평가를 받으며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쌓는다.

 

 

 

런던 패딩턴 역에 가면 <패딩턴>베어 동상이 있다.

<페딩턴>은 페루 깊은 숲 속에서 영국으로 머나먼 여행을 온 꼬마 곰이 펼치는 일상의 모험 이야기다

1958년 세상에 나온 <패딩턴> 시리즈는 30여 개 나라에서 출간되었는데

지은이 마이클 본드는 아동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1997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았다

 

 

  영국 내셔널트러스트 설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윌리엄 모리스1834~1896

윌리엄 모리스는 예술 공예가이자 뛰어난 문학인이다.

찰스 킹즐리, 존 러스킨, 번 존스, 가브리엘 로세티, 필립 웨브 그의 아내 제인 버든과 함께 아트 앤 크라프트 운동을 몸소 실천했.

하지만 그의  동료 가브리엘 로세티와 모리스의 아내 제인 버든 간의 불륜으로 결별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고통의 시기를 견디며  정치활동, 출판활동, 화가로서 활동영역을 넓히며 예술계와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

 

 

 레드 하우스는 윌리엄 모리스가 펼치고자 했던  미술공예운동의 상징적 서막이었기에 가치가 있다.

 

 

 근대공예운동의 선구자이자 19세기 말 '아름다운 책' 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 

그의 책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켐스콧 프레스 전집'

 

켐스콧 프레스 컬렉션은 당대 최고의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 등과 손잡고 출간한 책으로,

평생 옆에 두고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해 한정 출간했다.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  하우스                          줄이 건물을 돌고 뱀꼬리처럼 늘어졌다.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안네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다.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과 어머니 메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의 소녀였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자 안네의 아버지는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했다.

 

안네는 1942.6.12 열세 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을 '키티'라 부르면서 편지를 쓰듯,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마음의 안식처'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일기장을  통해 나치 치하를 살아냈던 유대인들의 고난을 남긴 셈이다.

안네는 일기장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고 적었다.

 1942612일부터 194481일까지 은신처에서 몰래 살았던 기록이, 잘 참고 견딘다고 믿었던 종이에 남았다.

 이 일기의 진위여부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분석결과 그녀의 일기임이 밝혀졌다.

안네의 아버지가 마련한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는 8명의 유대인들 ,오토 프랑크 가족 4,

판 펠스 일가 3, 치과의사 뒤셀이 숨죽이면서 살았다.

 그녀의 일기에는 날이 갈수록 성숙해져 가는 안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숨어산 지 1년 반이 지나자 이렇게 쓴다.

"아마 당신도 1년 반이나 갇혀서 지낸다면 종종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있을 거예요.

.................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나는 이런 걸 동경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죠.

우리 여덟 사람 모두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안네 가족은 은신처를 떠나 자유를 만끽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누군가의 밀고로  비밀경찰에 은신처가 발각되어  폴란드의 작은 마을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나는 이 끔찍한 곳도 찾아가 보았다) 

판 펠스 씨가 제일 먼저 가스실에서 사라졌고,

안네의 언니 마르고를 '어떻게' 하려던 경비병에게 대들던 어머니가 두 번째로 사라졌다.

은신처에서 같이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던 남자친구 판 펠스 씨의 아들 페터도 사라졌다.

19453월,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된 안네와 언니 마르고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두 자매가 죽은 날짜는 영국군에 의해 수용소 사람들이 구출되기 한 달 여 전으로 추정한다.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게 되었다.

은신처에 버려져 있던 안네의 일기는 은신생활을 도와주었던 미프 부인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고,

훗날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어 전 세계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르네 마그리트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인 세상에 대한 반론을 제기 한다.

그의 그림은 우리의 상식적인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에서 시작한다.

는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사물과 관습화된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뜻하지 않은 충돌을

작품 속에 펼쳐 놓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앞에선 관객들은 의문에 싸인 수수께끼를 풀 듯 신선한 경험을 한다.

초현실주의 표현기법 중에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추방하는 것이라는 뜻이란다

<특정한 대상을 상식의 맥락에서 떼어내 이질적인 상황에 배치함으로써 기이하고 낯선 장면을 연출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

 

 

 

마그리트는 아내 조르제트와 지극히 평범한 결혼생활을 했다.

마그리트에게 조르제트는 삶의 전부였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강했던 마그리트는 아내를 신뢰하고, 사랑을 소중하게 여겼다.

두 사람의 절대사랑은 <사랑의 노래>와 같은 상징적 작품을 통해서 드러난다.

자신의 결혼생활에 충실한 마그리트는 예술가로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스캔들이나 어려움 없이

조용하고 보편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1928<연인들>

                                                   

어머니가 강물에 투신자살했는데 어린 그는 어머니의 시체를 건져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드레스가 얼굴에 덮인 채 건져진 어머니의 이미지는 깊은 충격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 사건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남기는데 <연인들>도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마그리트 작품의 제목들은 친구들이 지어줬다. 그래서 그림과 관련성이 없는 것 들이 많다.

그는  보는 이마다 해석이 다르다고 여겼기에 관람자가 제목을 짓기를 원했다.

 

 

 프랑스 리옹 벨쿠르 광장 후미진 곳에 셍떽쥐베리와 어린왕자 동상이 있다.

 

“내 몸은 버려야 할 낡은 껍데기 같은 거야. 껍데기를 버린다고 슬퍼할 건 없어.”
어린 왕자의 작별 인사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  생텍쥐페리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45분 P38 라이트닝 비행기로 정찰 비행에 나섰다가 끝내 귀환하지 않았다.

 

비행복을 입은 셍 떽쥐베리 곁에 붙어선 어린왕자가 “아저씨, 양 한 마리만  그려줘”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2000년 생텍쥐페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리옹시가 이 거리에 작가의 이름을 붙이고 동상을 세웠다.

리옹 공항은 리옹 생텍쥐페리 공항으로 개명됐다. 
“우리가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한다면, 그는 산 자보다 더 강하다” 생텍쥐페리의 말을 고향이 잊지않은 것이다.

 

1998년 마르세유 바닷가에서 어부들이 처놓은 그물에서  '콘수엘로'라고 새겨진 팔찌가 걸려나왔다.

몇 년 뒤에 같은 해역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탓던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기 잔해가  수거되었다.

2008년 3월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가  자신이 생떽쥐 베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했다고 고백했다.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를 보는 게  좋아…”라던 어린왕자는  더이상 슬프지 않을 것이다. 

 
 

 

모나코 왕궁의 외관은 소박했다.

 

 

 

 

 

허리우드의 톱스타 그레이스 켈리는,

1951‘14시간으로 데뷔했으며 하이눈’ ‘모감보’ ‘이창 등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 했다.

영화배우로 활동했던 기간은 고작 5년에 불과한데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은 모두 걸작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녀는 우아한 미모와 더불어 세계인들에게 감동과 환희를 주는 타고난 연기자였다.

 

세계 왕족 중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역대 영화배우 중 가장 우아한 미녀라는 타이틀을 받았던 그녀.

그녀의 전기가 출간 되면서 숨겨졌던 사생활이 알려짐으로 그레이스 캘리의 고상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손상을 받게 되었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알고 싶지 않다.

그녀가 유리 케이스 속에 전시된 밀랍인형은 아니지 않는가.

50년대를 빛낸 아름다운 허리우드 여배우로 출연했던 수많은 걸작들의 완성도를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레이스 켈리 전기 격인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 라는 영화를 보았다.

허리우드 톱스타에서 모나코 왕국의 대공비가 된 여자의 이야기이다.

Grace, 

우아함, 단아함, 음전함, 품위 있음; 미점, 장점; (용모·거동 등의) 매력,자진하여 좋은 일을하는 태도

 은혜 신의 은총. 친절, 인자, 자비 유예, 지불 유예(기간); 은사,

 

이렇게나 멋진 이름 값을 하려면 얼마나 힘겨운 인생을 살아야 했을까?

 

프랑스어도 못하고 모나코의 역사와 풍속도 모르는  허리우드 배우 출신의 대공비를

보수적인 모나코 궁정 사람들이 어찌 대했을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그들의 기준과 잣대에 적응 못하 불화설이 불거지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레이스에게  

영화 출연 제의는  탈출구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렵게 국왕의 허락까지 받아내고 비밀리에 진행 되던 그레이스의 영화 출연을 언론에 흘린 모나코 왕실. 

무수한 가십을 만들며  일파만파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히치콕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배우를 찾아 보라고 말한다

그때 히치콕 감독의 대사가 내 마음에 꽃혔다.


 "지금 그 배역에 최선을 다하십시요.

이제 다시는 주인공 배역에서 내려 오지 마십시요."

 

비로소 그레이스는 허리우드 배우로서의 삶이 아닌

한 나라의 왕비, 한 남자의 아내  어머니가 되기로 결심한다.

'왕관을 쓰려는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는 말을 실현 하기로 한 것이다.

 

 

루시모드 몽고메리

2017,8 

캐나다 &미국 동부 문학기행. 2개국 14개 도시 

<빨간머리 앤>의 몽고메리, <사운드오브 뮤직> 트랍 마리아, <큰 바위 얼굴>< 칠박공집> 너데니엘 호손, 

<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콧,<윌든 호수> 핸리 소로우, 애머슨, 타샤튜더 ,<톰소여 모험> 마크트웨인, <톰아저씨 오드막집> 해리엇 비쳐 스토우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섬  빨간머리 앤의 집

 

그녀는 두 살 때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직장 때문에  외가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상원의원이라 고아  앤 셜리처럼 남의 눈칫밥 먹고 큰 건 아니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런 정서적 결핍이 상상을 즐기는 문학 소녀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외가에서 6남매의 왕언니로  자란 현실은 아이들을 돌보는 앤 셜리로 투영 되었을 것.

 

세상에 못 나올 뻔 했던 명작 - <빨강머리 앤, 1908>

 

서른 살의 몽고메리가 주일 학교 신문에 실을  소재를 찾느라 수첩을 뒤적였다.

 어릴 적부터 이야깃거리를 적어 놓은 수첩에서 눈에 띄는 문장을 발견했다.


‘어느 노부부가 고아원에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신청서를 낸다.

그런데 중간에 착오가 생겨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보낸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상상력이 발동했다.

몇 해 전 《골든 캐롤Golden Carol》이라는 소설을 썼지만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가 번번히 거절당한 끝에 원고를 불태워버렸다.
시간이 지난 다음 주인공의 밋밋한 성격이 《골든 캐롤》의 문제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앤은 전작의 주인공과 다른 상상력과 호기심이 풍부하고 배짱이 두둑한 소녀로 탄생했다.

1905년 봄, 몽고메리는 다락방 창가에 앉아 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원고가 완성되었지만 다섯 번째 출판사에서 거절편지를 받고 나서 원고를 모자 상자에 넣어  치워버렸다.


《골든 캐롤》에 이어 《빨강머리 앤》까지 외면당했으니 실망감이 오죽했을까.

 탈고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창고에 처박아둔 모자상자를 꺼냈다.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동안 작품에 대한 애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몽고메리는 원고를 포장해 보스턴의 L. C. 페이지 앤드 컴퍼니로 보냈고 얼마 후 일기장에 감격의 순간을 기록했다.

‘드디어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원고를 책으로 내겠다고 한다!’

 

 마침내 34세에 출간하게 되고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된다. 하지만 불리한 출판 계약으로 인세를 공정하게 받지 못했다. 

 

Green Gables는 몽고메리 외할아버지의 사촌인 맥닐씨 부부가 살던 집빨강머리 앤을 쓸 때 어릴 적에 자주 놀러 갔던 맥닐 씨 집을 모델로 삼았다.

결혼 이후 후속작을 집필했던 몽고메리는 2차 대전 중 토론토 인근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캐빈디시의 묘지로 옮겨졌다. 부부 합장 묘.

 

 

 

 

  영화 <사운드오브 뮤직/1965년>

말괄량이 수녀 지망생 마리아(줄리 앤드류스)는 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명문 트랩가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해군대령인 트랩(크리스토퍼 플러머)은 2남 5녀인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길들여 놓았다.

대령이 후처가 될 슈레더 남작 부인을 맞이하러 집을 떠나있는 동안 마리아는 

커튼을 뜯어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입힌 후 소풍을 가서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속에서 노래한다.

 

트랩 대령의 첫째 딸이 나치의 광신도가 된 프리드리히와 사랑에 빠지자 대령은 아이들을 데리고 망명을 계획한다.

대령과 마리아와 아이들은 음악 대회에 나가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승이 발표되어 호명되지만

이들은 이미 자유를 찾아 알프스를 넘는다.

 마리아가 1949년에 독일어로 출판한 회고록 <트랍 가족합창단 이야기>는 실제 사실과 다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이들과 결혼한 것이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한 바 있다.

 

 

 폰 트랍 일가는 미국 동북부 버몬트에 농장을 사서 그곳에 음악 캠프를 만들었다.

이주 전 오스트리아에서 가족합창단으로 활동했던 마리아와 자녀는 미국에서도 순회공연을 하며 살았다.

전용 버스로 움직이는 순회 공연, 모두 거들어야 하는 농장일,  20대 30대가 되도록 그들은 '가족'에서 이탈하지 못했다.

 

 

폰트랍 대령이 살던 오스트라아 대 저택은 히틀러 오른팔이 접수 했다

그는 가족들의 노동력으로  버몬트 산속에 집을 지은 것이다. 

 

 

 

마리아가 인생을 걸고 폰 트랩 가족을 사랑하며 봉사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결국가족공동체에 집착한 마리아는'마마 스머프'로 살았던 셈이다.

 


트랍 마리아 호텔( Stowe Lodge)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주인공 가족이 운영한다.

 

너새니얼 호손 1804년 -1864

 

 

남북 전쟁 직후, 시골 마을 산에 사람 얼굴을 닮은 바위가 있었다.

자연이 새긴 그 얼굴은 거룩한 표정으로 마을을 굽어보았고 마을에는 ‘언젠가 이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리라’는 예언이 생겼다.

 소년 어니스트는 이 예언을 굳게 믿으며 고대했지만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로 거론된 이들은 번번이 소년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여전히 어니스트는 예언의 완성을 기다릴 뿐이다.

 

 

 

너세니얼 호손 묘소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호손의 <큰바위 얼굴>을 읽고나서  사람은 그가 살고자하는 방향에 따라 얼굴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도 큰바위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바람을 육십육세에 이룬 것이다.

 

호손은 큰바위 얼굴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다." 라는 것을  말했다.

 

 

 

Orchard House 콩코드 렉싱턴가 399번지 <작은 아씨들>의 배경

루이저 메이 올콧(1832~88)

올콧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정신적 양식을 주었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달리 현실주의자였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출판사의 상업주의와 타협한다.

단편소설 <경쟁하는 화가들>로 데뷔한 후 소녀취향의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작은아씨들>을 집필한다.

어머니와 자신을 포함한 네자매 모두가 이 소설에 등장한다.

 

 

 

올콧 집안은  웨이사이드를 팔고 보스톤으로 갔다가  콩코드로 돌아와 과수원이 딸린 집을 사고 Orchard House (과수원집)이라 불렀다.

거실에는  베스가 쓰던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어린시절 연극의 무대로 곧잘 활용되곤 했던 식당은 거실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녀가 원고를 집필했던 지붕밑의 다락방에는 낮은 책상이 놓여있었고 옆벽의 책장에는 <작은 아씨들>의 한국어 번역판과 함께 그녀가 생전에 쓴 32권의 작품이 꽂혀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설 속에 묘사된 그대로 복원되어 있는 인형의 방이었다.

 

<작은 아씨들>은 출판되자마자  초판이  매진되는 기록을 세운다.

이 때부터 올콧은 경데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출판사는 수정판을 찍으면서 대중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인물로  개작을 요구한다.

출판사는  네자매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전형적인 여성상을 그리는 속편을 써달라 요구한다.

올컷은 자신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죠만은 독립적인 독신여성으로 남기를 원했지만,

출판사측은 죠와 로리를 결혼시킬 것을 요구한다.

 

인물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여성들로 그들 사이에는 당면한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는 공동체 정신이 자리한다.

 

 이런 면에서 루이저 메이 올콧은  아동문학이나 대중문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독립적 여성문학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루이저 메이 올콧 묘지

 

 

 

 

미국 콩코드 핸리 소로우 묘소.

 

 

소로가 지은 오두막 전경

 

소로는 독립기념일인 1845년 7월4일, 28달러 12센트를 들여  직접 지은 오두막에서 기거한다.

소로가 이곳에서 숲속 생활을 시작한 것은   자신의 사상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상업자본주의의 도입으로 노동의 노예가 되어  돈벌이 혈안이 되어있는 미국인의 풍조를 개탄한다.

 10년에서 15년을 일해야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는 노동자들, 20,30,50년 동안 농사를 지어도 토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는 농민들, 이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그가 보기에  유럽식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대안으로  욕심을 버리고 작은 땅에서 적은 양의 농사를 지으며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는 자신과 같은 모습을 따르라고 권고한다. 

 

 

윌든 호수

 

 

 

해리엇 엘리자베스 비처 스토(Harriet Elizabeth Beecher Stowe)는 1811년 종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링컨 사진은 재임 당시 두 사람 사이의 친분을 추측할 수 있다. 

 

1836년 신학교 교수인 캘빈 스토와 결혼한다. 결혼 후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그리스도교적인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엉클 톰스 캐빈>(1852년)을 발표,국내외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최초의 사회문제 소설  <엉클 톰스 캐빈>은  전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링컨 대통령이 "이 작은 여인이 남북 전쟁을 시작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은 미국 내에서 돌풍을 일으켰었다. 

 

 최고의 판매기록을 세웠던 작품이다.

 

 

 

 

사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동북부 사람들은 남부의 흑인 노동력을 싼 값에 이용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스토 부인이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하고, 도망노예를 도피시키사회활동에 참여하며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가 쉬웠을까? 

인류애와 평등의식에서 우러 나온 스토 부인의 생각과 행동에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녀는  백인 남성 중심의 문학과도 한 판 전쟁을 치르지만  여성문학의 서글픈 퍠배를 겪었다.

그녀는가정적 불행과 더불어  만년에 우울증이 심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크 트웨인 하우스와 박물관 (Mark Twain House & Museum)

 

 

'미국 문학의 세익스피어',  '미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크 트웨인은  지방색 작가, 유머작가, 아동 작가로 인정 받았다.

  그의 대표작 <허클베리핀의 모험>  <멍청이 윌슨의 비극>을 통해서  남부 귀족 가문의 세속적이고 허풍스런 관습의 허상을 파헤쳤다.

집안을  둘러보면서 작가 트웨인이 아닌 인간 클레멘스의 생애를  되짚었다. 

 그는  인쇄소 견습공이던 시절, 아마존 탐험기사를 읽고 코카인을 찾기 위해 뉴올리언즈로 떠나려했고,

은광에 주식투자를 하고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찾아헤맨 것으로 보아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적은  그의 작가적 태도와 상반된다

 

그는 작가로 입지를 굳힌 뒤로 미국 동부 상류 사회에서 합류하고자 보수적인 빅토리아 문화의 감상주의적이고 이상적인 도덕관을 따랐다.

 

문학적 성공과 함께 하트포드에 저택을 지었다.  이 집은 작가 트웨인이 허클베리핀을 포함한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을 집필한 곳이자 그의 세 딸을 키우면서 행복하고도 화려한 생활을 한 곳이다. 

그는  이 집에서 생활비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결국 자동인쇄기 타이프 제작에  투자하다 파산하게 된다.

 

1891년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어 이 집을 떠났다가  1896년 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903년 이 집을 팔아버렸다. 

그 후 하트포드 동우회가 집을 사 1974년 복구공사를 마친뒤 하트포드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일본 나오시마 예술의 섬  안도 다다오 뮤지엄

 

 

안도 다다오에 대한 이미지 결과

안도 다다오 1941 ~ 는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는  트럭 운전사와 권투선수로 일했고, 건축에 대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는 점에서 

 소설 같은 삶을 살았.

그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가두드러져  물 과 빛을 이용해 어둠과 밝음을 극대화 시키고 공간을 강조하였다.

물과 빛, 바람, 나무, 하늘 등 자연은 그의 건축물과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다.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함으로써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자연과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게 하였다.

 

 

오사카 이바라키현에 있는 '빛의 교회'

안도 다다오는 쌍둥이로 태어나 대를 잇기 위해 외할머니 밑에서 성장.

그는 프로복서를 꿈 꾸었지만 한계를 느끼고 갈길을 바꾼다.

공고에서 배운 도면설계 기술로 인테리어 설계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건축가의 꿈을 실현 해 나갔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7개월여 여행으로 서구 건축 기행을 하며 안목을 키웠다.

70년대 중반부터 노출 콘크리트 기법과 자연광을  극대화한 건축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 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갑싼 시멘트를 가자고 아무도 보지 못한 건물을 만들려한다. 

바람 물 빛은 차갑고 딱깍한 느낌을 주는 콘크리트 건물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바꾸는 자연스런 도구다.

 

 

 

올해 88세 쿠사마 야요이는 (1929-) 현역 예술가다.

 

그녀는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강박신경증과 편집증을 이겨내려는 그녀의 활동이 예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빨간 꽃무늬 식탁보 잔상이 온 집안에서 보이는 경험을 하게된다.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자신의 신체에 따라붙었던 땡땡이 무늬는 평생의 작업의 소재가 된다.

어둠속에서 같은 영상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좁쌀들이 벽을 타고 흐르고,

평면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체들. ...

그것들을 벽에서 끄집어 내기위해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작업 끝에 잠을 잘 수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1952년, 쿠사마는 23세에 첫 개인전을 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

쿠사마는 과 점등으로 이루어진 250여 점의 작품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 전시를 통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나오시마 예술의 섬'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선착장의  빨간 호박.

 

그녀는 몸에 밀착된 옷을 입고 거울방에 나타나기도 했고,

베니스 비엔날레에선 무수한 거울공들 옆에 나란히 누운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형상과 배경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위장의 연출은 빨간 의상을 차려입거나 빨간 가발로 작가의 존재감을 증폭시킨다.

쿠사마의 흥행사적 기질은 소비사회가 된 현대의 관객과 상업 자본주의 시장경제 수요를 충족시키며 주목을 받았.

 

 

문학기행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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