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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나들이

1092회 정채봉 선생님 21주기

멀리 가는 향기 2022. 1. 9. 19:58

 

덕수궁 전각 사이의 문을 지나면,

 

1900년 러시아 건축가 설계했다는 정관헌.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 맛을 본 고종이 이곳에서 '가베'를 즐겨 마셨다고.

 

담장 밖의 영국 대사관.

호시탐탐 노리는 열강들 사이에서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대한 제국.

덕수궁 주변엔 각국의 대사관들이 있었다.

 

이왕가 미술관은  국립 현대 마술관 덕수궁원이 되었다.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박수근(1914∼65) 화백

 

2021년 12월 11-3월 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화와 삽화, 판화 174점을 모아 역대 최대 규모.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박수근 작품은 개인 소장이 많아서 생전에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라고.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 광산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 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온 내 아내상은 당신 같이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내 배필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그의 진면목을 알 수있는 일화

 

창신동 살 때다. 길에서 비를 맞으며  과일 파는 아주머니 셋이 앉아 있었다.

박수근은 과일을 나눠 샀다. 부인이 왜냐고 물으니

"한 아주머니에게만 사면 딴 아주머니들이 섭섭하지 않겠어?"

 

박수근은 1961년 일본 <국제자유미술전>에 출품 했을 때  작품이 사라졌다는 통지가 왔다.

아내가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 그 사람 돈은 없고 탐이 나서 그랬으니 얼마나 좋으냐, 작품 도난 당한 것도 영광이다"라고 했단다.

 

박수근은 열두살 때  밀레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가세가 기울자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혀 조선미술전람회와 국전을 통해 화가가 됐다.

도청 서기와 중학교 미술교사 였던 그는 한국전 이후 월남해

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군부대 PX(매점)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그곳에서 일했던 박완서는 훗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나목'으로 등단 국민 소설가가 되었다.

박완서님의 첫 장편소설 <나목>이 "여성동아 1970년 50만원 고료 여류장편소설당선작" 

70년 11월호 별책부록으로 출간.

 

소설가 박완서는 신문에서 화가 박수근의 부고를 접하고 그의 전기를 쓰려다가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그의 삶의 일부만 알았기에 소설적 형식으로 썼다고.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혼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목』 마지막 장면에서 경아는 옥희도씨 유작전에서 <나무와 두 여인>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나무와 두 여인>

당시에 잡지사에서 박완서 작가의 집을 불시에 방문해서

직접 집필 여부를 확인하고 최종 선정 발표를 했다는 후일담.

(그 시절에 남자들이 여성 명의로 응모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박수근의 창신동 집 대청마루.

 

"아버지의 화실인 마루는  동네 아주머니와 상인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외국인이 서성이며 그림구경하는 화랑이기도 했다.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8세 때 수채화 ‘봄이 오다’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화가가 됐다.

나와 친구들이 온통 소란을 피우거나 

어머니가 빨래를 개는 생활터이기도 했다. "

 

- 장남의 증언

 

 

49세때 백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후에도 그림을 그리다가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서민화가’ ‘국민화가’로 불리는 그의 그림에는 우물가, 골목, 시장, 빨래터에서 일하는

고단한 여인과 행상이 모델이다. 

전쟁이후 피폐해진 일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기록했다.

 

62년, 10살 때 조선호텔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던 내 모습같아서.

 

박수근은 유화 물감으로 ’화강암‘ 표면 같은 질감을 표현한다.

‘열 번 이상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하여 깊이감을 주는 동시에 납작하게 눌러 바르며

감정의 절제와 인내심의 미덕을 보여준다. 

그는 독학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만들었다.

 


"나는 워낙 추위를 타선지 겨울이 지긋지긋합니다.   ....

겨울도 채 오기전에 봄꿈을 꾸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 그 보다 진짜 추위는 나 자신이 느끼는 정신적 추위입니다. ..

세월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오늘까지 내가 이루어 놓은 일이  무엇인가 더럭 겁도 납니다.

하지만 봄을 생각하는 내 가슴에는  오월의 태양이 작열합니다."

 

 

누군가  덕수궁 돌담길에 내놓은  설치미술?

 

아버지 직장이 있던 덕수궁 돌담길에는 청소년기의  아픈 기억도 있다.

 


  


 
▲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
‘오세암’과 ‘초승달과 밤배’ 등으로 유명한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의 21주기를 맞아 아동문학 문인들이 기일인 9일까지 추모 기간을 갖는다. 선생의 지인과 제자 문인들은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공부한 공간 사진, 고인의 육필 원고, 추억이 담긴 물건 등을 선생이 만든 동화창작 아카데미인 ‘동화세상 동화학교’ 커뮤니티에 공유한다. 8일에는 선생이 오랫동안 근무했던 샘터사와 가까운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에서 위령 미사를 봉헌한다.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었던 선생은 동화의 독자층을 성인으로 확대시켜 한국 아동문학의 예술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부터 동화창작 강좌를 열었고 이후 ‘동화세상 동화학교’로 확대하는 등 후배 작가를 양성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지난 10주기에는 제자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정채봉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선안나 작가는 “과거에 아동문학을 성인 문학의 아류 정도로 치부하던 그릇된 인식을 바꾸는 데 굉장한 기여를 한 분이 정채봉 선생님”이라며 “‘아무리 세상이 흙탕물 같아도 거기에 동심 한 방울 보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선생님을 기억하고 동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마음을 생각하며 추모의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1얼 8일 오후 7시 혜화동 성당 추모미사.

 

지슬영, 고은별, 김용옥, 김향이, 선안나, 이성희, 김혜온

 나정윤, 정진, 전성현  1기부터 33기 까지 모여 돈독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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