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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김향이의 블로그 세상

문득 돌아보니 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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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복토로 만든 민응규 위원장님

멀리 가는 향기 2024. 10. 14. 23:51

15만 4천평의 복도에  키브츠를 만들고자 원주 최초 트렉터를 들여왔고,

후원 받은 젖소 2마리를  40마리로 키워  HPI 후원금을 내고 내셔날 지오그래픽에 보도되던 호시절

민응규(88세) 1937년생

홍천에서 피난 후 52년 간현에 정착. 대전 농민학교 은사 중매로 이해정씨와 결혼 .

2남 2녀를 키웠다.

 

섬강 파크골프 클럽에서 민응규 위원장님을 만나 인근에 있는 댁에서 인터뷰를 했다.

 

 개화기에  독립 운동 하시던  남궁억 선생 고향이 홍천 서면 모곡리인데 제가 한서 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당시 아버지는 백 오십호 되는 동네 구장을  봤어요.  6. 25  때 국민병 간 사람 식구들을 데리고 피난을 갔어요.  4- 50명을  인솔해서 충북 청주 못 미처 내수라는 곳 까지 피난 갔다가,  국군이 수복하면  뒤 따라가고 뒤 따라가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피난 안 가고  동네서 인민군하고 소잡아 먹던 놈들이 아버지 말 한마디에 총살 당하게 생겼거든. 와이로 쓴다고 밀주에다가 메틸 알코올을  타서 대접 했단 말이야. 무식하니까 그랬겠지.  본인도 먹고 우리 아버지도 잡수신 거야.  아버지가 밤새도록 앓다가  아침에 바람벽을 긁으며 진통을 하셨어요. 그게 창자가 녹는 거라구.   아버지는 피난 잘하고 돌아오셔서 술 대접받고 돌아가신 거야.  아버님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상주가 없잖아. 집에  어머니하고 나 밖에 없는데.  지금 목사하는 작은 형님은 학도병 나가고 큰 형님은  같은 학교 선생들끼리 피난갔거든.  형님들이 돌아오면 장사를 지내려고 땅을 얕게 파고  나무로 덮어 임시 무덤을 만들었어요.   

학도병 나간 작은 형님은 식량보급이 끊겨 뿔뿔이 흩어졌대요.  충청도 보은 까지 내려가서 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남의집 꼴머슴을 했대요. 국군이 치고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 생사가 궁금해 집으로 갈 생각을 한거야., 모곡리 삼십리 밖 까지 와서는 밤을 지내고 길을 떠날 생각이었대요. 그런데 고향 동네 노파를 만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거지. 그 길로 자벌레처럼 팔짝팔짝 내달려서 해 떨어지기전에 마을 동구에 도착 한거야. 거기서부터 설음이 복받쳐서 디굴디굴 구르며 집에 왔잖아.  

 중공군이 재침해서  아버님을 모곡 교회 근처에 묻어드리고 1.4후퇴  피난을 나온거야. 이고지고  양동으로 해서 문막으로 걸어왔어요.  큰 형님이 학교 선생이니까 봉급타려면 임시 도청이 있는 원주로 올 것이다 해서 찾아나선 거지. 도청에 가서 형님이 월급타러 오면 집주소를 알려주라 부탁 하고 왔어요.  큰형님도 무사히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어요.

 문막은 경기여객이 하루 두 번 밖에 안오고 간현은 기차가 세 번 서울을 댕겨서 교통이 좋은 간현에 정착을 했어요.

 

  문막 의성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야하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았어요. 그 당시  큰 형님이 군에 입대를 했거든요.

 

담임 선생님이 광성 고등학교라고 평양에서 피난 나온 미션 스쿨이 서울에 있는데 학비가 싸다고 하셨어요.

어머니 친척이 전농동에 사셔서 친구하고 그 집 방을 얻어서 자취를 했어요. 부스러진 연탄을 연탄숯이라고  팔아서 그걸 로 밥을 해 먹고  전차비도 아껴서 걸어다니고 그 돈으로 꿀떡을 사먹었어요.

 

밥 먹을 것도 없는 형편인데 월사금을 어떻게 내.  학자금을 떼어 먹고선 흥업에 있는 육민관 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지.  서울 학교 다니다 시골 학교 오니까 교수진이 개판이여.  거기서도 학자금 떼어 먹고선 여주 공립학교 점동 공업학교로 들어갔어. 또 학자금을 못 내니까 담임 선생님이 불러. 부잣집 아들을 서울 고등학교 보내려는데 니가 가정교사로 가르쳐 볼래냐  물어. 그 집에 들어갔는데 한참 가르쳐 놓고 쉬었다하자 하고 물어보면 다 까먹었어. 얼마나 돌머린지 제기, 답답해서 수 없이 울었네.

  3학년 1학기 하고선 담임 선생님한테 나 이제 군대가야하는데 졸업장 주겠냐 안 주겠냐 물었어. 사변나는 바람에 서너 살 어린 후배들하고 공부를 했단 말이야. 니 사정이 그러니까 갔다 와라 그러면 내가  챙겨주마 한 거여.

 나는 대학을 안가면  사람 구실 못 한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어떡하든 대학에 갈 생각이었어요.  군대에선 숙식이 해결 되니까  해군 인천 경비부나 서울 ,부산 경비부에 배치 받으면 야간대학에 가야겠다 생각한 거지. 바로 해군 시험을 봐서 지원했어요. 군대를 이용해서 대학에 다니려 했는데 외래 군대에서  기합 받고 야구방망이로 두둘겨 맞고  직사하게 고생만 했어.

 훈련소서 70명 앞에 담요 한 장 펴놓고  다 들어가라 그런 기합도 줘유, 교관들이 담요 네 귀퉁이에 야구방망이 들고 서서 너 이놈 새끼들 기합이 빠졌다하고 두둘겨 패면 안 맞으려고 일개 중대가 다 거기 엎드려 포개져.

밑에 깔린 놈들이 아이고 다리야 갈비야  허리야 죽겠다고 소리치면 다시 호루라기 불고 일렬로 섯 그런 걸 했다고.  거짓말 아니고 야구방망이로 150대 맞았어. 

 수요일마다 훈련병은 목욕을 시켜. 호루라기 확 불면 들어갔다가 호루라기 확 불면 씻지도 못하고 나온다고. 그럴 때 보면 궁뎅이가 멍이 들어서 시퍼래. 훈련소 들어갈  때 68키론가 됐는데 57키로로 줄을 정도여.

 훈련병 사진을 보면 박쥐가 굴인줄  알고 들어갈 정도로 눈이 쑥 들어가서 해골 같어. 훈련 받은 게 아까워서 도망을 안 간다고.  그 어려운 고생을 했는데 어떻게든 수료할 생각을 하는 거지.

 

수료식하면 엘에스티라는 큰 배에 태워서 부산에 떨궈 놓고 열흘 동안 자대 배치를 한다고. 자대  배치 받은 다음에 한문으로 주소 본적  최종학력을 쓰라해요. 복무기록을 보더니 너 감자바우로구나 이쪽으로 서 하더니 행정 참모실 서무 조수로 배정 받았어. 거기는 합동 내무대라고 아무리 끗발이 쎄도 기수 별로 내무 대장 말을 들어야해.  아침에 기상하다가 하품하면 너 쌔끼 일루와  고향 생각했다고  두둘겨 패는데 그렇게 군기가 쎈 걸 여기서는 몰러. 

  제대하고 오니까 담임이 졸업장을 보내 놓으셨더라고. 대학을 갈래니 실력이 있어야지. 고등학교를 엉터리로 다녔으니 실력이 없잖아. 열등의식 속에 살다가 대전 농만학교를  간거라고.

뭘 배우냐면 오전에는 학과 공부하고 오후에는 실습을 해. 다른 사람은  다 자기 실속 있는 걸 배우는데   졸업하면 젖소 실습할 때도 없으니까 친구 세 놈이  만날 젖 짜고 사료 주고 똥 치우는 걸 맡아서 했단 말이야.

그 때는 젖소 구경 하려면 30리 가야 있을 둥 말둥 할 때라.  어른들이 양소가 있는데 고양이처럼 얼룩 덜룩 하고 젖이 바깨스만치 크다고 구경가자 할 때여.  

 

 65년 대전 농민학교  졸업생 후원회로부터 임신 6개월 된 젖소 2마리를 후원받았어요. 미국서 원조 해주는 소를 누굴 줘야 잘 먹이겠냐 했는데 우리가 뽑힌 거야. 지금  축협에서 하는 가축 은행식으로 암소를 주면 새끼를 낳아 암소로 갚으면 내게 되고 그 전에는  내게 아닌 거야. 관리를 잘해야 해요. 그러다가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되니까 임신한 소를 두 마리를 줬단 말이야.  미국서 온 소 두 마리를 받았는데 한 마리가  파이로 퓨러스 마스라고 진드기에 물려 죽은 거야. 적혈구 파괴돼서. 지금 시세로 천 만원 정도 되는 소가 죽어 버렸어요. 그때는 항생재 테라마이신도 없을 땐데  미국 선교사가 일본서 수입해다 주사를 놓아서  나머지는 살렸다고. 그 젖소가 밑천이 된 거지.

  농협 직원이 되면 농사자금 대출이 수월할 것이라 생각하고  5년만 다닐 생각으로 입사 했는데 반백이 되도록 근무했어요. 농협에 근무하면서 복도에 땅을 마련하고 젖소를 키운거여.

 간현의 복도는 15만 4천평이야. 이곳에  이스라엘 집단 농장 키브츠같은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70년대 초 트렉터를 들여 왔는데 원주에서 처음으로 기계농업을 시작한 셈이여. 

 

 목장 초창기에 아내가 새벽 4시에 젖을 짜서 코카콜라 병에 담고 콜크마개로 막아 2중 중탕처리해 놓으면 우유 배달을 했어요. 480 밀가루로 밀개떡을 만들어 한 조각 먹고선 배달을 나가요. 간현은 우유 먹을 만한 경제력 있는 집이 없어.  문막에도 폐병환자나 년년생 나서 젖이 부족 하거나, 영양실조 든 애들만 우유를 먹었어요. 집집마다 배달하는데 지정초등학교 있는데 지금은 철다리지만 옛날엔 징검다리였다고. 장마가 지잖아 그럼 철다리로 건너가야해. 철다리에 자전거를 놓고 침목을 밟으며 가. 가면서 딴 생각하다 보면 대번 떨어져. 가다가 소나기 만나면  아무도 없는데 가서 옷 벗어 짜고 집에 오면 열시여.

 여기 우유 처리장이 없어서 천안에 1년 내려가 있다 오고 . 그러다 우리 소를 가지고 가서 천안 남양 분유 공장있는데 성환 친구네 하고 합쳤어요.  거기도 우유가 남아도니까 의도적으로 체세포가 많다 산폐했다 하면서  사흘에 한 번 씩 반품을  시킨다고 .

 목장이 번창하기 시작해서  30년이 되자 착유 가능한 소가 40마리 되었어요. 목장 사업이 최대로 번창한  95년에  HPI본부에 후원금을 보냈어요. HPI본부에서  111개 나라를 지원해주는데 그 중에서 성공한 농민이 후원금을 보낸 나라는 한국뿐이었대요. 내셔널 지오그라픽회사에서 사진 기자를 보내 취재할 정도로 성공한 시절이었어요.

그러면서 여기 복도 땅 판다는 바람에 우유 소 몇 마리 팔아서 7천 여 평을 산거지.

 물 건너 사람들이 섬에는 개미귀신이라고 뻐꾸기집만 있는데 참깨도 안 되는  땅을 뭐하러 사냐고 했어요. 처음에 2100평 살 때 16원 주고 샀어요. 화페교환 전이라 저 건너 땅이 백 오십원이면 여기는 백원도 안 할 때였어요. 그런데 나는 가축을 먹여서 저 건너 땅보다 거름지게 할 자신이 있었어. 퇴비를 묻었다가 빼먹으면 될 거 아니냐 생각한 거여.  그땐 비료 살 돈이 없어서 순 퇴비로만 농사를 짓는데 퇴비가 썩지 않으면 당년에 수확이 오르지않아요. 그렇게 어려운 농사를 지었어요. 

 처음 땅 살 적엔 집사람하고 신혼살림하는데 땅이 없으니까 선교사한테  농사짓게 돈 좀 빌려달라해서  250만원인가 주고 2000평을 산거라고.  선교사가 삼 년 후면 안식년이라 본국으로 들어가 여기서 활동한 걸 보고하는데 쓸 돈을 빌린 거지. 돌아가기 전에 갚으라 해서 이년 안에 사흘 먹을 양식도 안 남기고 돼지 팔고 고추 팔고 수박 팔고 해서 가져 가니까 그렇게 기뻐 하더라고.  말이 그렇지 일년을 버티는데 얼마나 힘들어요.

 그 선교사가  나중에 미국으로 초청 해서   29일 동안  데리고 다니며 성공한 사람이라고 자랑을 해서 미국 구경을 했다고.  그때가 오십 먹어서 였을 겨. 농협에 다닐 때 였어요. 저 사진 속 소가  저지라고 지방이 많아. 치즈 만드는 소인데 거기서 기념 촬영해서 전시 하느라고 크게 확대 해 놓은 거라고.

 

 내가 28살 집사람이 27살에 결혼했는데  빚 갚느라 결혼하고 3년 후에 아기를 낳았어요. 대전 농민학교 최은교선생 부인이 우리 집 사람 1년 선배라고. 그러니 살아간 걸 아니까 소개를 한거여. 최선생도 우리 집이 형이 선생이고 목사인 줄만 알지 집이 가마니떼기 들추고 들어가는 집인 줄 모르고  그냥 사람만 좋다고 중신을 한 거야.

 집사람이 맏이였고 장모님이 처남 낳고 두달 만에 산후탈로 오진해서 약을 쓰다 돌아가셨어. 집사람이 고등학교 다니면서 처남을 학교에 데려가 사무실이나 숙직실에 놔두고. 공부 끝나면 집에 데려오고 하면서 호스돈 여고 대대장을 했어. 그런 사람이 여기 촌에 와서 아는 사람이 있어 뭐가 있어. 들어앉아 책만 보다가 딸 낳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아들 낳고  2남 2녀 낳았지.

 

 농협에서 농촌처녀들이 서울 가면 바람 난다고  요꼬 기계 250대를 사서 쉐타를 짜서 일본에 수출 했어요.  그때 영농부장으로 갔단 말야. 봉급의 반을 중앙회서 보조해준다고. 출장 여비를  타 쓰고 남았다고 도로 반납했어.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일해서  문막 농협을 키운 초창기 맴버였다고. 

 나는 어려운 경제를 담당하더라도 애들한테는 고생 안시키겠다고 이를 갈아부치고 살았는데. 열심히 살다보니 우유 소 키워 자리가 잡혔는데 그거 하느라 시간이 없어 돈도 못 쓰고 . 쿼터젠가 뭔가 하는 바람에 더 많이 키울 수가 없어요. 

국가 정책으로 외국서 유제품을 수입해 오더라도 나라에서 얼마간은 보호해줄 것이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갈 것이다 했는데.  농협에서 소초로 발령이 나니까 새벽에 우유 짜고 버스 타고 직장에 가서 일 보고 그렇게 일년을 보냈다고.

  아들내미가 큰 놈인데 고생 모르고 편하게 살았어요.  애로 사항 있으면 즤 에비가 해결해주니까. 내 몹쓸 습성 집 사람의 나쁜 습성만 받아서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몰라.  큰놈이 소를 멕인다고 기계화 해달라고 해서 1억 몇 천을 들여 착유실부터 우사까지 제대로 미국식으로 갖춰놨는데 아니, 그것도 못하겠다는 거여. 여기 있다간 연예도 못하고 장가도 못가겠다고 박차고 나가버렸어. 시설해놓은 게 아까와서 집사람하고 죽어라고 일하다 보니 내 다리가  U 자가 된 게 그 탓이야. 키가 173이었는데 십 센티가 줄었어. 그 바람에 아내가  속썩어서 일찍 죽고,  그 놈이 즤 엄마 죽고 나서 후회 되니까 자살해 버렸어.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셨을 때 결정을  잘 못했다 아쉽다  후회도 되지만  이런 건 잘 견뎌냈다 공과가  있으시지요?

 

 공과는 내가 잘 버티고 그런 건 잘 한 거 같은데,  집 사람의 애로사항을 농촌 주부는 그 정도는 다 견뎌내는 사람이지 하고  몰라 준 거.  지금은 생보대상자도 나라에서  헤택이 있는데 그 당시는 사흘 먹을 양식이 없는데 어디가서 꿔 올 때도 없이 살진 않잖아. 후회되는 건 직장에서 사람들하고 시달리다 집에 오면 나만 편하게 살려고 들었거든. 집사람이 집에서 이렇고 저렇다고 하면 너만 그런 거 아니고 다 그렇게 산다하고 보듬고 챙겨 주지 못한 게 후회되고 마음 아프지. 그런 게 벌써 6년이 되었어.  집사람도 그렇고 아이들한테도 자상한 아버지 노릇을 못 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은 언제예요?

 

거의 행복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  지금 애들은 노후를 위해 보험들고 설계를 하는데.  배고픈 설음에 본인은 희생하더라도 아이들한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달렸거든.  그때 트럭터 가지고 농사 짓는 게 최고의 꿈인 줄 알았잖아. 내가 보람을 느끼고 이런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보지 못하고  취미생활도 못 했어. 

죽기전에 내 맘대로 화장실 가고 그러다가 죽어야 겠다 하고 게이트볼 치다가 뒤늦게 파크 골프를 치는 거지.

  2021년도에 노인회장 할 때 120명 서명 받아가지고 파크 골프 클럽을 만든 거지. 지금은 18홀에 130명 회원이야.

이젠 더 바랄 것도 없어. 

 

                                                                                   울렁다리 에스컬레이터 준공식

                                                                                                       행복나눔센터 추진위 임원 회의 

                                                                                          지역 역량강화 사업 '쉼표 더하기 축제'

 올 해 미수를 맞은 위원장님은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두 다리가 굽도록 지아비로 아버지로 한 세상 치열 하게 사셨다. 

남은 생은 지역의 어른 노릇 하시느라 지정면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 추진 위원장으로 노구를 움직이신다.  

부디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소리를 들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