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세 김영남 어르신 장수 비결은 소식과 부지런.
어르신 귀가 어두워 막내 아들 김남원 신부님과 인터뷰를 했다.
김영남 마리아 (104세) 1921년 생
18살에 21살 김봉조 씨와 중매로 만나 삼척 용화에 사시다 말년에 막내 아드님 과 함께 사신다.
9남매를 낳아 6남 1녀를 키우셨다.
부모님 결혼 생활은 어떠셨어요?
강원도 삼척 용화 바닷가 마을에서 사셨어요. 아버지는 배를 만드는 대목이라 북한 원산만 함흥까지 일하러 다니셨대요. 분단 이후에는 삼척 묵호 강릉 포항까지 다니며 돗단배를 만드셨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 사이가 좋으셨어요.
부모님 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금슬이 좋으셨어요.
할머니가 젊었을 때 냇물 건너다 외나무 다리에서 떨어져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졌어요.
그런데도 할아버지가 아주 이뻐 하셨어요. 아버지가 두 분 사시는 걸 지켜 보셨기 때문에 어머님한테 잘 한 것 같아요.
신부님도 결혼 하셨으면 잘 했을 건데... 사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떠셨어요?
두 분 다 반대 하셨죠. 어머니는 나중에 받아들였지만.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육개월 전까지 반대하셨지요.
그렇게 반대하는데 굳이 사제가 된 이유가 있으셨어요?
서른 살 때, 이 길이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한 길이다 생각 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 가려고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대학을 졸업한 뒤에 신학을 공부했어요.
우리 집안이 종교가 없었거든요. 천주교에 대해 잘 모르셔요.
저 혼자만 중학교 졸업할 무렵에 혼자 세례 받았기 때문에 다 반대 하셨죠. 신학교가 7년제 거든요.
사제가 되려면 십년이 걸려요.
언제 부터 어머님과 같이 계셨어요?
저는 서울교구에 소속 인데 2년 동안 파견 왔어요. 서울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24년 째.
어려서 부터 어머니와 평생을 같이 산 셈이죠.
7남매 중 여섯은 결혼을 했으나 형님들이 특별히 어머님을 모시려하는 것도 아니고,
어머님도 다른 형제 집에 가시는 걸 불편해 하고 다른 자식들하고 안 살겠다해요.
어디 가시자 하면 다른 자식 집에 갈까 봐 안갈라하셔요. 선택의 여지가 없잖습니까?
어머니가 제일 행복했던 때는 언제셨던 것 같아요?
자식들이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잘 되는 것이죠. 굳이 제 기억을 더듬으면 ,
세째 아들이 잘 되면서 우리 집안을 캐어 할 때 가장 행복 해하신 것 같아요.
세째 형님이 잘되면서 집안을 케어할 때고. 경제적으로 도움 받고 사회적으로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을 꺼예요.
세째 형님은 해양 대학 나와 선장을 하다 교수가 되었지요.
어려울 때 자기가 버는 모든 것을 올인해 동생들 위해 경제적인 도움을 줬거든요 .
부모님이 볼 때는 제일 자랑스럽고 맘에 드는 아들일 거예요. 결혼도 늦게 하셨어요.
맏아들이 장남 역할을 못하셔서 그렇게 된 거죠. 지금도 제일 어렵게 살아요. 어머님의 아픈 손가락이지요.
어머니에게 장남은 엄지 손가락인데 너무 아프게 했지요. 어머니는 늘 오로지 큰 아들 생각 뿐이에요.
작은 아들들도 있는데. 맹목적으로 큰 아들에 의지하시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손절을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게 어려운신 것 같아요.
어머니는 일정시대와 6.25를 겪으셨는데 그 격동기를 어떻게 견디셨대요?
일본 놈들이 놋그릇까지 빼앗아가서 밭에 묻어 놓고 제사 때 꺼내다 쓰고 하셨대요.
아버지는 징용은 안가셨는데 6.25 때 동원 되서 봇짐 지고 압록강까지 끌려갔다 오셨대요.
아버님 형제가 3남 1녀인데 모두 일찍 죽었어요.
6.25 당시 동생이 대위였는데 전쟁 중에 찜차가 뒤집어지면서 죽었다하더라고요. 그 아픔을 안고 계셨어요.
여동생도 둘째 출산하면서 돌아가셨대요.
아버지는 당신이 객지에서 고생하며 벌어온 돈을 전부 다 당신 부모님한테 갖다 드렸어요.
어머니는 그것에 대한 한이 맺혔어요. 나한테 먼저 갖다 줘야지 부모님을 다 드리냐고.
할머니가 아버지한테 받은 돈을 어머니한테 생활비로 쪼끔 주셨대요.
큰 아버지가 사십 초반에 돌아가셔서 큰 어머니 혼자서 시부모를 모신 거죠. 그 형수 앞으로 자식이 7남매가 있어요.
아버지는 돈 벌어오면 부모님과 큰형님 가족에 당신 가족 까지 18명을 다 보살폈지요.
평생 아버님 몸과 마음이 오죽 무거우셨겠어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굉장히 많았어요. 저는 이해를 해요.
윗마을에 부모님과 형수님 가족이 살고 당신은 아랫 마을에 살았어요.
쉴 새 없이 일 다니면서 두 집을 다 먹여 살려야 돼고.
한 번 일 나가시면 돗단배 한 척 만드는데 한 달 이상 씩 걸리니까. 어머니 혼자 농사지으며 자식 키우고 사셨으니 어머니대로 힘드셨지요.
6.25 때 피난도 못갔는데 공산군이 내려와 도망도 못가고 밥 해내라 하면 하셨대요. 그런 아픔을 갖고 계셔요.
- 식탁의자에서 넘어지셔서 얼굴에 멍이드셨다.
어르신은 언제부터 편찮으셨어요?
편찮으신데가 없어요. 7년 전에 화장실 가다 넘어져서 고관절을 파이프로 고정해 놨어요.
그거 외에는 특별히 아픈데가 없어요.평상시 약 드시는 것도 없고. 좋아하시는 음식도 없고 다 드시는데 소식하세요.
지금은 이가 없어서 유동식을 드세요. 나이들면 공통적으로 불편한 게 변비인데 한달에 한 번 관장하고
그외는 특별히 불편한 건 없어요. 십 미터 겨우 걸을까?
어르신은 늙으막에 복 받으신 것 같아요. 신부 아드님 곁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거잖아요.
자는 듯이 가시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셔요. 저도 그렇게 바라고. 제가 사제니까 미사 중에 어머니 위해 기도 하죠.
제가 신학교 4학년 올라갈 때 세례를 받으셨더라고요. 어떻게 받으셨는지 모르겠어요. 글도 모르시는데 .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직전까지 장가가라고 반대 하시다가 당신 스스로 세례를 받고 싶다셔서 받으셨어요.
11년 모시고 살았는데 돌아기시기 직전 스스로 세례를 받으셔서 다행이죠.
여동생도 세례를 받았고요. 나머지 가족들은 냉담해요.
어머니 아버지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자식들이 모시지 않고 사제관에서 부모님을 모시는 게 쉽지 않았어요.
사제는 하느님과 결혼을 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멀어지죠. 교회서는 부모께 효도 하라 하고 부모님을 못 모시게 하거든요. 그런 문제로 교회랑 부딫치는 거예요. 그 것 때문에 내면에서 갈등을 겪다가 주교님께 허락을 받았어요.
여기 공소로 온 뒤로 신도가 적어서 마음은 편한데 몸이 고달퍼요.
여기서는 식복사가 없으니까 제가 다해야 돼요. 해먹어야 돼고 어머니까지 케어 해야 되니까.
아버지 모실 때 씼기고 빨래하는 건 오히려 쉬웠어요.
어머니는 좀 어려워서 여동생이 자주 와서 어머니 케어를 해주고 있어요.
어머님이 편히 하늘 나라로 가시는 것이 기도 제목이죠. 당신 스스로도 더 바랄 것이없으니 편안하시겠어요.
여담인데요. 신도들의 성사를 보다보면 신부님도 마음이 무거워 지지 않나요.?
사람이니까 반복된 죄를 짖고 반복 된 성사를 보잖아요.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내려 놓는 해결을 하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정지용의 향수 시 구절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 가 떠올랐다.
이제는 서러울 것도 기쁠 것도 없는 무심한 얼굴로 백수를 넘긴 어머니가 막내 아들 품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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