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임실에 모신 할머님 유택을 이장 하게 되었다.
지난해 벌초하러 가셨던 어머니는 홧병이 나서 돌아오셨다.
할머님 산소 바로 옆이 낭떠러지가 되도록 잘려나가고 봉분 위로 나무와 풀더미를 쌓아놓아
산소를 찾느라 맘고생을 하신탓이다.
군부대가 이전을 한다고 길을 내는데 하필 할머님 산소 근방이 부대 정문위치가 된다했다.
큰동생과 내가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드리기로 했다.
어머니는 생전의 할머님을 뵙지 못했다. 유택에서의 마지막 진설을 하고 절을 올리셨다.
할머니의 유골은 64년만에 바깥바람을 쏘이셨다.
백골이 진토 된다더니 수의와 머리카락은 흔적도 없이 흙으로 돌아가고
마디마디 뼈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 기록으로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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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42세의 靑春에 世上을 뜨셨다. 그때 내 나이 11세이며 누님은 14세였고 이복동생은 5세 였으니,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雪上加霜으로 약값 등 빚이 있어 논밭을 팔아 빚을 淸算했다.
그때부터 不幸이 始作되었던 것이다.
나는 11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2학기부터 신문배달을 해서 학비를 벌었다.
신문배달원 월급은 1원이었다. 수업료가 50전이었으니 학비 걱정은 면했으나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한국여성의 대표적인 可憐形의 표본이었다. 어머니는 남의 집의 궂은일을 도맡아생계를 꾸려나갔다.
지금도 記憶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어머니의 사랑이 떠오른다.
자전거를 몰고 新聞을 다 돌리고나면 12시 반 쯤 된다.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든 시간에 춥고 허기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밖에서 나는 어머니!하고 큰소리로 부른다.
어머니는 문을 열고 황급히 뛰어 나오신다. 내 두 손을 덥석 잡으시고 볼을 부벼댄다.
눈물이 글썽하여 있다. 방안의 화로에 된장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어머니는 내 손을 붇들고 아랫목 이불 속에 집어넣고 이불로 감싸 주신다.
그리고 나를 안고 한동안 있자면 온 몸에서 더운 땀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어머니 되었어요 하고 이불을 제치고 나와 늦은 저녁을 먹는다.
그 밥맛이란 지금껏 그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 밥맛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몸을 무리 해서 인지 자주 기침을 하시고 알아 눕기도 하셨다.
그때부터 해수병이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고생을 하시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예쁜 얼굴은 못 되었으나 마음만은 비단결보다도 더 고우신 우리 어머니셨다.
내가 어려서부터 생각하기를 어머님을 행복하게 모셔야 한다고 다짐을 했다.
우리는 창호지 위에 유골을 수습하고 할머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다.
파묘작업을 도와주던 아저씨가 남들은 무섭다고 멀찌기 떨어져 외면하던데
유골을 만진다며 별스럽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 몸을 만지는데 뭐가 무섭냐며 게으치 않으셨다.
나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나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몸인데 그동안 아등바등 살아온 일이 부질없다 싶었으니까.
화장하는 동안 두분은 나물을 뜯으셨다. 동갑내기시라 더욱 각별하시다.
이 분들마저 떠나시면 동생과 내가 윗사람 도리를 해야 한다.
향교집에서 고향 어른을 만난 어머니는 아주 흡족해 하셨다.
모든 일이 순조로운데다 날씨마저 도와주어서 감사하게 여기셨다.
이제 어머니의 꿈자리가 뒤숭숭할 일운 없을 것이다.
향교 집터도 들러보았다.
두 분이 신접살림을 하던 집은 무너지고 터만 남았지만 여덜살까지 이 집에서 뛰어 놀던
내 기억까지 보태져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당의 수선화와 히야신스가 활짝 반겨주고
아버지가 이곳 향교에서 독학을 하셨기에 이야깃거리가 많다.
.남동생도 묵은 기억을 끄집어 냈다.
초등3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기전까지 다니던 임실초등학교.
이모님댁에 들러 남동생이 눈을 붙이고 쉬는동안 어머니는 마당의 꽃들을 살펴 보셨다
두 할매의 눈길을 붙잡은 할미꽃
고추모종을 보고 고추 심글때 오마 하시는 어머니께 몸 좀 애끼사라했더니
죽으면 썩어질 몸 애껴서 뭣에 쓰냐셨다. 지당한 말씀.
이모부 때문에 한바탕 웃을 일이 생겼다.
내가 만들어 입은 퀼트 상의를 보고 "장터 각설이패 옷을 입고 다닌다냐" 하셔서.
어머니가 이때다 하고 말씀하셨다.
"아 글씨, 저 옷을 나보고 입으라 했당게." ㅎㅎㅎㅎㅎ
얼마전 모라도에서 어머니 옷을 사다드렸더니 노색이라고 울굿불긋한 색으로 바꿔온 일이있었다.
어머니도 고운 옷을 좋아하시는구나 싶어 퀼트 옷을 드리니까,
"남들이 없이 살아서 누더기 입은 줄 알것다. 남 우세 살 일 있냐 ."하셨다.
남동생이 "저 옷이 얼마나 비싼 옷인데요. 부잣집 사모님들이나 입는 옷인데요" 거들어도 콧방귀만 뀌셨다.
그래서 내가 다시 줄여서 입고 다니게 되었다.
퀼트에는 서양사가 담겨있다. 청교도 이민자들이 미국 서부의 척박한 땅에 발 붙이고 살면서
자투리 천이나 헌 옷을 자르고 이어붙여 옷이며 침대보를 만들어 근검절약을 했었다.
현대에는 멀쩡한 새 천을 조각내고 꿰메붙인 핸드메이드로 값비싼 섬유예술이 된 것이다.
옷을 보는 눈도 이렇게 세대차이가 나는데 민족과 문화가 다르면 그 이질감과 괴리는 더욱 벌어진다.
글로벌 시대를 살려면 나와 '다르다'가 '틀리다 '가 아니라는 인식부터 해야 한다.
작은 어머니를 원주 댁에 모셔다 드리고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다.
사촌 형재간이 친 동기 같이 우애가 좋은 것은 두 분 어머님 덕이다.
다음날 <박경리 문학공원>에 들러 이상희 시인의 그림책버스를 찾았다.
이상희 시인을 찾으니 봉사자가 대신 반겼다.
좋은 뜻으로 한길을 가는 사람들은 곁에서 보기에도 아름답다.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를 찾은 꼬맹이와 장난하는 남동생
맹꽁이가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연못가에는 아이들 소리가 드높다.
옛날의 그 집
비자루 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 같이 휑덩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가 울었고
연못에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에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아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그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 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애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하다 늙어서 이리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휑뎅그렁한 큰 집에서 고양이들에 정붙이며 살던 선생님의 쓸쓸함을 잠깐 엿보다.
이 방에서 원고지와 펜 으로 각고의 세월을 보낸 선생은
모진 세월을 잊고 홀가분히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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