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맞은 편에 앉은 군인을 보고 내가 말했다.
"군복 멋지다."
"저렇게 멋진 군복 입혀주면 얼마든지 군생활 하겠다."
옆에 앉은 남동생 말이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모르는사이에 군복 스타일도 많이 변했다.
대학 졸업식 앞두고 군에 간 남편이 입은 군복
남편이 훈련병일 때 나는 교통사고로 입원중이라 연락두절 상태였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줄 알고 우리 남편은 군생활도 제대로 못했다고.
수첩에 내 이름을 쓰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 모양이다.
78년 내가 결혼하던 해 큰동생은 공군이었다.
- 승환이 해병대 군복
승환이가 일곱살 때 풀밭에 들어갔다가 풀벌레들 밟을까봐 못 들어가겠다기에
"사내녀석이 그렇게 여려서 어디다 써먹니! 이담에 넌 해병대 보내야겠다."
결국 아들아이는 '말이 씨 된다'는 속담을 확인 시켜주고 해병대 입대를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이 생각납니다. 저도 '귀도'처럼 잘 할 자신 있습니다. 제 선택이었으니 후회 따윈 하지 않습니다. 하고싶은 말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글 대신 제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사랑합니다!" |
"점심부터 밥을 세 숟가락으로 줄였습니다. 밥이 모자라 훈련병들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 세 숟가락도 초를 세어 다 못 먹고 나왔습니다. 하하. 이런 게 군대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더러워서라도 오기로 이길 것입니다. 옆에선 식사 당번들이 밥을 남기지 않으려고 억지로 꾸역꾸역 먹고 있습니다." |
"5주차는 극기주라 밥과 잠이 제한되는데 그 때 먹으려고 교회에서 받아온 쵸코파이 2개를 숨겨두었습니다." |
"아름아, 극기주 때 쵸코렛 먹고 싶다. 껌도 좋고, 다 부스러져서 위장해도 좋으니 머리 좀 써 봐. 배고파서 눈깔 뒤집힌다." |
딸아이와 나는 초콜릿을 보내기 위해 궁리를 했다.
마이신 캡슐에 초콜릿을 집어넣고 당의정처럼 생긴 초콜릿들을 약국봉투에 담아 '중이염 약 열흘 분'으로 둔갑시켜 보냈다.
우리는 약 봉투가 무사히 전달되어 아들아이의 귀한 간식이 되기를 고대했다.
"훈련소에서 한번, 여기 와서 한번, 고막이 찡하는 느낌을 받아 의무실에 갔는데 대충 보고 이상 없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보내주신 약이나 먹자하고 보니까 약이 좀 특이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수수께끼가 이것입니까?
더욱 웃긴 것은 훈련소 교관이 중이염 환자가 있다고 이틀치를 가져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할수록 웃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위장이 너무나 감쪽같아서 교관은 물론 아들아이까지 중이염 약으로 알고 한 달이 지나서야 먹게 된 것이다.
"저는 지금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당장 읽고 싶은 책들도 많고 왜 그 때 공부를 소홀히 했을까 정말 후회가 됩니다.
'훈련소 때 생각만 가지면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 맞는 말입니다.
보내주시는 영화기사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읽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초라하다는 생각보다 현실을 잊고 행복한 상상에 빠져듭니다.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서 신문을 오리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건강하세요."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돌 감아쥐어야만 잠이 들던 꼬맹이가 대한민국 군인이 되다니!
나는 '해병대 엄마'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
해군복이 멋져서 해군에 입대한 친구 남동생도 있었다.
자, 제가 수집한 군인 인형들을 살펴볼까요?
화랑
빅토리안시대 군인
아프간 군인 (아프간 인형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디테일이 살아있다)
이란군인
미군
Vintage Rubber Squeaker Dolls~ RARE!~ Korean Boy & Girl
검색을 하다 이 인형을 발견한 순간 소설에서 읽던 '하우스보이'를 떠올렸다.
우리 현대사의 뼈아픈 이야기가 담긴 인형을 남의 나라에 둘 수 없었다.
마침내 낙찰을 받아 입양을 했다.
인형이 도착해서 살펴보니 하우스보이가 아니라 중국인형이다. 팔뚝에 찬 완장에 홍소병이란 글자가 또렸했다.
홍위병(紅衛兵 Red Guard)
중국 문화대혁명의 선도역을 맡았던 급진적인 학생들. 1966년 8월18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거행된 문혁(文革) 축하 100만인 집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해 4구(舊), 즉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타파를 내세우고 기성세대를 배격하는 등 행동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불과 반년 후에는 지나친 행동에 제동이 걸리고 문혁의 주역도 이들로부터 노동자로 바뀌었다. 이들 과격파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농촌·공장 등 직장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실권파(實權派) 타도에서 이들이 담당한 역할은 매우 컸는데, 중국의 문화대혁명에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원됐으며 이들을 홍소병이라고 부른다. |
1950년 4월 25일, 연변에서 중국내 조선족 소학생을 대상으로 한 반월간잡지 《소년아동》이 창간되여 우리 민족 청소년들에게 우리 글로 된 첫 전문교양지를 선물하게 되였다. 1957년에 와서 여러가지 원인으로 잡지형식의 《소년아동》은 정간되고 그후 1970년에 《홍소병》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여났다. 《홍소병》잡지는 당시 광범한 조선족중소학생들이 애독하는 과외독물로 되였으며 형제간에 서로 《홍소병》잡지를 먼저 읽겠다고 싸우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소년아동》잡지는 2008년과 2009년에 련속 국가신문출판총서에서 추천하는 우수소년아동잡지로 선정되고 2009년에는 길림성1급간행물, 길림성우수청소년권익사업수호터, 북방우수간행물 등 각종 영예를 안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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