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DITION: Good w/some minor staining on clothing; deterioration of male doll's shirt (see all 12 photographs; more photographs available upon request)
SIZE: Female Doll ... 21 1/2"; Male Doll ... 18"
REASONABLE RESERVE PRICE
CALCULATED SHIPPING COSTS WILL INCLUDE PRIORITY MAIL W/INSURANCE & SIGNATURE CONFIRMATION
2013년 2월 사진 속의 인형을 미국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발견했다.
셀러는 1000 불에 즉시 구매 할 수 있다고 했는데 크기가 46센티, 55센티나 되는 독특한 인형이었다.
그 인형을 놓쳐서 아쉬워 했는데
얼마 전 수집가 K 씨가 조선인형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다.
병치례하는 바람에 수중에 돈이 말라서 고민 하다가 포기 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교과서수록 동화 저작권료가 입금되었다.
배익천 선배가 "대한민국이 김향이 굶게 놔두지 않는다." 고 한 말이 생각나 웃었다,
고대하고 기다리던 인형이 도착했다. 대나무 바구니 안에 얀반 부부가 들어있다.
내가 놓친 인형보다 기품있는데다 보관상태가 좋아 가치가 있고 훌륭하다!
미국인 셀러의 증조부가 1917년 일본과 조선 여행 중에 사온 인형이라 했다.
1900년 대 초기 외교사절이나 선교사, 관광객들이 선물로 사간 민속인형 이다.
20센티,25센티 크기로 손바닥만 한 것이 앙증맞기도 하다.
파스텔톤의 치마 저고리 명주 빛깔은 또 얼마나 은은한가!
얼굴은 광목 천 위에 유화 물감을 바르고 이목구비와 머리카락, 신발은 먹으로 그렸는데 아주 섬세 하다.
1910년대 한국을 찾은 서양 사람들이 조선 인형을 보고 함박 웃음 지으며 "원더플!" 을 외쳤을 것이다.
에스닉 분위기의 솜씨 좋은 '메이드 인 조선 '에 반하지 않고 베길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봐도 혹하는데.
이 인형을 보면서 떠올린 인물이 있다.
영국인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여동생 부부의 초청으로 일본을 거쳐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19년 3월이다.
그녀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인과 한국 풍속을 그렸다.
"그림 그릴 곳을 찾아다니다가 나는 가끔 멈춰 서서 이 땅의 고요함, 평화를 만끽하곤 한다."
그림을 그리는 서양 여자를 에둘러 구경하는 조선 사람들을 피해 새벽에 나와 작업을 했다고 한다.
키스의 여동생 로버트슨 스콧 여사의 글에 의하면,
"그 무렵 "싹싹한' 일본인들에 감동을 한 서양인들이 협조적으로( 때로는 얕잡아 보기도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이들이게 해주었고 조선은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암살 당하는 슬픔을 겪으면서 중세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 자매는 조선을 여행하면서 목격한 식민지
조선의 고통을 그림과 글로 남겼다.
그렇게 일본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이 만든 인형이다.
먹으로 그린 망건 위에 갓을 썼는데 턱선을 따라 귀를 그렸다.
두루마기 옷고름 풀고 저고리 웃고름 풀고 허리띠 풀고 대님 풀고 옷을 하나 하나 벗겨 보았다.
조선시대는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왕실과 벼슬아치, 선비와 서민, 천민의 옷이 달랐고,
관혼상제 때 입는 옷, 승려가 입는 옷등의 직업과 상하계급에 따른 의복이 나라 법으로 제정됐다.
남자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외출 때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소창의나 두루마기를 입었다.
갓을 쓰고 버선 신고 짚신을 신었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가 짧아져 깃이 바뀌고 안섶, 겉섶, 무가 넓어지고 품도 넓어졌다.
남자바지는 통이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었는데, 넓은 바지를 입을 때에는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매었고 발목을 대님으로 묶었다.
일할 때에는 통이 좁은 무릎길이의 베잠방이를 입었다.
목화가 나지 않던 관북지방에서는 겨울에 누비옷을 입지 못하고 삼베옷을 입어야 할 정도였다.
이것을 딱하게 여긴 인조임금이 관북지방 백성들에게 저고리 500벌과 낙폭지(창호지처럼 질긴 종이)
400장을 보내 겨울용 옷을 지어 입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형 바디는 솜과 왕겨 혹은 건초들로 속을 채운 것 같다.
몸통은 재봉질을 했고 옷은 손바느질을 했다.
두루마기 겉감은 명주 안감은 광목으로 만들었다.
조선 사람들이 신문물인 재봉틀을 처음 접했을 때 얼마나 신기해 했을까?
여인의 넙데데한 얼굴에 초승달 눈썹과 외꺼풀 눈매, 살짝 올라간 입매를 그리고 쪽진 머리에 비녀도 그렸다.
유화 물감으로 표현한 피부에 발그레한 볼연지도 그려넣었다.
조선 중·후기에 저고리 길이가 짧아졌는데 이를 커버하기 위해 겨드랑이 살을 가리는 가리개용 허리띠와
‘졸잇말’이 생겨났다. 졸잇말은 가슴의 성장을 억제시키기 위해 베로 만든 것이었다.
졸잇말은 훗날 호서지방에서 ‘주먹다듬이’라는 성년식풍습을 낳기도 했다.
즉 젖망울이 생기기 시작한 소녀에게 손가락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최대한 치마끈을 양쪽에서 당겨 옥죈다.
젖망울이 서 아픈 가슴을 옥죄어 매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
치마는 신분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었다.
양반 부녀자는 넓고 긴 치마에 금박을 입혔다.
일반 부녀자는 민치마, 하인배는 종아리를 미처 가리지도 못하는 짧은 두루치를 입었다.
조선 여자가 입었던 평상복은 저고리와 적삼, 치마, 단속곳, 바지, 속속곳, 다리속곳이었고 버선과 짚신을 신었다.
특히 유교의 영향으로 겹겹이 속옷을 입었는데 다리속곳 - 속속곳 - 속바지(고쟁이) - 무지기치마 - 대슘치마 순으로 입었다.
밑이 터진 속속곳
가장 속에 입었던 다리속곳은 흰 목면으로 만들어 허리띠를 달아 입었다.
그 위에 베나 모시로 만든 속속곳을 입었다.
속바지는 종류가 다양했다. 속치마 형 바지, 밑이 없고 양다리만 있는 바지,
밑과 뒤가 트여 여미게 되어 있는 바지, 고쟁이 형 바지, 가랑이가 넓고 밑이 막힌 너른바지,
밑이 막힌 개량바지, 밑이 트인 조끼허리 형 바지, 앞과 밑이 막히고 엉덩이 부분만 트인 바지 등
실용성을 갖춘 속옷들이 겉치마의 ‘페티코트’ 역할을 했다.
일고여덟 겹의 속옷을 입어 엉덩이 부분이 풍성하고 발목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항아리실루엣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풍속화와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속옷까지 갖추어 입은 데서 비롯된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속옷풍습은 1920년대로 넘어서면서부터 단순화되었다.
다리속곳, 속속곳을 팬티 혹은 블루머로, 단속곳과 무지기는 속치마로 대체되고
자유복장시대로 접어들면서 패션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 무렵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도 밑이 뚫린 속옷을 입었다.
유럽 여성들도 한복치마처럼 엉덩이를 강조한 크리눌린 이나 버슬 드레스를 입었기에
밑이 터진 실용적인 속옷이 만들어진 것이다.
콜셋을 졸라매서 잘록한 허리를 만들고
Crinoline Hoop Cage
풍만한 힙을 강조하려고 패티코트 속치마를 부풀 수 있게 크리눌린 후프를 착용했다.
겉옷의 실루엣을 살리기 위해 여러겹의 속옷을 입었으니
밑이 터진 속옷의 디자인은 기능과 편리성을 위해 고안 된 것이다
360도로 한 껏 부풀려진 크리눌린 스커트의 불편함을 개선 한 것이 힙 부분만 강조한 버슬 드레스이다.
VICTORIAN LADY'S BUSTLE BODICE c.1885
힙쿠션 ,버슬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여성들은 속옷을 입었다. 그러나 로마제국 멸망 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여성들을 속옷을 입지 않았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 하나 더!
브래지어 후크를 발명한 사람은 '허클베리 핀'을 쓴 대문호 마크 트웨인이다.
[사무엘 클레멘스(마크 트웨인 본명)가 특허를 받은 브래지어 후크]
풍욕도 시키고 옷을 잘 다려서 입혀 주었다. 그동안 잘 보관해준 미국인에 감사 하면서.
우리 문화 유산이 분명한데 미국의 경매 시장에서 '오리엔탈' '차이나' '제팬'으로 구분 되었다가 한국으로 돌아 온 1900년 초기 엔틱 조선인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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