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1834~1896)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시인, 소설가, 번역가, 건축사상가, 공예가, 디자이너, 정치가, 사회주의자이자 개혁가, 생태주의자, 환경보호운동가, 문화유산 보존운동가, 아나키스트, 정치평론가, 교육사상가 등 다양한 활동으로 많은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모리스는 자본가인 증권 중개업자의 아들로서 런던근교 에식스 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자연과의 교감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자연의 색, 맛에 대한 풍부한 감성"은 그의 작품세계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학창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워터하우스(현재 "윌리엄 모리스 미술관)에서 1856년까지 살았다.
10대 시절에 엄청난 독서를 했고, 20~30대 시절은 시, 미술, 건축 등의 예술에 흠뻑 빠져 있었다.
옥스포드를 졸업한 모리스는 건축가 스트리트의 제자가 되었고 평생 동지가 된 번 존스를 만난다.
번 존스가 화가 이자 시인으로 명망있는 로제티의 제자가 되자 모리스도 그와 인연을 맺는다.
로제티의 시와 그림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모리스도 그와 디자인 작업을 했다.
모리스보다 6살 연상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로제티에게 영향을 받은 모리스는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건축가와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가 생각한 예술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생활환경 전반에 걸친 삶의 디자인이었다.
즉 집의 설계는 물론 실내디자인과 생활용품 등 모든 것을 계획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이런 디자인 개념으로 25세에 자신의 신혼집 "레드하우스(Red House)"를 지어 영국 건축을 변화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 레드 하우스 /2004년부터 네셔널 트러스트 소유가 되어 일반에 공개 되고있다.
그가 디자인하고 친구들과 공동작업 한 레드 하우스의 실내 장식에 2년이나 걸렸지만 아름답고도 슬픈 집이 되었다.
모리스의 아내 제인은 결혼 전 로제티의 모델 일을 했는데 제인은 약혼자가 있는 로제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당시 로제티는 약혼자 시갈과 결혼을 미루면서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다가 마지못해 결혼을 했다.
모리스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천한 신분의 제인과 결혼을 했다.
모리스의 신혼집은 번 존스와 로제티 부부를 비롯한 지인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로제티의 계속 된 여성 편력에 아내 시갈이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
그녀가 자살하던날 로제티는 경제적 후원자인 매춘부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로제티가 신경쇠약에 걸리자 제인이 극진히 간호 했는데,
그들의 불륜은 로제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제인과 로제티의 염문으로 보수적인 19세기 영국이 들끓었고
모리스는 그런 모욕을 견뎌낼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다고 한다.
계속 된 아내의 불륜으로 파경을 맞은 그는 6년만에 레드 하우스를 떠났다.
로제티가 그린 제인 모리스가 그린 제인
로제티가 그린 아내 시갈
로제티가 떠난 뒤 제인은 시인 블런트와 새로운 사랑에 빠졌고 그 와중에 모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 사후 제인은 모리스기념관을 짓고 딸을 도와 모리스 작품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정적으로 불운했던 모리스는 음주와 폭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간질까지 앓았다.
어쩌면 그는 '일에서 얻는 기쁨을' 인생의 덕목으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레드 하우스 실내
19세기는 산업화에 따른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본격적으로 촉진되던 사회였으며,
이에 따라 귀족의 전유물이였던 예술이 일상생활에 침투하였다.
값 싸고 조잡한 기계생산 공예품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술 공예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중세시대의 수공예 생산방식으로 복귀하는 것을 주장했다.
미술 공예 운동에 영향을 미친 사상가 존 러스킨은 예술 창작성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는데,
디자인은 인간의 기쁨과 행복을 반영해야 하고 자연적인 형태와 재료가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세 길드 조직을 모델로 건축가, 공예가, 미술가의 협업으로 통일된 건축 디자인을 추구했다,
공동 작업을 한 구성원은 그에 따른 이윤을 공동 분배하였으며 노동과 생활의 통합화를 추구하였다.
구성원은 수입 중 10분의 1을 공동체를 위해 헌납하여 토지를 구입했는데,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존 러스킨의 사상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윌리엄 모리스였다.
삶의 예술화를 모리스는 꿈꾸었다.
자신의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며 옷과 음식을 만드는 즐거움이 일상생활 속에 스며든 멋진 삶을 .
사실 모리스가 반대한 것은 영국 산업자본주의 체제를 통한 부의 축적 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 대량채취,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는 전 세계의 자연환경과 자원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지구환경 파괴로 이어졌다.
예술적 가치란 인간의 생명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모리스의 사상을 절감한다.
들꽃을 소재로 벽지나 카페트 등 생활용품을 디자인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시를 썼으며,
모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하면서 "희망차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 애썼다.
모리스는 40대 이후 그때까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정치에 참여한다.
그는 산업혁명기의 대량생산이 낳은 비인간적인 현실을 비판하면서 "즐거운 노동이 진정한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므로 모리스는 정치가 보다 사상가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술과 노동에 대한 끊임없는 찬사로 대중 강연을 다니는 그의 강연노트에는 항상 새로 작업할 패턴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고한다.
윌리엄 모리스는 정식으로 예술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길드나 공방 출신도 아니다.
그의 이력은 당시 사회 전반에 만연하던 천재성에 의존한 직업예술을 생활예술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이 낳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집이라고 답하리라.
그 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리라."
그는 말년에 코츠월드의 전원마을 켐스콧에서 책 만드는 일에 전념했고.
세계 3대 인쇄본의 하나로 꼽히는 초서집을 만들었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한(As I Can)"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삶을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일,
곧 "삶의 예술화, 삶의 자연화"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1896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한 모리스의 죽음을 지켜 본 의사는
"윌리엄 모리스였다는 것이 사망원인이다. 그는 평생 열 사람의 몫을 살다갔다"고 말했다.
모리스가 말년을 보낸 코츠월드 캠스콧 장원 전경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를 둘러 보고 집안 곳곳에 스며든 그의 예술 감각을 배우고 싶다.
나 또한 "일에서 얻는 기쁨'을 알기에 ' 즐거운 노동이 예술을 낳는다'는 그의 말에 동조한다.
내친 김에 '아트 앤 크라프트 운동'이 유럽 정원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공부 합시다.
핸리호어( 1705- 1785)는 서른이 되기전 은행가였던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막대한 재산과 집을 상속 받았다.
그는 상속 직후 이탈리아로 장기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 방방곡곡을 다니며 조각과 그림을 수집했다.
그가 감동 받은 그림으은 풍경화 였다.
17세기에 이르러 화가들이 종교화에서 벗어나 자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여행을 마친 그는 자신의 정원을 풍경화처럼 만들려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에 부딫쳤다.
-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 정원/다양한 색상의 초화를 식재해서 화려함의 극대화.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프랑스식 정원을 뒤엎고 자신만의 풍경식 정원을 만들었다.
서른 여섯에 시작한 일의 완성는 20년이 지나 그의 손자에 의해 완성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영국 풍경식 정원은 스타워 헤드 정원(stourhead garden)이다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도 매료되어 풍경식 정원을 가꾸게 되었다.
풍경식 정원이 확산 된 것은 전문정원 디자이너의 등장이 한몫 했다고 한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는 가디언지에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프랑스나 네델란드식 정원을 비난하고 자연스러움 만큼 위대한 디자인은 없다는 사상을 내세워
정원 디자인의 개념을 바꿨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 오랑주르/ 정형화된 동서 남북 대칭 형 가든
18-19세기 유럽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다량생산으로 생산품은 싸지고 삶도 편리해졌다.
그러나 20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안티 산업혁명 바람이 불게 되었다.
1910년대 아트 앤드 크레프트 운동(Arts & Craft Movement)의 창시자 윌리엄 모리스( 1834- 1896)는 산업혁명을 거부하고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지는 생활공예의 감각과 장인의 손맛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때 거트루드 지킬 이란 여성 가든 디자이너가 아트 앤드 크레프트개념을 정원에 도입하여 건축물이 식물로 인해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췄다. 거트루드의 신개념 정원은 '예술의 정원'이었다.
영국의 여성 가든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 1843- 1932)
그녀는 화가이자 자수 전문가였다.
쉰을 넘기면서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지자 제 2의 삶으로 선택한 것이 정원 일이었다.
그녀를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말이 "거트루트가 시력을 잃은 것이 정원 역사에 큰 축복이었다."이다.
식물을 예술의 소재로 발견하기 시작했고 그녀만의 독특한 예술 감각으로 가든디자인 분야를 개척한 것이다.
서양 정원의 역사를 논할 때 거트루드 이전과 이후로 구별할 정도로 가든 디자인 분야의 한 획을 그었다.
작가, 화가, 사진가 ,디자이너, 다재다능한 거트루드는 식물의 습성을 파악하고 계절적인 느낌까지 살려서 식물을 조합하는 능력이 있었다.
식물이 색감에 따라 모아지고 식물의 형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파고라와 아치를 만들고 계단 옆에 빈자리를 만드어 식물이 피어나게 하는 등 디자인적 장치를 한 것이다.
일테면 그녀는 식물로 그림을 그린 셈이다. 색감, 질감, 형태를 고려해 식물 디자인을 했다.
구조의 정원이 식물의 정원으로 남성의 정원이 여성의 정원으로 바뀌게 된다.
원예 농장 식물 재배자들은 꽃의 색감을 연구하게 되고 매년 플라워 쇼를 개최하여 신품종을 선보이게 된다. 이로싸 원예시장이 급성장 하게 되었다.
유럽의 궁정 정원 디자인은 남자들에 의해 조성 되었기에 도식적이고
좌우 대칭적인 틀 안에 식물을 심는 방법이 정형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트루드의 정원은 이전의 정원들과 대조를 이뤘다.
꽃의 색상을 이용한 그림같은 화단 디자인이 등장하면서 나무 중심의 정원에서 화려한 꽃 중심의 정원으로 변화했다.
식물의 색감을 이용한 초본 식물 위주의 거트루드의 화단은 400여개가 넘지만 실제 모습을 간직한 화단은 드물다
초본 식물은 그 생명이 10년 미만이라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가 힘들어지고 그 원형이 흐트러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거트루드가 남긴 서적과 도면을 바탕으로 그녀의 정원이 재현된 헤스터콤 정원이 있다.
화가였던 거트루드는 색감에 민감했다. 식물을 차가운 느낌 따뜻한 느낌으로 구분하고 그룹으로 식재했다.
식물의 개화 시기를 고려해서 한 꽃이 지고 나면 다른 꽃이 피어 날 수있도록 적절히 안배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식물의 생육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가 활동 하던 시기는 모네 고흐 고갱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시시각각 빛의 변화에 민감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시선은 그녀의 정원에서도 빛을 발했다.
로렌스 존스턴(1871-1958)Lawrence Johnston은 어머니가 돌아가쉰 뒤 물려받은 정원에 새로운 정원을 만들었다.
방을 나누고 색감에따라 식물을 디자인하는 그린룸 개념을 완성
단일 색감으로 통일감있는 또는 혼합된 색상의 정원을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숲속같은 ,정원전체를 마치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갤러리 같은 느낌의 정원디자인을 했다. 말년의 그는 심각한 천식으로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네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하고 떠난다.
윌리엄 로빈슨( 1838-1935)은 잡지 기고글 연재를 통해 영국 전역을 코티지 가든 열풍에 빠지게 했다.
자연스러운 영국 서민들의 코티지 정원의 형태와 야생화의 종류, 4계절 관리 방법을 연재했다.
이 당시 윌리엄 모리스의 아트엔 크라프트 운동과 연계 되면서 서양 정원역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 앤 해더웨이 코티지 정원
코티지 정원의 대표적인 정원은 세익스피어의 아내 앤 해더웨이의 친정집 정원으로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초기 코티지 정원은 상업적인 식물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기본 채소와 허브 등 수종이 많지 않았고 버드나무 가지를 역어 만든 퍼고라가 있었다.
현재의 코티지 정원은 정원을 쪼개고 분할 해서 그린룸 형태를 취한다.
색감별로 식물을 모으고 섞어서 차가문 색감, 따스한 색감,파스텔 색감 등으로 수채화 정원을 만들어 냈다.
마리아 부인과 화가 윌리엄 쿡이 함께 만든 정원 문화재 1등급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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