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톤 언더 워터- 챨스턴 하우스- 세익스피어 생가
찰스턴 하우스의 첫인상은 소박하고 수수했다.
오픈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아 있어서 전날 가지 못했던 세익스피어 하우스에 갔다가 루쌈 하우스로 발길을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대문 앞에 펼쳐진 널따란 양 목장을 보고 마음이 변했다.
양들의 쉼터가 저 정도로 아름다운데 집안은 오죽하겠나 호기심이 생겼다.
오락가락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저택에 붙어있는 교회에서 사진찍기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찰스톤 하우스는 양모 사업가 윌터 존스가 1607-1612년에 완공한 4층짜리 저택이다.
웨일스에서 대대로 양모사업을 하던 그가 1604 년에 코츠월드로 이주해서 지은 집이다.
외관상으로 작아보이지만 가운데 중정을 둘러싸고 정사각형 4층 건물이 올려져 실제 내부는 넓다.
현재는 네셔널 트러스트에서 관리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하인들의 거처와 마굿간이 있고 오른편에 교회가 있다.
영국 가드닝의 특징 중에 등나무 같은 덩쿨 식물이나 장미 류를 벽에 붙여서 키우는데 오랜 세월 수형을 잡아서 키우기에 관상 가치가 있다.
대문 옆에 서양 배 나무를 붙여 키웠는데 배꽃이 피었을 때 얼마나 환상이었을까?
그랜드 플로워에 들어서면 어르신 자원봉사자들이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집주인 윌터 존스 부부의 스테인드 글라스
16-17세기에 중국의 가구와 도자기는 부의 상징이었다.
집안 곳곳에 놓인 중국 가구들과 도자기로 당시 그의 재력을 가늠해 볼 수있었다.
심지어 여인들이 쓰는 반짇고리와 핀쿠션까지 중국제 라니.
처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 자원 봉사자들이 관광객을 맞이했는데 꽃을 꽂아둔 솜씨도 수준급이었다.
부엌의 은식기들은 세월의 더깨가 앉아 빛을 잃었다.
이 자리에 대단한 거물들이 초대 되고 숱한 가십거리도 만들어냈을 터이다.
4층에 있는 오락실. 이곳에서 댄스 파티도 하고 운동도 했단다.
드레스 폼과 욕조 화장실 변기
찰스톤 하우스는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진귀한 살림살이들이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 잡고 발길을 잡았다.
프랑스 앙뚜아네뜨 왕비 방의 비밀 통로처럼 이 방에도 벽지로 위장한 벽장이 있었다.
벽장 속에 군인을 숨겨주었다는데 가슴 졸이는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영국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곳은 이 집 곳곳에 있는 정원이다.
1612 년 이 집을 지었을 당시 월터 존스에 의해 배치 된 정원의 모습이나 도면은 사라졌지만
정원을 둘러싼 벽 정원은 지난 17 세기에 유행한 가든 스타일에 따라 재배치되었다.
교회 입구와 연결되는 테라스 아래 최고의 정원이 있었다.
마구간을 포함 한 쪽의 베이스 건물과, 저택의 측면으로 관상용 식물 재배 과수원과 텃밭, 가장 아름다운 관상정원으로 구성되었다.
이 저택의 정원들은 1890 년대에 보수를 시작해서 1900 년대에 원형 울타리를 추가 한 후 1972 년에 다시 한 번 보수되었다.
중세시대에 식물을 재배했던 테라스의 오래된 경계인 벽의 잔해가 남아있는 세 번째 테라스는 부엌에 딸린 채소 재배 정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크기를 가늠할 수없이 우람한 나무들이 저택을 둘러싸고 여행객을 압도했다.
어디 나무 뿐인가 돌쩌귀와 녹슨 무쇠경첩과 틀어진 나무 문짝 마저 고고한 역사를 품고 있는 것을.
세익스피어가 태어난 집은 영국 중부 작은 마을 스트렛 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다.
그는 18세때 8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해서 3명의 딸과 아들을 두었다.
마을에는 생가 이외에도 셰익스피어와 가족들이 묻힌 홀리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나
딸 수잔나의 집인 홀스 크로프트(Hall's Croft)도 볼 수 있다.
세익스피어 생가.
그는 이 마을 문법학교에 다녔지만 열 서너살 때 더 이상 학비를 감당 할 수없게 되자 자퇴를 했다.
스물 두어살 때 런던으로 갔는데 극장 앞에서 손님이 타고 온 말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잡역부를 거쳐 연기자가 되었다.
그가 스물 여덟살이던 해에 연극계에 떠돌았던 비방으로 가득찼던 글들이 화재가 되었다.
.....난데 없이 까마귀 한 마리가 연기자의 거죽을 뒤집어 쓴 채 운율도 맞지 않는 시 구절들로 뛰어난 작가들과 재능을 다툴수있다고 여기는 듯 하다. 그는 고작 잡역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파렴치하게 자신만이 감동적인 무대를 올릴수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글을 쓴 사람은 대학 재인파에 속하는 로버트 그린인데 당대에 런던 문화계에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세익스피어가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질투심을 노출 하고 만 것이다.
그가 죽은 뒤 문집에 실려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소위 대학 출신 지성인 집단의 시기 질투 속에서 세익스피어가 얼마나 고초를 겼었을지 짐작 되는 대목이다.
세익스피어가 한창 전성기 때 고향 마을에 칩거 한 것도 그의 출생 배경과 내세울 것 없는 학력 때문 이었다니.
그는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쉰 두 살에 운명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애도의 시를 써준 사람도 없었으며 고향 사람들은 그가 런던에서 유명인사였다는 것 조차 몰랐다. 그의 유언장의 서명은 모두 대필이었고 서명 방식도 제 각각이었으며 이름 철자가 틀리기도 했다.
그런 저런 이유들로 그의 사후에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 되었다.
그들은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에 다닌 적이 없는 사람은 세익스피어가 될 수없다고 단언했다.
비평가들은 귀족 계층의 어떤 인물이 세익스피어 이름을 빌려 극본을 발표했다고 단정 지었다.
서명도 제대로 못한 이가 어떻게 30여 편에 달하는 대작들을 완성 했을까?
문법학교의 초급 과정 학력으로 역사 정치 문화 예술을 아우르는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그가 영어권에서 어휘력이 가장 풍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감안 할 때 더욱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귀족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광대가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 하고 극본까지 창작할 수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대의 극작가 중에 스물 아홉살에 피살 당한 크리스토퍼 말로 가 세익스피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지 그가 케임브리지를 나왔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피살 당한 사람은 말로가 아니며 정보부에서 사기극을 벌인것이라고 주장했다.
말로가 유럽 대륙으로 도주한 뒤 세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극본을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세익스피어보다 더한 고초를 당한 작가있었는데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스물 세살에 군에 입대한 뒤 해전에서 왼손이 불구가 되었다.
장애를 입고도 군복부를 계속 하다 해적에게 사로 잡혀 5년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부친 사망후에 다시 군복부를 했는데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출옥 후에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했다.
책이 출간되던해 그의 집 앞에서 살인사건이 일어 났는데 엉뚱하게 살인혐의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세르반테스 말년에 다른 이가 속편을 썼다. 그는 작품 도둑에 맞서 진짜 속편을 쓰기 시작 했는데 마침내 속편이 나온 이듬해 부종이 악화 되어 세상을 떠났다.
세르반테스는 가짜책이라는 모함을 받았고, 세익스피어는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는 모함을 받았다.
그 두 사람은 한 날 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1616년 4월 23일. 이 날은 세익스피어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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