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시에 히드로 공항갈 때 우버 택시를 이용했다.
처음 이용하는 승객은 10 파운드 깍아준단다.
아름이가 회원가입하고 숙소 주소지를 입력했는데 숙소 가까운 곳에서 운행하는 택시들이 화면에 뜨고
기사가 클릭을 했다. 화면에 기사 얼굴과 신상이 뜨더니 금새 숙소에 도착했다. 참 편한 세상이다.
정장 차림의 말쑥한 기사가 메너도 좋다. 요금은 자동으로 카드결재 되었다.
여행객에게는 안전하고 바가지 쓸 염려도 없고 아주 편리한 택시다.
다른 나라에서도 공항 이동 할 때 우버 택시를 이용했다.
오전 9시 10분에 네델란드 스키폴 공항에 도착해서 20분 만에 암스테르담 센트럴 역에 도착했다.
센트럴역- 국립박물관 -고흐미술관- 레이스 광장 -꽃시장-문트광장-왕궁- 안네프랑크 하우스- 렘브란트 생가-워털루광장
코인락에 케리어 맡기고 구시가지 관광에 나섰다.
영국보다 남쪽이니 따뜻할거라는 추측은 빗나갔다. 암스테르담은 사통팔달 운하라 바람도 세고 추웠다.
8월 초순 날씨가 10월 같았다.
아이 암스테르담 시티 카드를 사면 박물관 미술관 무료입장에 페리 타고 운하도 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미술관과 박물관 관람에 주력하느라 페리를 탈 시간이 없었다.
아이 암스테르담 조형물에서 인증샷도 찍고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 읽혔던 그림책 주인공 '미피 ' 조형물도 보고
국립미술관을 찾아갔다. 이곳에 꼭 봐야할 작품이 있다.
영국과 네델란드 사람들의 꽃꽂이는 스타일이 달랐는데 칼라부터 크게 차이가 났다.
이 미술관의 신주단지격인 렘브란트(1606∼69)의 '야경'은 길다란 2층 중앙홀의 맨 뒷방에 특별전시 되고 있다.
렘브란드가 36살이던 1642년,그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로 6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다.
더 이상 예술 창작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으며 거리의 부랑자처럼 황망한 장례를 치렀다.
그 사건은 18명의 암스테르담 시민대가 자신들을 한 화폭에 그려달라고 주문한 일이 화근이 되었다.
렘브란트는 그많은 사람을 한 화폭에 담기 위해 고심을 했다.
궁리 끝에 경보가 울린 상황에서 계급에 따라 제각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황을 묘사했다.
이 그림이 세계 미술사상 가장 진귀한 작품<야경>이다.
그림을 본 시민대원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공평치 않은 것이 불만이었다.
뒤쪽에 배치된 사람들은 크기도 적은데다 어두워서 존재감이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림을 사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법정에 고소까지 했다.
<야경>은 예술적 안목이 없는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더 한심한 일은 미술평론가들은 변론을 하지 않았고 화가들조차 구명을 하지 않았다.
시민대는 밝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 18명이 나란히 앉아있는 그림을 요구했다.
렘브란트는 자존심을 굽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그림은 외면당했고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는 묵묵히 그림에 매진했다.
작품의 성과가 좋아지는 반비례로 빚이 점점 늘어났다.
살던 집마저 경매 처분 되고 입에 풀칠조차 막막해진 그는 제자의 화실을 찾아갔다.
스승의 화법을 모방하는 제자 앞에 옷을 벗고 살인귀 분장을 한 채 모델이 되었다 .
제자에게 남보다 못한 모델료를 받았다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죽지 못해 살았을 것이다.
안목이 어두워 거장을 몰라보고 거리의 부랑자로 만든 암스테르담 사람들의 후손들은
렘브란트 덕분에 문화시민이 되었다.
훌륭한 작가들은 의식이 앞서서 당대에는 대접을 못받다가 후대에 빛을 보기도 한다.
<야경>의 일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관람하던 정신이상자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찢어졌다.
17세기 네델란드에서 구교의 퇴조는 예술의 상실을 의미했다.
개신교는 기존 종교미술을 우상숭배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시기 '시민사회적 가치 지향성'과 에너지는 네덜란드 미술에 그대로 방출되었다.
화가들이 시민들의 초상화나 정물화 등으로 활로를 찾으며 대중예술이 꽃피었다. 농부가 그림을 사고 이발소나 푸줏간에 그림이 걸리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작품이 거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가 시장에 내다팔 작품을 제작하는 시민사회의 예술적 활력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부흥기로 만들었다.
그런 만큼 대중들의 취향과 기호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가 없다.
-베르메르. 밀크 메이드
베르메르(1612∼75)의 실내화들은 당시 네덜란드 시민사회의 풍속이 잘 드러나 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주제나 내용보다 화면 구성과 표현의 심미적 기능을 우선 한다.
< 우유 따르는 하녀><편지를 읽는 여인>이나 <연애 편지>의 여인 모두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연출하고 있으며 무척 실감나고 자연스럽다. 인물이 스냅 사진처럼 단순히 '눈에 잡힌 대상'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오면 가장 부러운 장면이다.
유치원부터 대학생에 이르기 까지 박물관 견학 수업을 하는데 우리의 수업 방식과 크게 다르다.
우리는 주마간산식으로 쓱 훑어보고 지나 가면 끝이다.
이 곳의 수업은 예술적 감흥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는 것.
보고 느낀 다음 토론을 하고 더 나가서 소감문을 쓰는 것으로 안목을 높일 수 있게 해준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내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인형의 집, 17C)
이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매혹적인 작품이 '17세기 인형의 집'이다.
현 존하는 인형의 집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려진 이 인형의 집은 은 17세기 후반 왕족과 귀족들의 볼거리로 제작된 장식미술품이다
이 인형의 집에는 당시 일상생활용구, 가구, 식기류, 침구류, 인테리어 ,신분에 따른 의복을 통해
의식주 문화를 엿 볼 수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침실
안주인의 내실. 주인과 안 주인의 침실 사이에 드레스룸이 있었다.
관람객이 많아 포토 타임을 얻기도 힘들다.
네델란드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인형의집은 다리가 달린 케비넷 스타일이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딸이 태어나면 인형의집을 선물 했는데
인형 놀이를 통해 예절을 배우고 인형 옷을 만들며 바느질 수업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귀족들이 인형의 집의 정교하고 앙증 맞은 아름다움에 매료돼 앞다투어 제작하고 수집하기에 이르렀고
왕궁에까지 유행을 시켰다.
미술관에 있는 도서관.
책의 표지나 내지의 장정 디자인도 예술품이다.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로 걸어갔다.
광장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는 사람이 관광객들에게 모이를 나눠 주었다.
비둘기들이 우르르 날아드는 것도 무섭고 손목에 올라 앉은 비둘기도 무거웠다.
유명인, 스타들의 밀납인형이 전시된 <마담 투소>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 하우스 줄이 건물을 돌고 뱀꼬리처럼 늘어졌다.
안네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다.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과 어머니 메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의 소녀였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자 안네의 아버지는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했다.
안네는 1942.6.12 열세 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을 '키티'라 부르면서 편지를 쓰듯,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중 1때 영어 선생님께서 원어로 읽어주던 기억이 또렸하다)
'마음의 안식처'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일기장을 통해 나치 치하를 살아냈던 유대인들의 자서전을 남긴 셈이다.
안네는 일기장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고 적었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은신처에서 몰래 살았던 기록이, 잘 참고 견딘다고 믿었던 종이에 남았다.
이 일기의 진위여부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분석결과 그녀의 일기임이 밝혀졌다.
안네의 아버지가 마련한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는 8명의 유대인들 ,오토 프랑크 가족 4명,
판 펠스 일가 3명, 치과의사 뒤셀이 숨죽이면서 살았다.
그녀의 일기에는 날이 갈수록 성숙해져 가는 안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숨어산 지 1년 반이 지나자 이렇게 쓴다.
"아마 당신도 1년 반이나 갇혀서 지낸다면 종종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있을 거예요.
.................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나는 이런 걸 동경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죠.
우리 여덟 사람 모두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1944년 7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안네 가족은 은신처를 떠나 자유를 만끽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비밀경찰에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9월 6일 안네는 폴란드의 작은 마을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판 펠스 씨가 제일 먼저 가스실에서 사라졌고,
안네의 언니 마르고를 '어떻게' 하려던 경비병에게 대들던 어머니가 두 번째로 사라졌다.
은신처에서 같이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던 남자친구 판 펠스 씨의 아들 페터도 사라졌다.
1945년 3월,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된 안네와 언니 마르고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두 자매가 죽은 날짜는 영국군에 의해 수용소 사람들이 구출되기 한 달 여 전으로 추정한다.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게 되었다.
은신처에 버려져 있던 안네의 일기는 은신생활을 도와주었던 미프 부인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고,
훗날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어 전 세계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문트탑 근처에 꽃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튜립,아마릴리스, 히아신스 같은 구근류와 꽃씨들을 판다.
렘브란트 광장의 <야경> 조각작품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든 남동생을 보고
"헤이, 제펜, 나 좀 찍어 봐. 내 수염 근사 하지 않아" 하고 소리쳤다.
워털루 광장 가는길에 대형 빈티지 샵이 있기에 들어갔다.
따뜻한 양모 숄이나 케시미어 가디건을 건질까 하고 .
암스테르담 여자들이 한 등치 하는데 패션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패션은 그닥 볼품이 없었다.
우리는 한 여름에 벌벌 떨고 다녔다.
가죽과 패딩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네델란드는 화훼산업이 발달한 나라다.
차창밖으로 화훼단지를 볼 수 있겠지, 꽃이 만발한 들판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기대는 여지없이 어긋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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