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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김향이의 블로그 세상

문득 돌아보니 한 순간

농부일기

1207회 24년 1월 판대리

멀리 가는 향기 2024. 1. 29. 14:42

 

삶의 이정표  '무엇'을  찾았으나 

'어떻게'  이뤄야 할지는  아직도 오리무중.

 

1월 1일

올해가 용띠라니 그 기운 받아 액운을 쓸어내고 24년 첫 날 맞이 

 

1월 2일   양동면  쌍학리 / 택풍당 

 

발이 깨지게 시렵다는 엄니 모시고 양동문화센터 목욕탕 다녀오는 길에 

쌍학리 입구의 <택당 이식 택풍당> 이정표를  따라나섰다.

 

이식(李植, 1584~1647)은 조선 중기 한문4대가 중 한 사람. 허균, 이안눌, 정철 문하생.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있었고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 

1613년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설서(說書)를 거쳐 벼슬에 올랐으나 ,

선오당 이시 (李蒔)의 시조에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시 1569년(선조 2) -1636년(인조 14)

아버지의 도(道)를 굽혀서까지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들어 학업에만 전념

오계서당을 짓고 많은 학자들을 길러냈다.

 

 

 광해군 11년(1619) 이식 또한  낙향하여  택풍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

이식은 대북세력의 영창대군 살제와 인목대비 폐모론에 비판적 입장이라

현실 정치의 반발로 낙향하여 택풍당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수차례 광해군의 출사명을 거부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대사간ㆍ대사성ㆍ좌부승지, 대사간,대제학ㆍ예조판서 역임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과 택당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장문의 상소에서

“정묘호란으로 맺은 형제맹약은 조선의 치욕이니 임금이 와신상담하여 국정을 개혁하고,

금나라는 맹약을 무시하고 반드시 다시 침략 할 것이니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국민 개병제에 바탕을 둔 양병설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백성들을 소요하게 할 뿐이라고 시행하지 않아

불과 10년도 안된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조선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병자호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여 

중국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관리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2년(인조20) 택당은 인조가 청에 항복할 때 함께하지 않았다는 것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던 김상헌(金尙憲)이 볼모로 잡혀갈 때 가로 맊은 일,

회은군(懷恩君)을 보내 석방운동을 벌이자고 주청한 일이 문제가 되어 구금되었으며,

병자호란 이후 죄인으로 자처하며 망국대부로서 국가의 전복을 구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겼다.

 김상헌과 이식의 충정은 삼전도의 굴욕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소재

 

실록의 편찬과 역사인식

 

그는 상소를 올려 “사기(史記) 는 한 시대의 전장(典章)이며 만세(萬世)의 귀감입니다. -중략-

그러나 광해군 때 간신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옛 기록들을 몰래 삭제하고

스스로 무필(誣筆)을 가하여 시비와 명실이 전도(轉倒)되었습니다. -중략-

지금은 국가는 망하지도 않았는데도 역사가 먼저 망한 실정입니다.”라고 하였다.

 

1641년(인조19) 4월 조정에서는 사기(史記)를 개수(改修)하자는 의견이 모아저 택당이 책임자로 천거되어 

1633년 광해군일기 편수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선조실록을 수정한 장본인이다.

 택당은 자신이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쓰면 공정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당대의 성현이 기록한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고자 노력하였다.

택당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

 택당은 나아가는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당대의 지식인 이였다.

그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전문 관료였다.

 국제정세를 정확히 분석하는 통찰력과 현실을 중시하는 실사구시 형 인간 이였다.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주창한 역사학자였다. 

[출처] 택당의 삶과 시대 인식|작성자 문정공

서울시사편찬위원 이상배 박사 자료  요약

 

화폐에 초상이 실린 이순신, 이율곡도   덕수 이씨 가문의 유명인사.

조선말기까지 택풍당을 거쳐간 후손 들 중에는

정승 3명, 판서급 10명, 문과급제 22명, 무과급제 17명, 생원ㆍ진사가 69명이나 배출.

 

저서로 『택당집(澤堂集)』이 있다.

 

택당의 서체.

택풍당 동쪽 180m 떨어진 야산에 이식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1.16일 농촌 여성 생활 개선회  다이어트 댄스  시작

 

간현 노인회관 2층에서  화 목 저녁 7시 

원주 내려 온 후로 운전을 못해서 운동을 못했다. 순이씨와 함께 다니기로.

1월 17일  엄니 치과 진료.

임플란트 2개 심은 것 이상 없어서 다음 달에  틀니 본 뜨기로.

엄니가 서울까지 다니는 걸 보고 택시 기사들도 부러워서 한 마디씩 한다.

복 받으셨다고.

 

1.19일  복지회관

성지병원 출장  이동 건강검진

 

1.20 토

이십여년 쓰던 미싱이고장 났다.

아름이가 미국서 사온  미싱을 다운 트랜스 없이 사용하다 고장 난 것을  

수리해서 청량리역까지 옮겨 주었다.

 

1. 27 토  11시 시청  태평홀 

 

24년 동화세상 정기총회 및  동화학교 졸업식  축사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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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년 신춘문예 심사 때 최종심에 오른 두 작품을 두고 고민하다 

새해 벽두에 읽을 작품의 주제가 너무 무거워 떨어트린 일이 마음에 걸렸다.

응모자에게 전화를 걸어 고지가 코 앞에 있으니 조금만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해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올해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받았는데 제일 먼저 내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그녀는 남편이 문학평론으로 당선 되고 당선 소감을 읽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 자리에 서고싶어 동화 공부를 시작 했다고 했다.

암투병을 하고 친정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등 우여곡절 중에도 끈을 놓치 않아

6년 째 되는 해에 등단을 한 것이다.

이렇듯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원을 이루게 된다.

정채봉 선생께서 "왕대밭에서 왕대가 난다"셨는데  여러분 뒤에 동화 세상이 잇다는 걸 잊지마라

졸업생 여러분의 감동적인 무용담을 들으며 함께 기뻐할 날을 기다리겠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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