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졸혼도 잘하대. 나도 생각해 봤는데 다 늙어 힘도 없는 늙은이 내처서 뭐해. 마음만 아프지.
그 겨울에 추운데 애들하고 달팽이 주워서 먹고 살겠다고 그 고생 한 것 생각하믄..........
박철순 (78세) 1947년생
서울에서 나고 자라 일곱살 연상의 남편과 연애결혼. 슬하에 1녀 1남을 두었다.
간현사람들은 박철순 어르신을 '꽃박사'라 부른다.
동네 사람들에게 꽃 이름을 알려줄 때 무슨 종, 무슨 속, 무슨과 라고 일러주기 때문.
복지관에 수채화 배우러 다니며 그리는 소재도 정원의 꽃이다.
어린이집 원장 소개로 방문했는데 , 얼린 홍시, 다래, 블루베리, 삶은 달걀, 아몬드 등 앉은뱅이 밥상이 그득했다.
집 주변 과실 열매들을 말리거나 얼려서 저장한 것들이다.
저장 방법을 들어 보니 스스로 터득한 살림의 지혜들이었다.
박 여사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33년 넘게 진통제를 먹는다.
다행히 위가 좋은 편이라 약 부작용은 없다고 했다.
남편이 지었다는 집안에 전시회 때 걸었던 풍경화와 꽃그림 일색이다.
작업실 격인 작은 방에 이젤과 컴퓨터, 재봉틀이 자리잡고 있었다.
꽃 가꾸고 그림 그리고 뜨게질하고 옷 만드는 취미생활에 요리사 자격증까지 땄으니
적적한 산중 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
말동무가 반가워서 스파게티 해줄테니 점심 먹고 가라고 붙들었다.
박여사가 습작한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뒤틀린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 그리는 동안 굽은 손가락 움직임이 나아졌단다.
질문 할 새도 없이 박여사는 지난 세월의 풍상들을 이야기 했다.
나는 가끔식 맞장구를 치면서 듣기만 했다.
"우리 집이 잘 살았어요. 아버지가 나 열살 때부터 작은 마누라를 얻어서 나가 살았어.
그런데도 엄마는 아버지 장사 뒷바라지를 했어. 엄마가 참깨를 하루에 한 가마니씩 볶았어.
아버지가 고추가루 깨소금 이런 거 음식하는데 들어가는 거 팔았거든.
마당에 고추 사다가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맨날 동네 아줌마들이 와서 고추 꼭지 따는 거야.
엄마가 고추를 방앗간에서 빻아와. 그걸 아버지가 가져다가 팔았고. 그렇게 몸고생 맘고생하며 살았어 .
엄마 월급 대신 생활비 주고 자기 자식들이니까 학비는 등록금 고지서 가져가면 그 자리서 줬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1차 시험에 떨어져서 2차로 성신 사대를 봤는데 붙었어.
"1차 붙었으면 어떻게든 보내는데 2차로 붙었으니 안해 준다."
그 여자가 계집애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되는데 무슨 대학을 가느냐. 1차 떨어지고 겨우 2차 붙었는데
왜 등록금을 주냐고 했나봐.
아버지 말에 속으로 많이 울었어. 우리 엄마 고생시키고 나가 살면서 자식 등록금도 안 주냐고.
좋다. 등록금 안 주면 내가 딴 거 배운다하고 옷 만드는 거 배우고, 미싱자수 배우고 미용도 배우고
그러다 애들 아버지 만나 시집 온거야.
어떻게 결혼했냐면 옛날에 청량리역 있는데 588이라고 창녀촌이 있었어.
그때 고모부가 청량리 도로변에서 큰 전파사를 했어. 도시 개발 한다고 거기가 싹 다 헐렸어.
그 댓가로 상계동에 땅을 준거야. 아, 돈 있는 사람이 상계동에 와 살겠어?
언니네가 못 사니까 상계동에 집 짓고 살아라 했어. 형부가 고모부 가게 다녔거든.
우리 언니가 년년생으로 아이를 난 거야. 집에서 밥도 안 해먹다가 죽겠다고 야단이야.
엄마가 언니 좀 도와주라 해서 상계동을 왔어. 언니네 집에 빈 가게가 있는거야.
애들 봐줘야 하니까 큰 가게는 못하고 담배 가게는 할 거 같애.
전매청 허가를 내고 담배 장사를 했어. 나도 참 웃기는 여자야.
우리 애들 아버지가 그때 제대해서 집에 온 거야. 담배사러 왔다가 나를 봤겠지.
저 아가씨가 어떤 사람이냐 동네 사람에게 물었나 봐.
담배 사러 와서 돈 밑에 편지를 준거야 . 속으로 웃기는 아저씨네 했는데 또 편지를 줘.
한 세 번 그러더니 만나자고 그래 . 몇 번 안 만나 줬지. 안 나갔더니 동네 꼬마가 와서 말 하는거야.
언니, 언니 오빠가 저기서 비를 쫄딱 맞고서 언니가 안오면 집에 안간대.
비가 한참 쏟아졌는데 왜 기다리느냐 집에 들어가라 그럴라고 갔더니 손을 꽉 잡고 안 놔 줘.
다방이라는데를 그때 첨 갔어. 커피 한 잔 마시고 듣기만 했는데 뭔 얘기를 했는지도 몰라.
그랬더니 자꾸 만나재. 알고 보니 동사무소 동장 아들이야.
사귄지 6 개월 만에 결혼 했어. 거기는 나이가 서른 살이고 나는 스물 세살이야.
엄마는 7남매 맡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줄 아느냐. 그만 둬라. 고생바가지다 반대를 했어.
아버지가 그러면 맏아들은 장가도 못 가냐고 허락해서 멋 모르고 시집을 왔지
삯월세방을 얻어 줬는대 애들 아버지가 취직을 못해서 노가다 일도 하고 그래.
고모부한테 애기 해서 전파사 다니는데 삯월세 방세 내면 끼니 거리가 없는 거지 .
아침에 도시락 싸주면 나는 누룽지만 먹고 살았어.
자기 동생들 공부 시켜야 하는데 우리가 애를 많이 나면 아버지는 연세가 많으니까 안되겠어. 그래.
딸 하나만 키우겠다는거야. 둘째를 임신 했는데 친정가서 애를 떼고 오라는 거야.
엄마는 어떻게 딸 하나만 낳느냐 낳던길에 하나 더 낳아라.그러고.
꿈에 아버지가 마당에 고추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양념 해먹어라하고 비닐봉투를 주는 거야.
이쁜 걸로 골라서 봉지에 가득 담고 치마에도 주워담았어.
꿈얘기를 듣고 엄마가 아들인가 보다 가서 낳아라 해서 왔더니,
왜 그냥 왔냐고 막 야단이야. 내가 꿈 얘기를 하면서
아들이면 어떻게 할거냐니까 그럼 할 수 없이 나야지. 그래서 아들을 난 거야.
시아버지가 정년퇴직하고 전업사를 했어. 애들 아버지가 일을 엄청 맡아가지고 상계동 공사를 다 했어
그러다 일꾼이 감전사고가 나서 정신병자 병신이 됐어 . 그거 보상해줄 돈이 없어 셋방을 뺐지.
그러니 살데가 없잖아. 월송리에서 상계동에 올라와 살다간 애들 아버지 술친구가 있어.
몇 번 놀러 다녔다고 간현으로 가재. 아는 아저씨네 짐방골 외양간에다 방을 하나 꾸려놓고.
애들 아버지는 수금하고 뒷처리 한다고 서울 간거야. 애 둘하고 간신이 먹고 살 돈만 보내줘.
산꼭대기서 나무 해서 절벽 밑으로 떨궈. 우리집 있는 데야. 내려와서 주어다가 때고. 나도 고생 많이 했어.
먹을 게 없어서 강에서 달팽이 주어서 역전에 가서 팔고. 혼합곡 정부미 10키로 이고 두 고개를 넘어다녔어.
애가 젖을 빨았는데 아침도 못 먹고 팔러가면 머리가 뱅뱅 돌아.
어쩌다가 애들 아버지가 오면 애들 맡기고 달팽이 팔러 다녔는데 일은 안 하고 술만 먹어.
딸이 일곱살인데 여기 있다가는 안되겠다 하고 밤에 서울로 왔어.
동생이 애들을 강가에 놔두고 오면 어떡허냐고. 내가 공장을 차릴테니 언니는 주문을 맡아 오래.
동생이 양장지에 그림 그리는 직장에 다녔으니 한복지에 그림을 그리재.
양쪽 기둥에 천을 팽팽하게 붙잡아 매고 동생이 꽃을 그리고 가면 나는 잎사귀를 그려.
동생하고 둘이 그려서 갖다주면 주문이 많아. 눈코 뜰새 없었어. 애들 아버지 더러 올라오라해서 살았어.
여름에 일감이 뜸해서 동생이 언니 사는데 놀러가자고 친구를 데려 왔는데 친구가 조카 둘을 데리고 왔어.
기차 타려고 줄섰는데 동생이 새치기 해서 기차를 탔어. 그때는 기차에 사람들이 매달려가고 그랬어.
옛날 살던 옆집에서 솥단지 맡긴 거 찾아 오는데 난리가 난거야.
애들이 물에 빠진 걸 건진다고 동생이 물로 뛰어 들어가서 못 나왔대.
아버지가 와서 장사 지내고 가고 나는 장사지내는데 가보지도 못했어.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주저 앉아 넉이 빠진 거야.
가게서는 주문 전화가 빗발치는데 누나가 와서 일 처리를 해야지 어쩔거냐고해서 올라가서 그림 그렸어.
그런데 장사꾼이 솜씨가 다른 걸 몰라. 그래서 돈을 갈퀴로 긁었어, 그러다가 내가 폐병에 걸렸어 .
먹지도 못하고 일만 해가지고.
시동생이 공장 맡아서 할테니 걱정말라고 해서 내려 왔는데 십원도 안 보내 주는거야.
시동생들 먹여 살리느라 가지고 온 돈 얼마 못가 떨어지겠잖아.
애들 아버지한테 가게나 찾아 봐 해서 지금 간현막국수 자리를 샀어.
자장면 장사 하는데 주방장이 억시고. 말도 못해. 개판이야.
내보내고 내가 했더니 아줌마 솜씨가 더 맛있다고 손님이 많았어.
딸이 인하대학 건축과를 갔어. 여기 있다간 대학 못 가르치겠어서 인하대 후문에 호프집을 차렸어.
손님이 그렇게 많아서 몸이 고되니까 아팠어.
아들이 인하대 떨어져서 상지대에 들어간거야. 집에 와서 중앙시장 있는데 돈가스집 차렸는데 그렇게 잘 돼 .
류마티스 관절염이 생겨 그만두고 횡성으로 갔어. 거기서 먹고 산다고 토끼를 길렀어.
토끼가 일년에 여섯 일곱번 새끼를 나. 그 이쁜 거를 죽을 데 보내는데 못해 먹을 짓이야 .
벌이가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경매 나왔다하면 버스 타고 가서 보고 샀다 팔았다 돈을 남겼어.
일년에 두 번만 하면 먹고 살고 남아 .아들 집도 경매로 샀어. 여기 집도 땅을 싸게 사서 애들 아버지가 지은 거야.
땅장사 해서 발에 흙 묻히지 않게 살만큼 됐는데 간현 유원지 칠백 몇 평을 우리 더러 사라는거야.
출렁다리 올라가는데 마지막 땅 말이야.
그때 포니 디럭스 차도 있고 기사도 있어서 애들 아버지한테 계약금 줘서 보냈더니,
자기가 안 가고 아버님더러 계약하라고 했나 봐.
우리 아버님이 시동생이 못 사니까 야 그 땅을 니가 사라 했대. 나중에 유원지 되면서 보상을 크게 받았어.
그 땅만 샀으면 아유. 그거 말고도 자장면 집 하던데 가게 3개가 나와서 다 사라고 했어.
돈을 줬더니 친구 꼬임에 빠져 친구 땅을 샀어. 파란 만장하지?
딸은 대학원 나와서 서울대 박사과정하다가 좋은 사람 만나 시집 갔어. 사위가 엘지 연구원이야.
딸도 류마티스 관절염 걸려서 건축설계사 그만 두고 편하게 살아.
아들이 복지사 취직해서 춘천에 가있는데 공무원 시험 볼까? 그래서 늬할아버지도 공무원했으니 잘 생각했다 했지.
이젠 너무 지쳐서 욕심 부리지 말자 하고. 애들이 용돈 주고 내가 연금을 들어서 연금 타고. 그냥 살아.
남들은 졸혼도 잘하대. 나도 생각해 봤는데 다 늙어 힘도 없는 늙은이 내처서 뭐해. 마음만 아프지.
그 겨울에 추운데 애들하고 달팽이 주워서 먹고 살겠다고 그 고생 한 것 생각하믄 내가 자다가도 뻘떡 일어나.
동생 죽은 거 생각하믄 어휴,
가슴 속 응어리를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는 철순 어르신
젊어서 겪은 가난이 뼈에 사무쳐서 근검 절약이 몸에 베었다.
그 동안 몸 돌볼 새 없이 사셨으니 이제는 당신 위한 삶을 사시라고.
다행히 혼자 즐길 취미 생활이 있으니 얼마나 큰 위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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