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칼럼<어머니와 나>
우리 어머니 박 순 임 여사
김 향 이(동화작가)
그 많고 많은 기억 중에서 하필이면 가장 아픈 기억들이 떠오를 건 뭔가. 아픈 기억들은 애써 다 지워버렸는데.
“시집가지 마라. 늬 아버지 같은 사람도 맘 변하는데 어떤 남자를 믿고 살겠니.”
어머니가 빈속에 소주를 들이키며 내게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사십 계단 위에 있는 만리동 집에서. 그 날 밤의 쓸쓸했던 방안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라 가슴이 서늘해진다.
깡 소주를 마시고도 날밤을 새우셨던 어머니, 마당에 수북히 쌓인 눈 위에 맨발로 서서 하염없이 달을 보고 서 계시던 어머니, 한 밤중에 아현동 골목길을 헤매다가 창밖으로 새어나온 아버지의 말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여자가 사는 집을 찾아낸 어머니.....
나는 어쩌자고 넌더리나는 묵은 기억들을 더듬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혼자 오 남매를 거두셨다. 스무 살 어머니의 고명딸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의 아픔을 지켜보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새벽같이 밥벌이를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실 때까지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저녁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끓는 물에 수제비를 텀벙텀벙 때어 넣어 걸구 같은 사내 동생 넷을 먹이는 일이 내 일과였다. 저녁마다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어 뒤틀린 심사를 드러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먼길을 걸어오시고 허기진 배를 건빵으로 때우셨다 한다. 그렇게 지쳐서 돌아온 어머니는 삯빨래를 하거나 다림질하시느라 밤늦도록 허리 한 번 펴지 못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어머니의 등골을 빼먹고 자랐다.
철이 없었을 때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는 말을 듣고 정말로 그렇게 될까봐 걱정을 했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서울 여자들처럼 세련되지도 영악하지도 못하고 어수룩했으며, 촌티가 줄줄 나게 사투리를 쓰는 데다 옷차림마저 남루했고, 못 배운 티를 내느라 영어 발음도 이상하게 했으니까 그런 어머니를 닮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런 어머니가 창피해서 바람을 피웠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새끼들 데리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어머니가 고맙기는커녕 궁상맞게만 보였으니까.
철들고 나서부터 어머니가 얼마나 강하고 알뜰하며 끈기 있고 경우 밝으며 지혜가 많은지 새록새록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열아홉 살에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아홉이나 되는 식솔들 수발들며 징그럽게 가난한 살림을 사셨다.
열아홉에 시작한 솥뚜껑 운전을 일흔 두 살이 되신 지금까지 놓지 못하는 어머니는 황소다. 살림하랴, 텃밭 농사지으랴, 세 마리나 되는 강아지 시중들랴, 마당의 화초들 돌보랴 엉덩이 붙일 새 없이 동분서주하신다. 그 종에서 어머니가 가장 좋아 하는 일은 화초 돌보기이다. 마당과 화분에서 자라는 꽃들을 일일이 매만져주시면서 말을 거신다.
“꽃눈이 너무 많아서 쓰것냐. 쪼금만 띠어낼 팅게. 아파도 참아라잉”
어머니는 꽃나무가 말을 알아듣는다고 하신다. 한번이라도 손길을 준 꽃들은 색깔도 곱고 모양도 실하다고 하신다. 우리도 화초처럼 어머니 손을 타면서 그렇게 사랑을 먹고 자랐다.
어머니는 담대하고 강하다. 어머니가 열여덟에 겪은 6.25 전쟁 일화들은 놀랄 일이 많다.
외가 근방의 회문산이 인민군의 근거지가 되어 날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방공호에 숨어있는 식구들 밥을 지어서 밥 바구니에 담아 이고 산에 오르는데, 총알이 날아와 바구니 뚜껑을 날려버렸다. 다른 처녀들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떠는데 어머니는 산 아래로 굴러간 바구니 뚜껑을 찾아 덮고 산을 올라갔다 한다. 총성에 놀란 어떤 아낙네는 아기 대신 베개를 안고 뛰었다는데.
산 속에서 군인을 만나 겁탈 당할 번 한 적도 있었다. 그 남자의 멱살을 거머쥐고 ‘이놈아 너는 어머니도 누이도 없느냐’고 호통을 치고 완강히 버텨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다. 방공호에 느닷없이 총알이 날아들어 고모할머니의 가슴을 뚫고 어머니의 허벅지를 후리고 나갔다. 돌아가신 분을 붙들고 울고불고 정신이 없는데 어머니마저 총상을 입었다고 할 수 없었다. 상처를 검정 치마로 틀어막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밤에 집으로 내려와서야 비로소 총상을 입은 사실을 알렸다 하니!
그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고모할머니 딸이 물을 먹으러 방공호에서 나갔는데 군인들이 빨치산 인줄 오인하고 총을 쏘았다. 그 총알에 맞아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다음날 군인들이 동네 처녀들을 집합시켜 놓고 빨치산을 잡는다고 조사를 했다. 그때 국군정보 과장이던 아버지가 취조를 맡았는데 어머니가 빨치산인지 민간인인지 구별도 못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 인연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 년 뒤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많다. 결혼 전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날 핑계로 부대원들의 빨랫감을 가지고 외갓집을 들락거렸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군인들의 빨래를 손질해주곤 했는데 떨어진 곳은 얌전히 꿰매서 보냈다. 군인들이 바느질 솜씨를 보고 그 집에 재봉틀이 있는가 보다 했을 정도로 어머니 바느질 솜씨가 얌전했다. 어머니는 손재주가 야무져서 살림살이가 고장 나면 무엇이든 척척 고치셨다. 어머니 손 댄 곳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두 다리 뻗고 편히 주무신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아버지가 늘그막에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돌아오신 뒤에도 어머니는 그 여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악몽을 꾸고 진저리를 치신다.
어머니가 꿈 꾼 이야기를 들먹이며 옛이야기를 꺼내면, 이제 그만 잊으시라고 말하고 싶어도 못한다. 어머니가 그렇게나마 기억을 환기시켜야 어머니의 등골을 빼먹고 자란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할 테니까.
어머니 가슴에 박힌 수많은 못들은 언제나 다 뽑아낼 수 있을까? 제발 아픈 기억들은 훌훌 털어 버리고 좋은 기억들만 간직하셨으면 좋으련만. 가슴에 박힌 못이 녹슬어서 잘 빠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여자가 자식들 데리고 목구멍에 풀칠은 해야겠고 .... 얼마나 겁나고 막막했겄냐? 내가 국민학교만 나왔어도 그 고생은 안 했을 것이다.”
언젠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울먹이던 어머니의 속엣말은 지금도 콧날을 시큰거리게 한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돈방석에 앉을 것인디. 근디 너는 소설은 쓰면 안 되는 것이냐?”하고 말씀하시는 우리 어머니 박순임 여사는 사랑스럽다.
모쪼록 어머니의 노년이 복되고 또 복 된다면 바랄 것이 없으련만.
우리 어머니 박 순 임 여사
김 향 이(동화작가)
그 많고 많은 기억 중에서 하필이면 가장 아픈 기억들이 떠오를 건 뭔가. 아픈 기억들은 애써 다 지워버렸는데.
“시집가지 마라. 늬 아버지 같은 사람도 맘 변하는데 어떤 남자를 믿고 살겠니.”
어머니가 빈속에 소주를 들이키며 내게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사십 계단 위에 있는 만리동 집에서. 그 날 밤의 쓸쓸했던 방안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라 가슴이 서늘해진다.
깡 소주를 마시고도 날밤을 새우셨던 어머니, 마당에 수북히 쌓인 눈 위에 맨발로 서서 하염없이 달을 보고 서 계시던 어머니, 한 밤중에 아현동 골목길을 헤매다가 창밖으로 새어나온 아버지의 말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여자가 사는 집을 찾아낸 어머니.....
나는 어쩌자고 넌더리나는 묵은 기억들을 더듬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혼자 오 남매를 거두셨다. 스무 살 어머니의 고명딸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의 아픔을 지켜보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새벽같이 밥벌이를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실 때까지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저녁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끓는 물에 수제비를 텀벙텀벙 때어 넣어 걸구 같은 사내 동생 넷을 먹이는 일이 내 일과였다. 저녁마다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어 뒤틀린 심사를 드러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먼길을 걸어오시고 허기진 배를 건빵으로 때우셨다 한다. 그렇게 지쳐서 돌아온 어머니는 삯빨래를 하거나 다림질하시느라 밤늦도록 허리 한 번 펴지 못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어머니의 등골을 빼먹고 자랐다.
철이 없었을 때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는 말을 듣고 정말로 그렇게 될까봐 걱정을 했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서울 여자들처럼 세련되지도 영악하지도 못하고 어수룩했으며, 촌티가 줄줄 나게 사투리를 쓰는 데다 옷차림마저 남루했고, 못 배운 티를 내느라 영어 발음도 이상하게 했으니까 그런 어머니를 닮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런 어머니가 창피해서 바람을 피웠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새끼들 데리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어머니가 고맙기는커녕 궁상맞게만 보였으니까.
철들고 나서부터 어머니가 얼마나 강하고 알뜰하며 끈기 있고 경우 밝으며 지혜가 많은지 새록새록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열아홉 살에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아홉이나 되는 식솔들 수발들며 징그럽게 가난한 살림을 사셨다.
열아홉에 시작한 솥뚜껑 운전을 일흔 두 살이 되신 지금까지 놓지 못하는 어머니는 황소다. 살림하랴, 텃밭 농사지으랴, 세 마리나 되는 강아지 시중들랴, 마당의 화초들 돌보랴 엉덩이 붙일 새 없이 동분서주하신다. 그 종에서 어머니가 가장 좋아 하는 일은 화초 돌보기이다. 마당과 화분에서 자라는 꽃들을 일일이 매만져주시면서 말을 거신다.
“꽃눈이 너무 많아서 쓰것냐. 쪼금만 띠어낼 팅게. 아파도 참아라잉”
어머니는 꽃나무가 말을 알아듣는다고 하신다. 한번이라도 손길을 준 꽃들은 색깔도 곱고 모양도 실하다고 하신다. 우리도 화초처럼 어머니 손을 타면서 그렇게 사랑을 먹고 자랐다.
어머니는 담대하고 강하다. 어머니가 열여덟에 겪은 6.25 전쟁 일화들은 놀랄 일이 많다.
외가 근방의 회문산이 인민군의 근거지가 되어 날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방공호에 숨어있는 식구들 밥을 지어서 밥 바구니에 담아 이고 산에 오르는데, 총알이 날아와 바구니 뚜껑을 날려버렸다. 다른 처녀들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떠는데 어머니는 산 아래로 굴러간 바구니 뚜껑을 찾아 덮고 산을 올라갔다 한다. 총성에 놀란 어떤 아낙네는 아기 대신 베개를 안고 뛰었다는데.
산 속에서 군인을 만나 겁탈 당할 번 한 적도 있었다. 그 남자의 멱살을 거머쥐고 ‘이놈아 너는 어머니도 누이도 없느냐’고 호통을 치고 완강히 버텨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다. 방공호에 느닷없이 총알이 날아들어 고모할머니의 가슴을 뚫고 어머니의 허벅지를 후리고 나갔다. 돌아가신 분을 붙들고 울고불고 정신이 없는데 어머니마저 총상을 입었다고 할 수 없었다. 상처를 검정 치마로 틀어막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밤에 집으로 내려와서야 비로소 총상을 입은 사실을 알렸다 하니!
그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고모할머니 딸이 물을 먹으러 방공호에서 나갔는데 군인들이 빨치산 인줄 오인하고 총을 쏘았다. 그 총알에 맞아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다음날 군인들이 동네 처녀들을 집합시켜 놓고 빨치산을 잡는다고 조사를 했다. 그때 국군정보 과장이던 아버지가 취조를 맡았는데 어머니가 빨치산인지 민간인인지 구별도 못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 인연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 년 뒤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많다. 결혼 전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날 핑계로 부대원들의 빨랫감을 가지고 외갓집을 들락거렸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군인들의 빨래를 손질해주곤 했는데 떨어진 곳은 얌전히 꿰매서 보냈다. 군인들이 바느질 솜씨를 보고 그 집에 재봉틀이 있는가 보다 했을 정도로 어머니 바느질 솜씨가 얌전했다. 어머니는 손재주가 야무져서 살림살이가 고장 나면 무엇이든 척척 고치셨다. 어머니 손 댄 곳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두 다리 뻗고 편히 주무신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아버지가 늘그막에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돌아오신 뒤에도 어머니는 그 여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악몽을 꾸고 진저리를 치신다.
어머니가 꿈 꾼 이야기를 들먹이며 옛이야기를 꺼내면, 이제 그만 잊으시라고 말하고 싶어도 못한다. 어머니가 그렇게나마 기억을 환기시켜야 어머니의 등골을 빼먹고 자란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할 테니까.
어머니 가슴에 박힌 수많은 못들은 언제나 다 뽑아낼 수 있을까? 제발 아픈 기억들은 훌훌 털어 버리고 좋은 기억들만 간직하셨으면 좋으련만. 가슴에 박힌 못이 녹슬어서 잘 빠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여자가 자식들 데리고 목구멍에 풀칠은 해야겠고 .... 얼마나 겁나고 막막했겄냐? 내가 국민학교만 나왔어도 그 고생은 안 했을 것이다.”
언젠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울먹이던 어머니의 속엣말은 지금도 콧날을 시큰거리게 한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돈방석에 앉을 것인디. 근디 너는 소설은 쓰면 안 되는 것이냐?”하고 말씀하시는 우리 어머니 박순임 여사는 사랑스럽다.
모쪼록 어머니의 노년이 복되고 또 복 된다면 바랄 것이 없으련만.
출처 : 계몽아동문학회
글쓴이 : 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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