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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반사

1200회 멋진 인생

멀리 가는 향기 2023. 12. 15. 12:38

 

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 배우 신영균(96)은  이승만 기념관 부지를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년 가까이  살던 서울 고덕동의  금싸라기 땅 4000평. 

“이승만 대통령이 고덕동 쪽 한강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기념관을 지어도 되겠다 생각한 거죠. 건국 대통령 아니겠습니까? 예우를 해야죠.”

“좌다 우다  대한민국이 갈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승만이란 사람이 나라를 위해 애썼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셔야죠.

정치적으로 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정치인도 국민도 대한민국을 위한 싸움만 했으면 해요.”

 

그는 배우 말고도 치과 의사, 국회의원, 사업가로 일했다.

. “손대는 것마다 잘되더라고요. 유일한 실패는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거였어요.

그때 쓴맛을 본 뒤 나무나 키워야겠다는 심정으로 고덕동에 집을 지은 거예요.

시간이 지나 그 땅을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요..”

“선거 20일 앞두고 서울 성동구 후보로  나가라는 거예요. 중앙정보부에서 반협박으로. 

나밖에 나갈 사람이 없다니까. 돈만 쓰고 600표 차이로 떨어졌죠.

상대 후보가 ‘신영균에게 세컨드가 있다’고 흑색선전을 했어요. 며느리였는데 말이에요.”

 

- 기부가 돈 버는 것보다 힘들다던데.

“가족도 동의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기부한다고 하면 자식들이 찬성해주고,

또 아들이 기부하자고  말 꺼내면 제가 호응해주고 그래서 된 거죠.”

 

2006년  50년 뒷바라지해준 아내를 위해 준비하던 금혼식을 취소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1억원을 기부.

검소하고 낭비하지 않는 성격에  구두쇠로 불렸던  그의 통큰 기부가 이어졌다.

2010년 500억원 상당의 명보극장과 사재 100억원이 들어간 제주의 영화박물관을 기증.

모교인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준 서강대에도 수십억원을 기부.

각종 구호 성금, 탈북 학생 장학금 등에도 수십억원을 내놨다.

 

 

유년 시절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

홀어머니가 “내가 너 딴따라 하라고 이북에서 데리고 온 줄 아느냐”고 반대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가출해  2년간 전국을 돌며 연극 무대에 섰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다

공부해서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먹고살려고 치과를 개업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했다.

1960년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데뷔,  300편 찍으며 당대 최고 스타가 됐다.

 

-의사 하다가 배우 한다면 반대가 심했을 거 같아요.

“와이프가 반대했죠. 자기는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배우와 한 게 아니라면서요.

그래서 약속했죠. 나는 당신만 사랑하겠노라고.”

그의 스타일리스트는 딱 한 사람이었다. 아내 김선희씨.

“평생 그림자처럼 뒷바라지했죠.  그 사람만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소원이 있다면요?

“마누라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또 나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진짜. 나 없다고 자살하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지금도 사랑해요.”

 

2012년 3월  제주 여행 중에  찾은  <신영균 영화 박물관>

 

 

1965년 열 세살 때, 양정중학교 운동장에 스크린 설치하고  <남과 북>을 상영했다.

전쟁으로 엇갈린 세 남녀의  애끓는사랑을 진한 휴머니즘으로 그린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라디오 드라마화 한 것을 제작 한  김기덕 감독 작품.  .

한국전쟁 중 북한군 소좌 (신영균 분)는 부인(엄앵란)과 아이를 찾기 위해 남한군에 투항 한다.

육군  이대위(최무룡)에 연행된 그는 아내를 찾는다며 사진 보였는데 이 대위의 아내였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애절한 주제가는 어린 내 가슴을 적시고 들어와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있다.

 당대  기라성 같은 남자배우들 최무룡, 남궁원, 김진규, 신성일 중에

 우직하고 선이 굵은 연기를 하는 신영균이  최고로 멋진 남자로 비쳐져 내 이상형이 되었다.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중앙일보2019.12.17 

 

아내를 처음 본 순간 서글서글한 눈매와 미소에 사로잡혔다.

그 후 종로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데이트를 신청했다.

해군 제복을 입은 외모와 남자다운 음성에 아내도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내를 만난 어머니가 더 적극적이었다.

“이런 여자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누구랑 하겠니. 네가 싫다고 하면 내가 죽겠다.”

 

1년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형편상 신혼여행은 엄두를 못 냈다.

아내는 이화여대 정외과 2학년이었고, 내 군인 월급은 쥐꼬리였다

결혼 다음 날 새벽 기차를 타고 경남 진해로 갔다. 

해군 관사에서 신접살림을 할 요량으로 가 보니 두 평도 안 되는 단칸방이었다.

있는 거라곤 담요 하나와 양념 조금 싸 온 게 전부였다.

담요로 대강 찬바람을 막고 첫날밤을 보냈다

아내는 냄비와 풍로, 숯불을 사와서 밥을 지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당시 통장에는 요즘 500만원 정도니 생활 밑천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돈을 벌려고 진해에서 서울치과를 열었다.

당시 군의관들은 낮에는 군인으로, 밤에는 의사로 살 수 있었다.

한푼한푼 모아 제대 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차렸다.

효자동 집을 처분하고 한동안 치과 안에 있는 다다미방에서 지냈다.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까지 셋이 몸을 눕힐 공간은 됐지만 겨울에는 추위가 문제였다.

석유난로를 피우고 잠들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생활이 조금 자리를 잡으니 연극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치과의사, 연극배우 1인 2역을 했다. 연극으로 인연을 맺은 병원 손님들도 생겨났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혜자씨도 동남치과에 왔다는 얘기를 한참 후에 듣게 됐다.

 

막상 영화배우가 되니 ‘겹치기 출연’ 때문에 스케줄 관리가  문제였다.

차에서 쪽잠 자는 나를 보고 스태프들이 재촉하면 아내가  승강이를 벌이곤 했다.

하루에 서로 다른 영화 세 편을 찍는 날이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도 헷갈렸다.

양말·넥타이 색깔까지 일일이 챙겨준 아내가 없었다면 그 바쁜 일정을 어떻게 다 소화했을까.

 

당시 아내가 깨알 같이 적어놓은 출연료 장부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촬영이 중단되거나 흥행에 실패하면 돈을 떼이기 십상이던 시절이다.

아내는 “아직 입금 안 됐으니 촬영을 미뤄라”는 코치까지 해줬다.

아내는 내가 나온 신문기사는 물론 대본까지 수집했다.  

그간 모은 자료를  고모님이 이사하면서 팔아버렸는데  되찾겠다며  고물상·골동품점을 돌아다녔다.

 

 

배우에게 가장 치명적인 건 스캔들이다. 60년 영화인생의 유일한 스캔들이 있었다.

홍콩의 유명 여배우 린다이(林黛)와의 염문설이다.

우리는 70일간 촬영하면서 동료 배우로서 가까워졌다.

린다이는 당시 톱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남편 문제였다.

한 주먹 하는 남편의 폭력 때문에 힘들어하더니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홍콩과 한국 언론에서 그녀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급기야 나와 관련이 있다는 기사까지 터졌다.

나를 사모해서 사랑 고백을 했지만 거절당하자 삶을 비관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만큼이나 린다이와 가깝게 지낸 아내는 이런 해프닝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아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신상옥 감독이 1순위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신 감독은 정말 영화를 위해서 태어나 영화만을 위해 산 사람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그때는 필름이 비싸서 남들은 필름을 한 3만~4만 자 쓴다면 신 감독은 7만~8만 자씩 썼다.

사업 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빚쟁이들이 촬영장까지 찾아와 옆에 서 있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았다.

 

신 감독 앞에서 최은희씨와 입술이 맞닿는 연기를 하느라 진땀 뺐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강화도령’에서 최은희씨가 물 한 모금을 자기 입안에 넣어 다 죽어가는 내게 먹이려 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인 신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정면으로 포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내가 약간 비뚤어지게 고개를 돌리면 신 감독은 어김없이 컷을 외쳤다.

“물을 입속에 넣어야지 왜 옆에 다 흘리나. 제대로 해!”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신 감독이 저세상으로 가기 한두 달 전쯤 내 제주 집에 온 적이 있다.

하루 이틀 머물러 보고는 풍광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 여기서 좀 쉬게 해줘. ‘징기스칸’ 콘티를 여기서 끝내야겠어.”

“예, 언제든 오십시오. 우리 마지막 작품 같이 하십시다.”

우리는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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